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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 결핍

결코 젊지도 아니면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스마트폰부터 켜는 것이 습관이 됐다. 촌음을 아껴서 매순간 ‘생산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면서, 구내 식당에 선 줄이 조금이라도 길다 싶으면, 광화문역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면, 심지어 종로 3가역에서 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릴 때면 눈동자는 5인치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다. 물론 내 주위의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걸으면서도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스마트폰 속 동영상에 빠져 있는 젊은 영혼들을 보면 아직은 딱한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지루함’이라는 것이 생활에서 사라진 지도 꽤 됐다. 밤늦게 TV를 켜면 심지어 홈쇼핑 채널, IPTV 채널을 뒤져서라도 지루함을 넉넉하게 쫓아낼 수 있다. 그리고도 그 TV 동영상이 약간이라도 재미없어질 것 같으면,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내 이것저것을 훑어보면서 흥미를 북돋을 수도 있다. 동시에 ‘아스팔트 8’ 자동차 레이스를 할 수도 있다. 모바일이 가져다 준 ‘혁명’이다. 자면서도 누군가의 강의든 설교를 유튜브에서 듣다가 어느새 ‘지루하지 않게’ 잠에 빠질 수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생각에 잠겨 한 동안을 보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지루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인 면만 있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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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사회의 새로운 증후군, 지루함 결핍증?

BBC의 한 기사를 보자.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극작가-가수-배우인 미라 사이얼(Syal)은 주변이 조용했던 한 광산 마을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별로 할 일이 없었던 탓에, 마을의 할머니들과도 애기했고 빵 굽는 것을 배웠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날씨와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곤 했다. 그리곤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지루함’이란 외로움이자 고독함이었지만,  그 탓에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한 것, 시, 단편소설들로 일기장을 채웠고, 작가가 될 수 있는 소양을 이 어린 시절에 쌓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강요된 외로움은 인생의 ‘빈 페이지’와 함께 멋진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도예작가이자 여성 의상을 입는 예술가로도 유명한 그레이슨 퍼리
도예작가이자 여성 의상을 입는 예술가로도 유명한 그레이슨 퍼리

같이 출연한 도자기 예술가 그레이슨 퍼리(Perry)에게도 지루함이란 “창조적인 상태”였다. “나이가 들면서,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과 할 일이 없는 상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옥스퍼드대 링컨칼리지의 연구원이자 방송인인 신경과학자 수전 그린필드가 소개한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도 마찬가지다.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13세까지 형제 자매 없이 자라다보니까, 혼자 얘기를 꾸며서 쓰고 그걸 그림을 그리고 또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얘기는 이렇다. ‘지루함’이란 것은 “불편한 감정’이며 그래서 사회는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고 뭔가에 자극받는 상태를 갖도록 부추겨 왔지만, 사실 창조적이 되려면 “내적 자극을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공이니 공백 상태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 공백을 스마트폰이나 TV와 같은 외적 자극으로 충족할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같은 자신의 내적 자원으로 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더더욱 어려서부터 조금만 지루해지면 tV를 켜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지만, 결국 이런 아이들은 글 쓰기 능력에서 매우 제한적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아이들은 종종 시간을 그냥 보내면서, 생각의 나래를 펴고 그 상상력 속에서 살면서 주변을 관찰하고 연극을 보면서 배우들의 경험을 모방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BBC의 이 프로그램은 이런 과정들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크린은 이런 ‘지루한’ 시간과 창조적 능력의 발전 사이의 경로를 바로 연결(short circuit) 해 결과적으로 내적 자극 발달 능력을 배제한다고 말한다.

창조적 마인드를 위해서라도, 종종 오프라인 상태에서 지루함을 즐겨보는 방법을 이제부터라도 익혀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