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잊지못할 6.25피난길(1)

1950년6월25일

나는1947년

인천시전동,송학동,송월동,북성동등4개동에둘러싸인아담한동산(지금의자유공원)의

뒤편기상대가보이는동네에서두부공장을하고있는집의방하나에세들어살고계셨던

先親朴炳綠의7남매의장남으로태어났다.

(당시의인천기상대전경)

先親께서는新羅始祖朴赫居世王의9世이며婆娑王의5世이신始祖忠烈公朴堤上

(寧海牧使公派)의59세孫이시고내가60대孫이다.

선친께서는충청북도보은군회인면이고향이시고,모친김정순여사는보은군회남면이

고향이시며두분은중매로결혼하셨다.

조부께서는14대째文案家로서오로지學文에만전념하시었고가사에는털끝만큼도

신경을쓰지않으시어생활은찢어지게궁핍하였다.

가사를돕기위하여할머니와선친의형제6남매가모진고생을하며할아버지한분을보필하는

것이지상최대의목표였고그렇게하는것이당연하다고모두들알고계셨던것이다.

왜놈치하(일본놈)에서고향에텃밭한조각도없었던선친은상경하여왜놈들이운영하던

나마까시(양과자)공장(제과점)에취업을하시어제과제빵기술을익히시고돈을벌어고향의

가사에도움을주셨고,년에두세번고향을찾아가는효성이지극한둘째아들이셨었다.

또한그성실함과부지런하심이마을에알려저어머니와중매가들어왔다.

할머니와삼촌그리고동네어른들말씀을빌리면우리어머니는아랫마을인회남면만마루의

가난한농가출신이었으나그러나꽤나고우셨다고했다.

18살의아리따운어머니와팅(맛선)을보시고상경하신아버지는간조(월급)만타면

귀향하여남의집,또는외가의부엌일과허드렛일등쉴틈없이맡아하며고생하는어머니를

멀리서보며안타까워하셨다.

그렇게멀리서바라보는눈길을느끼신어머니는부끄럽고창피하다고부억으로들어가

빈지문을닫아걸거나뒷뜰로나가숨어서나오지안았다고하셨다.

어느날인가다헤어져질질끌리는짚신을신고계신어머니의발을보신후바로상경하여

검정고무신한켤래와양과자를한자루사들고휴가를내어내려오셔서

어머니에게선물하고자찾아갔는데

마침부엌에서일을하시다가아버지를보고는화들짝놀라뒷뜰로도망가시자

아버지가거기까지따라가서고개돌리고외면하고있는어머니옆에앉아

양회봉지를풀어반짝반짝빛나는검정고무신을꺼내어어머니발밑에놓고신으라고하고

자루속에든양과자를꺼내서먹어보라고하며주셨다.

부잣집아씨들이나신을수있었던고무신,그고무신을갖어보는어머니,

그검정고무신을가슴에품고앉아고맙다는말도할줄을몰랐단다.

난생처음왜놈들이만든빵,나마까시를드는순간그달콤하고고소한향기에

초코파이만한과자속에든단팥앙꼬의맛을보며한잎에먹지않고야금야금

조금씩아껴먹던모습을아버지께서는두고두고말씀하셨다.

또한머리를며칠이나못감으셨는지머리에선퀘퀘한냄새도났으며지푸라기와

말라버린탑시기들이붙어있었다고하셨다.

일찍외조부를여의시고외삼촌과함께10여년을모진고생하며견뎌오신어머니….

그렇게고달프셨던어머니는시집을가면고생도덜하고굶주림도없을것이라는

꿈같이행복한상상을하시며아버지를만나셨다.

또한아버지는회인면을통털어보기드물게건장하고준수하신미남으로서

어느여자던지한눈에반하지않을수없던용모이셨다.

1945년해방이되었고아버지께선인천북성동에있는大韓製粉이라는

거대국영제분회사에취직을하시었다.

부지런하게일하시어마침내어머니와결혼을하셨고

1946년어머니도인천으로올라오셔서행복한신혼을보내면서나를낳게된것이다.

그때가1947년음력3월배꽃과매실꽃이만발할때였다.

그래서,지금도내나이는47세이다,47년생이기때문이다,

죽을때까지마흔일곱살로생각하고살아가려고한다.

인생47세,인생에있어서얼마나적당한황금같은나이인가?

대한제분은미국에서들어오는豪麥(호밀)을제분하는인천굴지의공장이었다

미국의식량원조물자인옥수수,계란파우더,설탕등도취급했었고이런물자들을

대한제분에근무하는직원들에게는가끔배급으로간조(월급)로주기도하여

해방후궁핍했던우리의가족들은대한제분에취직하여근무하는아버지때문에

잘살지는않았지만배고프게살지도않았었다.

아버지가이회사에서열심히일했기때문에우리집의웃목에는회사에서배급받은

보조식량들이여러가지가쌓였으며그것은자주는아니었지만가끔시골의계신

할아버지할머니와삼촌과고모님들에게도나눠줄수가있었고,

해방후전국민이어려운속에서도아끼고절약하고살았고우리집도보리밥이라도

거르지않고먹었던비교적안정된생활을하였다.

그렇게단란하게살던1949년가을나에게남동생(필규)이하나생겼다,

아기를유심히내려보며신기해하던나에게"너무예쁜아기라다리밑에서주어왔다"

하는데나는어머니의그말을믿을수가없었다.^^*

언젠가나도다리밑에서주어왔다고하신것을들었기때문이다.

그렇게잠시짧은몇해를단란하고행복하게살던우리집에도천지가뒤바뀌는

운명의시간이왔다.동생의돐을3개월앞둔어느화창한일요일정오전쯤이었다.

쾅쾅쾅~~

누군가대문을심하게두드리는소리에동리친구분과장기를두시던아버지가

대문을열고그사람과몇마디나누고다급하게들어오셨다.

"공산군이38선넘어처들어온데큰일났어~~.."

대문을두두린사람은국방색군복을입은순경으로보이는사람들이었다.

온동네를돌며전쟁이났으니알아서피난하라고알려주러다니는것으로

아마도상부의지시에따라움직이는것같았다.

청천하늘아래날벼락도유분수지해방되고서이제는자유세상이라고

열심히일하며재미있게살아가고있었는데….

호사다마라고했던가?몇년간의행복이순식간에일장춘몽이되어버리는순간이다.

38선이북의빨갱이공산당이처들어오고있다는것이다.

아버지의목소리가다급함에떨고있었다.

장기를두시던자전거포아저씨도놀라고두부공장사장님도놀라고어머니도놀랐다.

그러면서도행여나여기는괜찮겠지하는요행을바라는기대감도있었으나

혹시나하고어느새동산꼭대기높은곳엘다녀오신김씨와아버지가소리치신다.

"월미도쪽에연기가나는것이이상해"

하며한참을고민을하며망설이시던아버지,

화창하고편안해야할일요일,

난데없이빨갱이가처들어온다는소문이믿겨지지않았다.

해방후상경하여얼마나힘들게취직한회사인가?

그런소중한직장을놔두고우리만살겠다고피난을가야하는가?

직장이월미도쪽에있는데그정든직장을뒤로하고나혼자달아나야하는가?

아무튼아버지마음은회사로달려가서확인도하고수위에게인사라도하고떠나야할것

같은데월미도쪽은이미길이막히고있을것같아회사쪽으로갈수도없었다.

거기에갔다가정말길이라도막히면식구들의안위도문제지만잘못하면헤어져평생을

만나지못할수도있을지모른다는마음에

아버지는대한제분쪽으로가는것을포기하고그냥피난을가기로했다.

(아래섬이월미도다)

"월미도에불이났어그쪽으로갈수도없어~"

"문규엄마먹을것하고이불하고?하고"…

하는등말을끝내지도않고얼버무리며정신없이마음만다급해했다.

"김씨리어카하나팔아요.계란가루하고밀가루를줄테니,

"아~그리고김씨는피난안가요?"

"나야고향이여긴데여기서어델가?그냥있을거여"

평소에우리집에있는배급물자를가끔사다쓰던자전거집아저씨가오늘도밀가루와설탕을

구하려고찾아와서아버지와장기를두고있다가난데없이난리소식을듣게된것이다.

이미월미도하늘에선검은연기가하늘로오르기시작했고멀리서는포성도들리는것같았다.

"박씨따라와봐괜찮한것하나있어"

그리고뒤돌아

"밀가루1포설탕한관그리고계란깡통3개만줘요리어카값이에요"

먹을것이귀했던시기,

그렇지만구르마를안판다고하면그나마도못구하기때문에…

리어카값이턱도없이비싸지만우리가다급하니따질수가없었다.

속으로불만이가득했지만아버지와어머니는내색하지않고요구한데로물건들을내주고

자전거바퀴로만든리어카를끌고오셨다.

양은솟과곤로,쌀,이불먹거리등을리어카에가득히바리바리싣고

내가태어난송월동에서어머니가급히만든마지막점심을

末粉가루(제분시상품으로못파는밀가루지금은닭사료로쓰임)로빚은

수제비로대충점심을먹고

두부공장사장과도인사를끝낸우리가족도피난행렬에끼게되었다.

그시간이6월25일일요일오후2시경이었다.

아버지는구르마를끌고동생을업은어머니는뒤에서밀고나는구르마뒤에매달려미는둥

뒤로끄는둥그렇게남으로남으로충청북도보은아버지의고향으로길을따라갔다.

전동변전소길을지나고홍예문을넘어신포동시장거리를헤집고나와답동사거리로방향을

돌려그렇게쉬지않고언제까지가야할지예측도못하는먼길을한발한발나아갔다.

신작로에는여기저기서모여든피난행렬이늘어났다.

우마차로짐을산더미처럼싣고가는일가들도보이고,

자전거에집채만한보따리를싣고가는아저씨도보이고,

그냥식구마다등보따리를메고가기도하고머리에힘겹게

이고가는할머니와아주머니들도많았다,

또한우리처럼구르마로살림살이를싣고가는사람들도보였다.

피난민의행렬이시간이갈수록자꾸늘어만갔다.

그런데언제부터인지국방색군복을입은어설픈동작의군인들이하나둘보이고

그중에몇명은자기들키와비슷한총을멘사람들도있었다.

아마도피난민속에숨어같이남으로내려가는공산괴뢰군을찾는것같았다.

북쪽하늘및멀리개건너와박촌쪽에서는가끔쿵,쿵,하는포성도들려오기도했다.

(지금의홍예문)

답동성당앞을지나신흥소(초등)학교앞으로올라가도원고개를향하여한시간정도걸어갔다.

아버지가잠시멈추고

힘들어하면서도살겠다고말없이따라가는나를번쩍들어구르마

꼭대기에태우고다시길을재촉하여나갔다.

내생전태어나서이렇게먼거리를쉬지않고걸어본적이없었다.

물론첯돌때조금씩걸었고워낙나약하게태어났지만가벼운만치빠르게걸었다고한다.

동생은엄마등에서덥다고칭얼대면서도나와가꿍을하며심심치않게헤죽거리기도하고

세상모르고파닥거렸다.

얼마를갔을까?

언덕마루에올라서서아버지의땀을닦아주며어머니가물을한바가지를건네주고

숭의동고개라고한다.

왼쪽옆에는기찻길이있고오른쪽에는초가집몇채만이길옆에있었다.

한숨을쉬고초여름했살이뜨거운오후3시나4시쯤되었을까?

피난민들사이를헤집고한무리의군인들이오더니피난민대열중에젊은남자들을

가려내며뭐라고몇마디주고받고하더니남자를끌고가려고한다.

순간주변이술렁거린다.

몇몇행렬은못본척도망가듯앞만보고재빠르게이동하고있고

젊은남자에게군인들이가자고하고젊은이는안간다,못간다하며큰소리가오고가고

아무래도사태가심상치않았다.

그광경을말없이바라보던아버지도잡힐것같아불안하신지다급히어서가자고재촉하며

구르마를끌고가기시작했다.

고개를푹숙이고그들을못본체하며얼마를갔을까?

뒤에서세명의군인이아버지를부른다.

"어이구르마양반할말있으니잠깐거기서~"

설수밖에없었다,그들의외침이너무공포스럽고서릿발같았다

또한식구와구르마를끌고도망도갈수가없었다.

군인들중책임자인듯한사람이아버지의나이와이름을묻고가족관계를확인하고는

"피난을어데로가십니까?"

"충청도요거기가고향입니다"

"그래요?그럼잠시식구들여기서기다리게하고박씨는저희와잠시같이갑시다"

하며한명이아버지의팔짱을끼고다른두명은어머니와구르마를초가집그늘로옴겨놓는다.

이에당황한어머니와아버지가울며군인들에게매달리며애원했다제발보내달라고….

"나는나이도많고처자식이있어서같이남을수가없어요한번만보내주세요"

그러나애원한다고무슨소용이있으랴,

그들에게선택된이상그들이하자는대로따를수밖에없는실정이었다.

한참을큰소리로왈가왈부생과사를넘나드는실강이와밀고밀치는몸동작을벌이다가

결국은무지막지하게다그치는군인들에게끌려가며하신말씀,

"문규엄마아무데도가지말고여기서기다려~알았지?꼭이야울지말고~"

그렇게소리치고땅에주저앉아통곡하는엄마와우리형제를뒤에두고끌려가시면서

뒤돌아보고또뒤돌아보고큰소리로외쳐다짐하셨다.

"꼭올께꼼짝말고기다려~"

큰소리로억울하다고다투고호소하며소리쳐반항하셨기에탁하고칼칼한쉰소리로

보내달라고울부짓던아버지의처절한목소리가아직도내귀에여운으로남아있다.

얼굴엔뜨거운피눈물을계속흘리시며순식간에우리와생이별을하며아버지는

군인들과함께그렇게어데인가로사라지셨다.

엄마와우리는낯선그곳에서아버지가사라저간방향을처다보며길고지루한시간을

하염없이울면서아버지를기다려야했었다.

1950,6,25,새벽에공산당괴수김일성이쏘련의지원을받아선전포고없이

38선전전선을소련제탱크를앞세워불법남침하여벌린동족상잔의비극적인

침략전쟁을자행하였고.

우리민족의참극은이제시작되었던것이다.

평화로운초여름의일요일우리남한당국은아무준비도못하고그렇게속절없이

김일성의마수에당하고말았다.

아~어찌잊으랴1950년6월25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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