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여행하면 양극을 치닫는 인도의 두 얼굴에 혼동이 가기도한다. 뒤떨어진 사회인프라 때문에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이러한 물질세계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풍족한 영적인 세계는 그 또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聖스러운 인도 . . . 바라나시 Varanasi
갠지스 강가의 도시 바라나시는 일년 열 두달 순례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 이다. 갠지스강으로 가는 길거리에서 손 벌리는 벌거 벗은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강가에서 백시시(동냥)를 구하는 걸인들의 모습도 비굴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곡식자루를 들고 거리에 늘어선 걸인들한테 양식을 나눠주는 가진 자의 모습도 거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백시시 받는 자는 도움을 받을 권리를 찾는 것 일 뿐이고, 가진자는 의무를 하는것 뿐 인듯 하였다.
강변에 가트 Ghat 라고 불리는 계단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다. 상류에서 부터 시신을 화장하는 화장터 Burning Ghat, 새하얀 옷을 입고 멀리서 성스러운 순례 목적으로 온 사람들과 그 틈에서 목욕하러 나온 시민들, 그리고 빨래하러 나온 일꾼들과 인도의 다양한 모습을 보려 찾아 온 여행객들의 수도 무시 못한다. 기도하는 순례객 옆에서 비누칠을 하며 목욕하는 사람이 있어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정화되지 않은 하수도의 오물도 들어 오는 갠지스강은 탁하기 그지 없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 성수(聖水)로 여기면 성수일 뿐, 그들한테 갠지스강물이 생물학적인 성수가 될 필요는 없다.
화장터에 모인 유가족들도 직업장례사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들 표정들이 덤덤하다. 흔히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유가족의 오열도 없다. 인생은 돌고 도는것… 전생에서 환생해 내세로가는 길목에 우리들의 현세가 있을 뿐 그들한테는 탄생도 죽음도 주어진 절차의 한 가지일 뿐인가 보다. 이방인이 보는 힌두교는 다신교라는 것을 제외하면 불교와 무척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내세를 기대하기에 현세에서의 슬픔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복잡한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도 사람들이 그 교리를 이해하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삶 자체가 교리를 용해시켜 이끌어 나가고 있으므로 교리공부는 의미가 없는듯 하다.
기도하는 순례객 옆에는 옷을 벗고 목욕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누칠까지 하고 있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결코 몸을 담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강물은 깨끗하지는 않다. 숙련된 솜씨로 옷을 갈아 입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도인들은 자신의 알몸이 노출되는 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순례객을 맞는 성직자 일부 사두들은 거의 알몸 이다.
강가에는 노숙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걸인이 아니라 집이 멀어 이곳에서 하룻 밤, 또는 그 이상 체류하는 사람들 이다. 군데 군데 불을 지피며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 사이로 거리의 이발사, 관광객을 상대로 맛사지를 강요하는 맛사지사, 호객하는 뱃사공 등 분위기는 결코 성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도인의 마음에는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다.
성(性)스러운 인도 . . . 카주라호 Khajuraho
카주라호는 바라나시에서 비행기로 약 40분 걸리는 조그만 마을 이다. 인구도 불과 몇 천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마을에 제트여객기가 매일 운행되는 이유는 카주라호의 독특한 힌두교사원들 때문이다. 10세기 힌두왕국인 찬델라왕국의 도읍지였던 카주라호의 힌두사원은 서쪽군과 동쪽군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성기에는 수 많은 사원이 있었다고하나 그 후 이슬람제국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많이 파괴돼 지금은 22개가 남아 있다.
힌두교는 이미 잘알 려진대로 다신교이다. 대표적인 신 만해도 쉬바, 비쉬누, 브라만 등이 있으며 가네쉬(코끼리), 하누만(원숭이)등의 모습을 한 다양한 신상이 등장한다. 또한 이들 신들은 그들끼리 결혼도 하여 자녀 신을 두고 있으며 화신도 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부처님도 비쉬누신의 아홉 번 째 화신으로 여긴다고 한다.
신들이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신들도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꾸려나갔나보다. 카주라호에 있는 힌두교들은 신들의 성애모습이 아주 리얼하게 조각된 미투나상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조그만 마을에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나 부터가 인도 전지역에 널려진 힌두교사원 자체보다는 이런 별난 조각을 보려고 오는것이다.
숙소문 밖을 나서서부터 따라 온 동네아이는 유창한영어로 Erotic Sculpture를 연발한다. 굳이 누구의 안내를 받지 않아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성애모습을 그린 조각들… oral sex, anal sex, animal sex…지금의 단어로 표현하기조차 민망한조각들을 그 아이들은 조막돌을 던져가리켜준다. Erotic이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나이일 것 같은데도 말이다.
聖스러워야할 종교사원에 性스러운 조각이라니….. 바라나시에서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영국에서 온 단체관광객을 한발짝 물러서서 따라다니며 안내인의 설명을 귀동냥했지만 쉽게 와 닿지를 않는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책을 한 권 구입해 밤새 사전을 찾아가며 책을 뒤져 보았지만 우리말로 된 책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내용일진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 중 쉽게 이해되는 내용으로서는 당시 브라민계급의 소년들한테 일종의 성교육용이라는 얘기와 벼락을 막기 위해 비의 신 인 라를 달래기 위한 조각상이라는 얘기와 함께 당시에는 SEX 자체가 일상생활의 하나였을것 이라는것 정도였다. 아마 카주라호의 미투나상들이 지금의 포르노그라피로 여겨진다면 찬델라왕국의 사람들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한 일인 것 같다. 이미 인도사회에서는 기원 전 6세기 전부터 카마수트라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성생활의 지침서로 등장했는데 어차피 1000년 전 사람들이 살아온 얘기를 지금에 와서 일일이 윤리적인 기준을 따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으며 찬드라왕국 사람들의 SEX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된다.
성聖스러운 사원 같은 왕비의 무덤 . . . 타지마할
카주라호를 떠나 델리로 돌아가는 길에 타지마할을 찾아 아그라에 들렀다. 타지마할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타지마할의 이면에 지니고 있는 애절한 사연을 되새기며 새로 시작한 홈페이지에 사용할 장면을 하나 하나 카메라에 담았다.
인도는 힌두교가 지배하는 나라이지만 처음으로 인도를 찾는사람들은 힌두교에 관련된 것보다는 무굴제국 시절의 찬란한 이슬람문화를 먼저 만나게된다. 힌두교에는 하나의 절대 신이 아닌 무수한 신들이 존재해서인지 다른 종교에 대해 포용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힌두사원에는 이교도들의 출입은 제한되는 반면, 이슬람사원은 그들의 예배시간만 아니면 전면 개방되어 관광객들은 자연히 이슬람사원쪽을 쉽게 찾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타지마할을 건립한 무굴제국시절의 황제 사자한은 유명한 건축광이었다고한다. 델리에 세워진 자마마스지드, 레드포트 등 모두 그의 전성기에 세워진 불멸의 건축물 이다. 타지마할은 웅장하고, 품위 있고, 갖은 찬사를 부쳐도 모자라지만 이 모든 찬사를 합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름다움 이다. 미나렛(첨탑) 위로 떠오른 보름달 빛에 비쳐진 타지마할의 대리석 돔의 모양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하늘에서별을 타고 공주가 나타날 것 만 같은 한편의 동화를 꿈꾸는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타지마할의 뒤에는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사자한은 사랑하는 그의 아내 뭄타즈마할과 17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14번째 아이를 가졌을 정도로 왕비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불행하게도 왕비는 마지막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었다. 왕비를 잃은 사자한은 그녀의 무덤을 아름다운 궁전과 같이 지어 마지막 애정을 표시하려했다. 무려 22년에 걸쳐 대역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왕비의 무덤에 그 많은 국력을 쏟은 탓인지 국력은 기울어져만 가고 결국 사자한은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쫓겨 나서 타지마할이 바라다 보이는 야무나 강 건너편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자한 역시 그의 아버지를 쫓아내고 황제에 올랐다고 하니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자식한테 그대로 물려 받은 셈이다.
타지마할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는 여전히 길가에 노숙하는 사람들과 걸인들이 몰려 드는 모습이 보였지만 오늘 만큼은 인도의 두 얼굴 중에서 한 가지만 간직하고 싶어 릭샤(인력거)를 타고 눈을 감고 돌아왔다.
나마스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