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해질녘, 대만 고궁박물관을 찾았다. 1965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다.(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그리고 대만 고궁박물관)
유물 숫자로만 본다면 북경 박물관의 규모에 못 미치나 이곳 소장품의 가치가 더욱 크기에 4대 박물관에 이름을 올렸다. 이곳 소장품은 69만여 점에 이른다. 전시실은 1, 2, 3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번에 전시할 수 있는 유물의 양은 약 18만여 점에 이른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 중에서 ‘관보’라는 게 있다. 관보란, 박물관 안에서도 중요한 보물, 즉 역사적 값어치가 더욱 큰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영구 전시하고 그 나머지 서화라든지 도자기 등은 약 4개월 내지 5개월 주기로 교체, 전시하고 있다. 69만여 점을 한번씩 돌려가며 다 전시하려면 약 15년이 걸린다. 그만큼 전시실도 크고 유물도 방대하다는 뜻이다.
이어폰을 받아 들고 관람 모드로 전환했다. 이어폰은 가이드의 설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전시실 안으로 셀카봉도 백팩도 못갖고 들어간다. 생수도 안된다. 다른 박물관과 달리 이곳엔 경보장치가 없다. 경보장치를 설치하려면 유리 케이스 안에 선을 깔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자파가 방출되어 유물 보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만 고궁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유일하게 모조품이 없는 박물관으로도 유명하다.
배추 조각품 앞에 관람객들이 운집해 있다. 바로 이 고궁박물관 소장품 중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취옥백채(翠玉白菜)’다. 경옥을 이용해 여치와 메뚜기가 숨겨진 배추를 정교하게 조각한 작품이다. 찬찬히 감상하려면 하루 왼종일도 모자란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동선에 따라 얼렁뚱땅 수박 겉핥기식 관람이라 몹시 아쉽다.
그렇다면 이 유물은 어떻게 모아진 걸까? 손문과 장개석이 혁명에 성공하고 청나라를 몰아냈을 때 혁명위원회가 청나라 수도인 북경의 자금성을 접수하러 들어갔다. 중국사람들은 9자를 굉장히 좋아한다. 자금성 안에는 9,999개의 방이 있었다. 혁명위가 9,999개 방을 뒤지다 보니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혁명위는 곧바로 자금성 뒤에다가 지금 이곳 대만 고궁박물관의 전신이랄 수 있는 박물관을 지어 유물들을 보관했다. 이후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했다. 일본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공격을 먼저 막아내는 것이 우선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했다. 뒤늦게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루어 일본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국공 내전이 끝나갈 무렵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된 장개석은 전쟁 중인데도 2개 사단 병력을 빼내 69만여 점의 유물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1948년도에 그간 일본군 공세를 피해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해오던 유물을 모아 배에 바리바리 실어 대만으로 향했다.
그때 유물을 싣고 대만으로 향하는 배를 모택동이 모를 리 없었다. 곧바로 격침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놔뒀다. 왜냐하면 바다에 수장시키기보다 그대로 가져가서 잘 보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작은 섬 하나 접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모택동의 배포가 컸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도 주장한다.
일본과의 전쟁, 군벌을 토벌하는 전쟁, 국공전쟁(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싸움)이 끝나고 1949년 장개석은 결국 3만 6천 평방키로미터 크기의 대만으로 쫓겨왔다. 중국은 대만의 250배다. 대만으로 쫓겨온 장개석의 속은 죽는 그날까지 숯덩이처럼 까맣게 탔을 것이다. 그 큰 땅덩어리를 내어주고 코딱지만한 곳에 박혀 있으려니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을까? 그래서일까, 장개석의 유일한 취미는 지구본을 돌리며 대륙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장개석은 대만에 쫓겨 오고서도 대만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돈만 있으면 무기를 사 날랐다. 지금도 대만의 무기체계를 보면 우리는 잽도 안된다. F-16기가 160대나 있다. 아파치 헬기대대도 3개 대대가 있다. 20년 전부터 갖추기 시작한 이지스함도 24척이나 된다.
중국이 대만을 얼마든지 침공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중국이 대만을 접수하려면 중국 군사력의 약 60%의 손실을 봐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그 정도로 대만이 호락호락 당할 나라가 아니란 것이다. 한국보다 군사력이 월등히 앞서 있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6.25를 겪을 때 장개석이 한국에 군사원조계획을 마련했었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에서 말렸다. “현 전쟁판에 너네까지 들어오게 되면 판이 더 커진다” 하여 군대 파견을 않기로 하고 대신 군사물자만 지원했던 그런 나라다.
유물 얘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다. 각설하고, 대만은 우리나라에 그만큼 의리를 지킨 나라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