4 이렇게 살았다 6 편

한밤에집을나오다.

2년전아버지가퇴직금을나에게주시며이율이좋은회사의신협에입금하라고하여

신협에출자를하고매년높은배당(세전평균23%)을받았고또한신용조합총회에서

이사에피선되어신협운영에참여하고열심히신협을위하여일도하였다.

경기도광주로발령받아이사간두아이와힘들게살아가는여동생미자가마침사놓으면

재산이될만한땅이나왔다면서어머니를졸랐고,

어머니는시집간딸에게조금(?)만보태주면600여평의땅을산다는데도와주지않을수가없었기,

어머님의요구에의해80만원을회사신용협동조합에서대출을받아어머니에게드렸다.

원금상환과대출이자가월60,000원정도급여에서자동공제납부되는관계로어머니에게드리는

월급봉투엔남은돈이항상절반이안되었었다.

(1983년~1997년월급명세서오른쪽은바뀐양식의과장월급명세서매년2만원씩신협에저축하고살았다)

이에어머니가아내를잡고탄식을하니아내또한말대꾸를할수밖에없었을터,

"어머니대출이자라도조금씩만달라고하면안될까요?"

"예네가버는돈이냐?그리고힘든시누이가돈을빌려갔다고이자를받겠다는게

말이되는소리냐?그래네가돈이라도한푼벌어다주길했냐뭘했냐?"

"어머니그런말씀이어디있어요?최소한은행이자는준다고하지않았나요?"

"예너참뻔뻔하다,너이집에시집와서보태준게있냐?돈을벌어오길했냐?"

"저이가벌어다주는돈전부어머니가받지안아요?그러면서도

저에게용돈을한번주시거나종영이종관이과자라도사주라고단돈십원이라도주신적있으세요?

손자들(종영이종관이)에게사랑하는마음에단한번이라도

단돈5원짜리눈깔사탕이라도직접사다주신적이라도있으세요?"

어머니손자가골목길에서다른아이들이냠냠거리며먹는것처다보고는먹고싶다고

우는모습을본적이라도있으세요?

저희는다른애들먹는것보고사달라고조르면끌고들어와회초리만들고때렸어요"

라며눈물로항변했다가고부간의다툼이시작되었고

아마도시집와서고부간에처음으로말대꾸를하는것이었을것이다.

"시집와서지금까지4년간

어머니에게애썼다,

고생했다,잘했다라는소리한번못들었고

남편월급날은봉투째어머니에게갖다바쳤기살림하는여자가주머니에

십원자리동전하나가없었어요.

다른집며느리들처럼구멍가게서반찬거리한번도마음놓고사보질못했고,

반찬은어머니가사오는데로반찬을했고,

반찬거리없어서안하면안했다고혼났고

살림을혼자도맡아했으나4년동안용돈도한푼이라도주신적있어요?

아이들은커가는데저축도못하고,

저축은커녕희망이없는생을살아가고있다구요"

라고눈물겨운호소가시작되었다.

다다음달이

종관이첯돐이니돈얼마라도내주시며다음달이종관이돌인데이렇게하자,

하며말도안꺼내는시부모가야속했었다.

아내의응어리진사연들이엉킨실타래풀리듯줄줄풀려나왔다.

친정에서애낳고7일만에오니물독에물없다고물길어오지않는다고혼났고,시동생들

도시락반찬을고기반찬으로안싸준다고혼났고,애들울린다고혼났고,방3개연탄불제시간에

안갈아꺼진다고혼났고,다섯시동생빨래제때안한다고혼났으며,

어린시동생들이밖에서매맞고들어온다고혼나고살았다고

하며그동안가슴에품고참고살았던모든사건들을

큰소리로악에바쳐내지른다.

그동안말없이순종만하던며느리의당돌한반항에놀란어머니는순간할말을잊고욕부터내뱉는다.

"야이X아세상에어떤며느리는그렇게안산다냐?너희들나가라이런몹쓸것,

밥세끼배불리먹여주고재워주니까인제보이는것도없고,겁도없구나,

나가라나가살아~이X아~"

아버지가퇴근해오시면서이상황을목격하셨고나는가운데우리방에서이고부간의

다툼에언제나서야하는지고민하다가이X아나가살아라하는소리가끝나자안방으로

들어가아내를끌고우리방으로들어와누워있는아이들옆에무릅꿇여앉혀놓고안방의눈치를보며

아내의따귀부터한대때렸다"짝~"소리가안방에들릴정도로,

그리고소리쳤다.

"당신말이야지아비는하늘이지?하늘의부모님은얼마나높은분이야

왜높은어른들께말대꾸를하는거야?남편을웃읍게보는거야?

어머니가그렇게만만해?그렇게악을쓰며꼬박꼬박말대꾸를해대게

너나하고살기싫은거야?"

하고또한대의따귀를때렸다,"짝~~"

아내의입술이터져피가흐르고있었고이미많은눈물에흠뻑젖은얼굴에또다른눈물을

흘리며참았던울분을터트리며

"내가잘못했어요,우리애들그리고내신세가너무서러워서그랬어요엉엉엉"

하며울면서잘못했다고빌고있는데

사태가심싱치않다고생각하신아버지와어머니가쫓아들어와아내를피하게하며어머니가

나를떠밀며

"이놈새끼가부모앞에서제마누라를패~이새끼야당장나가나가!!!~"

"그래너희들지금나가라나가살아라"

하고얼마전부터상황을주시하고계시던아버지도분명히한마디로나가라고하셨다.

그날밤1978년11월8일오후11시20경

우리4식구는막내의생일돐(1월11일)을두달을남기고자는두아이를깨워업고

무작정해방되었다는감상에젖어어떻게든이소굴만빠져나가면되는양

부모님께잘못했다고빌거나하소연도하지않고뒤도안돌아보고집을빠져나왔다.

(처갓집에서큰애를업은우리부부모습,합성사진임)

서러움에북받혀급히나오느라갖고나올게없어서막내기저귀몇장이든가방과

문옆에세워놓은낚시가방이눈에띄어그것만들고통금시간전에가야한다며택시를탔다.

만석동끝에서용현동까지달려가결혼시계를기사에게맡겨놓고처갓집에서1,500원을

빌려다기사에게주고시계를찾았다.

엄동설한에집을나오면서도우리부부는야릇한쾌감을느꼈다.

분명히보란듯이더잘살수있다고…

아내는아무말없이아이를무릅에안은채앞만보고있었고

이제내일부터는우리4식구만뭉쳐서살아갈계획을짜는모습이었다.

얼마뒤아내가가만히내손을잡고있다가힘을주어꼭쥔다…..

78년11월10만원짜리삭월셋방을얻어

용현동처갓집에서만석동으로의첯출근이다.

용현동에서28번뻐스를타면화수사거리를통과하여대우중공업앞에서내려출근한다.

새벽밥먹고단숨에걸어서5분에출근하던습관때문에그며칠이매우힘들게느껴졌다.

출근첯날출근거리가멀어진만큼새벽5시에일어나밥하는아내의모습도보기가그렇고

단잠을자는장인장모와처남들을모두깨우게되는것도미안하기도하였기

3일만에아내에게처가에서10만원정도만빌려서회사가까운곳에삭월셋방을얻자고

말했더니그날로회사근처인화수동쌍우물인근의블럭으로지은부엌이판자로되어있는

방한칸을얻었다.마루건너안방은전세방이며그방은부엌과다락도있었다.

이집에서출근은만석동집에서출근하는거리와비슷했기에아주편했고부엌이좁고판자인것이

흠이긴하지만안성맟춤인집이었다.

아내가친정에서12만원을빌려10만원월세를주고2만원으로몇가지살림을장만하고

퇴근해보니본가에있던시집올때갖어온장롱과화장대를혼자서모두옮겨놓았다.

이때부터대출금상환을계속하면서약30,000원정도의월급봉투를아내의손에쥐어주기

시작했고생활을꾸려나가기에형편없이적은돈이었지만아내는시집와서처음으로남편의

봉급을나온그대로100%를받아쥐는기쁨을느꼈으리라

그리고잠시후밖으로말도없이나간다.

얼마나좋았으면시키지않은맥주두병과안주를사다가저녁상과같이놓으며

"여보한달동안수고많이하셨어요"

하며하얀크라스에거품을풍기며노란맥주를두손으로맥주를따라주었고나는사무치는

감격에겨워눈물을감추며아내의얼굴을바라보니아내역시눈시울이촉촉하게젖어있었다.

그날이1978년11월25일이었다.

그렇지만우리의생활은세달에한번지급되는상여금이없었다면거지꼴을면치못했으리라…

1979년1월11일작은아이돐

처갓집에서수수팥단지를조금해왔지만돈이없는아버지가해줄수있는돐잔치가

겨우작은생일케잌하나였다.

(종관이의돐사진이다,집을나온후몇달을이렇게살았었다,정말서러운나날이었다)

본가에선어머니와아버지도또한그누구도손자의첫돐이라고

찾아와축하해주는사람이없었으며

먼훗날까지두고두고가슴에묻고살아야할사연으로

부모형제들은이사실을애엄마가예기하지않는이상끝까지모르고살아갈것이다.

이글을쓰는이순간필자의눈에천천히흐르고있는뜨거운감회의눈물을닦아낸다…..

(그해봄종관이,엄마에게혼나고골목길에서울고있는모습)

아내는살림에보태고자두살짜리종관이를5살짜리형에게맏겨놓고멀리부평지하상가공사장

에새로건설하는상가건물을얼마동안청소알바를다녔고,

그일이떨어지면동네의가내수공업을하는집에서부업을얻어다작업을하는등억척스럽게

한푼두푼모아나갔다.

우리는이렇게억척같이개미처럼일하면서도늘행복한세월을보냈었다.

그리고이집에서비록셋방살이지만아버님의회갑상을차려드렸다.

(아버지회갑기념,남자형제들만한복을입었다)

다행인것은아이들도아내도아픈곳하나없이잘버텨주었고1년이지난후안방에살던사람이

나가고우리가이집의방3개독채를80만원에전세를얻게되었다.

마침내가근무하는중기본부엔지방에서고교를졸업하고취업하는신입기능사원들을채용했는데

이들을보니하숙을치는것도도움이될듯싶어

아내에게하숙을치는것이어떠냐고물었더니한참후한사람3만원이면된다고한다.

당시전문하숙집의하숙비가공통4만원이었기에우리집엔5~6명이항상줄을서고있었다.

하숙생을치면서부터우리의살림에많은보탬이되었다^^

"중기관리부박문규씨가하숙을치는데값도싸고회사직원들이하숙하기편하다"

하며서로줄서서전임자가나가기를바랄정도로하숙업은호황이었다.

아내의철저한절약생활에살림은여유가생겼고,

어느날회사에서5년간부었던재형저축만기환급금70만원을수령할때였다.

마침동생봉규(세째)부부가찾아와사업자금도움을요청했고간판집3년간어리다는생각에

월급을제대로주지못한보상으로봉규부부에게사업자금으로전액을내주었다,

이는물론아내의승인하에결행되었지만….

그러나호사다마라고주인집아주머니가정신이나간관계로가끔(1년에두세번)처들어와

갑자기방문을열고들어오며뭔알수없는괴성을내며살림을부수는등우리식구들을

놀라게하는일이자주생겼기에이곳에서의생활이자꾸싫증이나기시작했다.

마침만석국민학교앞에아파트가완공되어가고있었다.

아내에게만석아파트를새로짛고분양중인데우리한번가보자하며따듯한아파트서편하게

살아보자했고마침내18평,방3개거실하나작지만아직까지살았던집들보다는크고반듯한

내집을사게되었다.

분양가1,350만원입주금800만원잔금550만원20년상환하기로하고빛없이자력입주했다.

무일푼으로집나온지3년8개월드디어내명의의집을장만하였다.

1982년7월4일이다.

이일은아내의초인적인노력이없었다면절대불가능한일이었다.

그후로1985년3월송현아파트로전세이사,

다시큰아이를사립학교에입학시키고자1986년3월가좌동의한마음아파트전세이사했고

이집에살면서회사에서그렇게몇년을소망했던대리로승격을하였다.

그날밤은아버지에게도어머니에게도또한처갓집에도모두전화를걸어인사를하며

"저회사에서대리로승격되었습니다"

감격의뜨거운눈물을흘리며모든이들에게감사의전화를했다.

그리고총무부식당반장에서본사인력지원부노무기획과로이동근무를하게되었다.

1987년5월17일회사가까운화수연립아파트로전세이사하여살면서또다시

부모님과형제들이가까우니자주왕래를하게되었고이집에서어머니회갑(1988년)을차려

드리고자했으나어머니가제주도여행을원하셨기아버님과같이여행을보내드리면서

그래도서운하니가족들끼리라도모여식사라도해야한다며집에서상을차려드렸다.

(아버지칠순연겸어머니회갑,이때막내동생만총각이고모두결혼을했다)

…………………………….

민주화바람을탄노동계가1987~8년대우조선과,대우자동차이어금속노련에가입된대우중공업도인근의

흐름을타고엄청난노사분규를시작했다.

노사갈등이극심해지자필자를경쟁상대로생각한주변동료들이음해공작을하며유급조치까지취해지고

이정보를사전에알게된필자는당시본부장에게고충을호소하고타부서로이동을요청하기도했었다.

이때나를스카웃하고자했던소재사업본부,엔진사업본부,구매본부등이었고나는구매본부를택하였다.

1989년3월구매본부로발령받은한달후1989년4월15일인천용현동의대지38평건평18평의2,500만원짜리

단독주택을구입다시이사를했다.

애써모은돈은1,400만원밖에없었다하지만방하나를600만원에전세놓고500만원정도가부족했다,

이때500만원을선듯빌려준고마운친구가있었는데얼마나고마웠는지…

이잣돈도안받으며

"힘피면갚아라,못갚아도괜찮다,좋은친구끼리는친구가어려울때도와주어야하고

또한친구가주는도움을부담없이받아주는것이친구다,알간?ㅎㅎㅎ^^"

이렇게말하며거금을내놓으며조금의부담도안주려고노력했던친구.

빛지고못사는필자는년말에500만원을만들어모아갚았고,그친구오히려무리해서갚는것

아니냐며걱정을해주던신현철군,

그이름을오늘공개한다.

"현철아~저세상에서편히잘있지?"

언제나고개를삐딱히하고웃으면서좋은말만하며가끔바른소리도잘하던그의얼굴이떠오른다….

그래서가끔아산삽교의이친구의산소에도찾아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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