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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저널리즘의 현실과 방향에 대한 궁리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인터넷서 잊힐 권리? 구글이 부여한다

앞으로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이 잊힐[지워질] 권리의 행사 여부는 구글이 결정한다?

지난주 구글은 가디언과 BBC 방송, 데일리 메일 등 영국 매체들에게 특정 기사들은 영국 네티즌들이 구글 검색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유럽연합(EU)내 최고재판소 격인 유럽사법재판소(European Court of Justice)가 5월 13일 한 스페인 남자가 제기한,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정보가 구글 검색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에 대해 이들의 잊힐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연합에선 ‘정보 콘트롤 기관(data controller)’이 보관 중인 데이터가 ‘정보 보호법’을 준수하며, 관련이 없거나(irrelevant) 너무 낡은 정보이거나(out of date) 부정확하거나(inaccurate), 사적 영역을 침범(invasion of privacy)해선 안 된다는 정보 보호 지침이 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이 바로 이 지침의 적용을 받는 ‘정보 콘트롤 기관’이라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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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에 위치한 ECJ에 청원을 한 사람은 스페인의 변호사인 마리오 코스테야 곤잘레스. 16년전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고 그래서 자신의 소유물들을 경매에 붙였다. 이 뉴스는 한 신문에서 뉴스로 다뤘고, 온라인에도 게재됐다. 하지만 이는 1998년의 일이고 곤잘레스는 이제 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16년 전의 일이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재정난이 드러났고 이는 그의 비즈니스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애초 유럽연합이 이 사건을 심리했을 때에, 구글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적극적으로 이 잊힐 권리를 옹호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사 콘텐츠가 구글 검색에서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은 언론사와 칼럼니스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구글에서 검색만 안 될뿐이지, 그 해당 기사가 언론사의 디지털 아카이브나 언론사 웹사이트의 검색창에서조차 삭제되거나 검색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온라인 검색의 90% 이상이 구글 검색을 통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구글 검색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과 관련된 안 좋은 기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글은 왜 그랬을까. 미 언론비평가 매튜 잉그럼(Mathew Ingram)이 판결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 관련해 실수라는 점을 분명히 부각시키려고 비록 서툰 방식이긴 했지만, 일부러 언론사의 반발 등 공론화를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장 지난 3일 구글은 영국 축구 심판이 과거에 페널티킥 선언을 번복한 것을 놓고 거짓말한 것에 대한 기사를 애초 검색에서 나오지 않게 했다가, 이 기사를 쓴 일간지 가디언의 반발에 다시 검색 링크를 허용했다. 하지만 미 금융위기때 미 거대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CEO E. 스탠리 오닐이 막대한 경영 손실을 겪고 축출된 과정을 취재한 BBC의 기사에 대해선 검색 제외 결정을 유지했다. BBC 기자는 왜 내 글을 망각으로 처넣느냐고 반발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구글의 이러한 ‘검색 제외’ 결정 통보를 받은 영국 언론사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공표하며 문제를 제기해, 인터넷에서 조용히 ‘잊히기를’ 원했던 사람들로선 오히려 더 유명세를 타는 반작용도 일었다. 메일 온라인의 발행인 마틴 클라크는 AP 통신에 “검색 링크 제외 조치는 도서관에 가서 좋아하지 않는 책을 불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구글의 이번 조치로, 유럽에선 사람 이름으로 구글 검색을 하면, 검색 결과 밑에 “유럽의 정보보호법에 따라 몇몇 검색 결과는 제거됐다”는 안내 문구가 뜬다. 물론 ECJ의 결정은 유럽에서만 적용된다.

지난주말까지 구글에게 접수된 ‘검색 제외’ 요청 건수는 모두 7만건. 이와 관련된 웹페이지만도 27만6000 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누가 ‘검색 제외’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느냐는 것이다. 법원이나 언론사가 아니다.

바로 구글이 자사 돈으로 채용한 법무사들(정식 변호사도 아니다!)이 결정한다. 즉 7만 건에 달하는 ‘구글 검색 링크에서 지워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구글이 고용한 이 법무사들(paralegals)이 최종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ECJ의 결정이 있고 나서 처음 며칠은 하루 1만여건의 ‘검색 제외’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하루 1000건 정도 달한다. 그러나 과연 이들 법무사들이 이 모든 신청인이 첨부한 웹페이지를 일일이 따져서 사실 여부, 맞지 않는 낡은 자료, 무관한 데이터, 사생활 침해 여부를 판별해 검색 제외를 결정할 수 있을까.

결국 구글은 외견상 언론사에 ‘고압적’이고 법원 결정에 대해 매우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해, 이 문제의 재공론화를 꾀했다는 것이다.  

 

로봇 저널리스트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난 3월17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LA와 베빌리 힐즈 인근에서 가벼운 지진이 발생했다. 오전 6시25분부터 수차례 7시23분까지 발생한 이 지진은 미 지질조사국(US Geological Survey)의 분석이 나오자마자 이 지역 언론인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웹사이트에 30분 뒤인 7시53분에 게재됐다.

이른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즉각 대응한 사람은 기자가 아니라 컴퓨터였다. 웹사이트의 발빠른 보도는 이 신문사의 기자이자 프로그래머가 만들어놓은 알고리즘에 따른 로봇 저널리스트의 작품인 것이다.
로봇 저널리스트?
로봇 저널리스트?
6월30일 AP 통신은 앞으로 분기마다 쏟아지는 기업들의 경영 실적 보고서에 대한 기사들은 ‘오토메이티드 인사이츠(Automated Insights)’라는 회사의 알고리즘에 의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술을 이용해서 로봇 보도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분기마다 기자들이 300건의 미 기업 실적 보도를 했던 것을 4400건까지 보도 건수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AP 통신은 사실 이미 5월부터 스포츠 경기 스코어 등에 대해선 많은 경우 로봇 보도를 해왔다.
미국 포인터 인스티튜트에 Automated Insights CEO가 한 얘기는 이렇다. “기존의 콘텐츠 제작 방식이 기사 한 건을 100만명이 읽기를 원하는 방식이라면, 이젠 100만건을 만들어서 각자 원하는 것 1건씩만 읽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로봇 저널리즘은 물론 아직까지는 수치에 기초한 객관적인 사실 보도에 국한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로봇 저널리즘이 여태껏 언론사마다 확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신기하지 않나.
‘수치’ 위주의 기초적인 정보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사람들은 경기의 내용에 대한 심층 분석이나 기업의 경영실적 수치 뒷면에 가려진 해설에 관심을 갖게 되며 이게 바로 전통적인 언론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로봇저널리즘은 이미 영국의 가디언이나 미국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 등에서도 일부 사용하고 있다. 포브스의 경우 내러티브 사이언스라는 테크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경제-기업 실적 보도에 인공지능형 플랫폼을 쓴다. 비즈니스 뉴스에서 이런 로봇 저널리스트의 ‘활약’이 가능한 까닭은, 이들 뉴스는 보도 포맷이 상당히 정형화돼있고 데이터 위주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런 1차원적인 팩트는 이미 인터넷에 많을 뿐 아니라, 절대로 ‘특종’도 불가능하다. 기자들이여, 수치 보도는 잊어라. 그런 대량생산 잔일은 로봇이 한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로봇이 ‘독자적인’ 시각을 갖춘 기사나 해설성 기사를 생산할 수 있을까.
스웨덴의 한 학자가 초보적인 실험 해 보았다. 미국 NFL 경기 내용을 요약한 기사를 컴퓨터가 쓴 것과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기자가 쓴 것 2개를 나란히 놓고 학생들에게 평가하게 한 것이다. 물론 사람이 쓴 기사의 양이 더 길었기에, 여러 형태로 ‘말이 되게’ 줄여서 이를 컴퓨터 기사와 비교했다.
그 결과는? 학생들은 기자가 쓴 기사에 대해선 “잘 쓰여졌다” “명료하다” “읽기 쉽다”는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반면에 소프트웨어가 생산해낸 기사는 “묘사적” “정보가 많다” “더 정확하다” “신뢰성이 높다” “객관적”이란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이 직접 쓴 기사가 더 읽기는 쉽게 잘 쓰여졌지만, 컴퓨터가 생산한 기사도 “충분히 괜찮다(good enough)”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다”는 평가는 어느 산업에서는 특정 기술이 기존 시장 질서를 깨뜨리는 ‘교란적(disruptive)’ 지위를 갖게 되는 출발점이다.현상에 대한 글쓰기를 직업으로 먹고 사는 기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콘텐츠는 ‘최고’인데, 뉴미디어에선 진다는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5월 ‘혁신 보고서(Innovation Report)’를 낸 이래, 미국 언론계에선 이에 대한 온갖 비평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만큼 전 세계 최고의 저널리즘이라는 NYT가 디지털 프런트(front)에서 겪는 고민이 주목을 받는다는 얘기다. 뉴스룸(편집국) 간부와 기자들 사이에 소셜 미디어의 활용을 비롯한 디지털 변화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하고, 전통 미디어의 해묵은 유산을 갖고 있지 않은 인터넷 뉴스매체들의 발 빠른 움직임을 좇아가지 못한다는 자성(自省)이 인쇄매체의 역사를 안은 이른바 legacy media에게도 남의 일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의 표지 사진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의 표지 사진

 

그런데 이후에 덴마크의 미디어 컨설턴트인 토마스 벡달(Thomas Baekdal)은 이 보고서를 읽고선 코웃음을 친다. “우리(NYT)는 여전히 최고의 저널리즘을 생산하고 있고, 다만 뉴미디어에서 인터넷 매체들에게 경쟁에서 지고 있을 뿐이라고? 최고의 상품을 내는데, 어떻게 뉴미디어 시장에서 동시에 질 수 있나?”

다음은 벡달의 글에 주목한 미국 미디어 비평가 매튜 인그럼(Mathew Ingram)의 6월21일 gigaom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

 

NYT의 혁신 보고서는 많은 가치 있는 부분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 신문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비켜 지나갔다. 그것은 NYT의 콘텐츠 자체, NYT가 생산하는 저널리즘 자체가 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벡달은 “NYT 보고서는 NYT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퀄리티 저널리즘 자체에 대해선 전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즉, 보고서는 NYT 저널리즘 자체는 아주 좋고, 바뀌어야 하는 것은 기사 마케팅, 기사 홍보, 독자와의 보다 활발한 교감·상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글쎄, 그럴까? 백달의 주장이다. “사실 내가 얘기해 본 모든 신문사가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자기네 언론 생산물은 최고 수준이고, 문제는 ‘다만’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있다고들 한다. 그리고 이 얘기를 지난 5~10년간 들었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계속 남아 있다.

‘중요한 문제의 한 부분은 바로 저널리즘 그 자체’라는 사실이야말로 신문업계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맹점(blind spot)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NYT가 저질(低質) 또는 나쁜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신문사들은 자신들이 콘텐츠를 어떤 식으로 쓰고 보도하는지, 이게 시장의 수요에 맞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NYT 보고서에서 전혀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1996년에 nytimes.com을 처음 만들었고, 뉴욕타임스에서 디지털 사업 분야를 총괄 지휘했던 마틴 니젠홀츠도 벡달의 주장에 동조한다. 니젠홀츠는 미국 저널리즘의 미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디지털 시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꽤 높은 퀄리티의 저널리즘 생산품이 넘치기 때문이다(‘불행히도’ 이는 미국 미디어업계 얘기다!) 다양한 방면에서 고(高)퀄리티의 콘텐츠가 쏟아지다 보니까, 더 이상 기존 전통 언론 매체들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몸에 좋으니까 이 시금치(같은 콘텐츠)는 먹어야 한다”고 독자에게 강요할 수가 없다.

미 언론사들은 적절하고도 흥미로운 콘텐츠로 독자들을 유인해야 하고, 또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독자가 즐겨 찾는 인터넷 웹사이트로 해당 콘텐츠가 제공돼야 한다). 무한한 선택의 시대에, 독자가 왕인 것이다.

이런 현실은 NYT에게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단순히 프린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고 독자와 더 접촉해야 하는 차원을 넘어서, NYT는 이제 특권을 누려왔던 소수의 정보 가공 업체, 일방적으로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던 독과점 업체가 아니라는 현실을 마주쳐야 한다. 이제 NYT는 매우 광대하고 차별적인 미디어 지평선에서 그저 한 명의 플레이어일 뿐이다.

다른 인쇄 매체들은 물론, 써카(Circa)나 야후의 뉴스 다이제스트 앱, 플립보드, 자이트, 버즈피드, 복스 등 온갖 앱과 매체들이 더 민첩하게 이전에 NYT가 누렸던 독자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NYT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저널리즘을 한다. NYT나 기존의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인쇄 매체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생각한다. 디지털 매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뭐 테크놀로지 면에서 근사한 지식과 능력을 갖췄을지 몰라도, 그들이 하는 저널리즘은 아무래도 자신들보다 떨어진다고.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다.

그런데, 시장 교란적 기업에 대한 이론(disruption theory)을 조금이라도 안다면,가장 두려운 경쟁자는 더 나은 상품을 만드는 경쟁자가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좋은(good enough) 상품’을 더 싸게 제공하는 업체다. 그저 간단한 뉴스 요약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 굳이 훨씬 퀄리티가 높다는 NYT의 저널리즘이 큰 가치가 있을까. 벡달은 소비자의 시장 수요는 변했는데도, NYT는 여전히 ‘정보의 수퍼마켓’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고,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고 말한다.(NYT가 올해 내놓은 앱들, 그날의 뉴스 요약 앱인 NYT Now나 데이터 저널리즘을 근간으로 한 Upshot 같은 섹션은 NYT가 최소한 변하려고 애쓴다는 느낌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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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NYT 내부에선 차라리 당시 잘나가던 야후!를 사들이는 제안도 나왔다고 한다. 니젠홀츠의 농담 섞인 회고담은 이렇다. “아마 (우리의 신문사 마인드로는) 야후를 망가뜨려놨을 것이다.” (지금 야후는 ‘삽질’하고 있다) 당시 NYT가 인터넷 초창기에 미디어 랩을 시작했었더라면 지금 NYT이 주장하는 고(高)퀄리티 저널리즘의 뉴미디어 혁신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지금 NYT는 어쩌면 이제 완전히 자신들의 손을 벗어났을지도 모르는 디지털 뉴스 시장을 따라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 고민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