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를 얘기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이다.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한편의 러브스토리로 그려진 영화 ‘클레오파트라’도, 유명한 종교영화인 ‘십계’도 모두 이집트가 배경이다. 인디아나존스 처럼 어떤 탐험심과 신비감을 나타내려는 영화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비밀’ 등의 미스테리소설에서도 이집트가 배경이 되고 있다. 이집트는 반 만년의 역사를 지녀오면서 그만큼 신비로움이나 미스테리가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대이집트문명의 역사유적을 보면 크게 무덤과 신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집트는 예로부터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만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대부분의 서쪽은 죽음과 관련된 무덤이나 장례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제전 등이 세워졌다.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후의 세계도 그렇고 감히 평민들이 가까이 하기도 힘든 파라오들과 사제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신전에서도 이들의 역사는 미스테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셈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사용되었을 때와 4000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상이 너무나 다를진데 4000년전의 기록을 오늘날의 잣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으니 어쩌면 미스테리로 둘러쌓인 역사는 당연하다 하겠다.
그나마 고대이집트문명이 이만큼 밝혀진 것은 1799년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조금 떨어진 라시드에서 발견된 로제타석(Rosetta stone) 덕분이었다. 로제타석판에는 고대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리이스어가 같이 기록되어 있어서 프랑스의 젊은 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1822년 비로소 클레오파트라여왕의 이름을 해독한 것을 계기로 신비에 쌓였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하나하나씩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대이집트문명의 시초는 지금의 카이로시내 외곽에 있는 기자 지구의 파라미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역사는 고왕국시절에 메네스가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이집트를 통일한 약 4500년 전에 시작된다. 피라미드는 근본적으로 당시의 신격화된 권력자 파라오들의 무덤이다.
인류 최초의 석조 건축물 . . . . . . 조세르왕의 스텝 피라미드 Step Pyramid of Zoser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피라미드는 카이로의 기자 바로 아래에 있는 사카라의 조세르왕(Zoser)의 피라미드이다. 조세르왕의 신하 임호텝(Imhotep)에 의해 세워진 5층 계단식 모양의 계단식피라미드(Step Pyramid)는 인류 최초의 석조건축물로 기록된다고 한다. 조세르왕의 무덤의 현실은 지하에 위치하고 그 위로 몇 단계 덮었지만 막대한 부장품을 노린 도굴꾼들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피라미드 3총사 . . . Menkaure (Mykerinos), Khafre (Chephren), Khufu (Cheops)
그 후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좀 더 안정된 구조로 세워진 피라미드가 바로 오늘날 잘 알려진 카이로 근교의 기자(Giza)지구에 있는 쿠프왕 및 카프레왕,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 이다. 이들 피라미드의 중심에는 미이라로 만들어진 파라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며 도굴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부는 미로와 같이 꾸미고 여러 가지 장애물도 설치하였지만 그래도 도굴꾼들의 도전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기자지구에 세워진 피라미드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여러 학자들이 이런 저런 주장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도르레의 이용이나 비탈길을 만들어 굴림돌을 이용하였을 것이라는 정도다. 피라미드건설에 사용된 돌만해도 작게는 2.5톤, 큰 것은 15톤의 돌이 무려 1,300,000개나 된다.
Luxor . . . 신왕국시대(기원전 16C ~ 11C)의 수도
그 후 약 신왕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이집트왕국의 수도는 멤피스에서 테베(지금의 룩소 Luxor)로 옮겨지고 파라오의 무덤은 지상 위의 피라미드 형태에서 지하의 계곡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왕국시절은 이집트역사상 가장 찬란하였던 시기로 기록된다. 나일강변에 위치한 룩소(당시지명 테베)의 나일강 동안에는 있는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 신전은 고대이집트 건축물의 압권이다.
제18왕조의 아메노피스3세에 의해 시작된 신전의 건축은 대를 이어 계속 증측되면서 제19왕조의 람세스2세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나일강을 건너 서쪽의 사막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는 신왕국시절의 역대 파라오들의 무덤이 지하에 숨겨져 있다.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 . . . 비운의 소년 파라오, 후세에 가장 조명 받고 있는 파라오
이집트역사에서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이야기 중 하이라이트는 이 중의 하나인 제18왕조의 비운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en)의 비밀 이다. 투탕카멘이 태어날 때는 아메노피스4세(Amenophis)가 기존의 종교체제를 뒤 흔드는 큰 변혁을 시도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그는 당시까지 섬겨온 여러 이집트의 신들을 다 버리고 오직 태양의 신 아텐(Aten)만 섬기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텐(Akhnaten)으로 바꿨다. 그러나 기존 실력자였던 제사장들과의 대립에서 결국은 아크나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9살의 투탕카멘이 대를 잇게 되었다.
투탕카멘은 그 출생자체도 미스테리 투성이다. 투탕카멘의 선왕인 아크나텐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란 얘기도 있지만 그는 딸만 두었다는 설도 있어 아크나텐의 조카라는 설과 아크나텐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3세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다. 이런 혼란은 당시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결혼이 성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투탕카멘도 오늘날의 족보로 치자면 이복동생뻘 되는 안케세나문(Ankhesenamun)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즉 오늘날의 혈연관계와 당시의 혈연관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일대 일로 대응이 되지 않기에 생긴 혼란이 아닐까 싶다. 하기야 얼마전 한 국회의원의 할아버지뻘 친척의 족보를 가지고 의성김씨냐 안동김씨냐를 따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의 일이 명쾌하게 밝히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투탕카멘도 파라오에 오를 때의 이름은 아텐 신의 이름을 따서 투탕카텐(Tutankhaten)이었다. 나이 어린 투탕카멘은 신과 동등한 막강한 절대 권력자로서의 권력은 노련한 제사장들에 의해 누려보지도 못하고 제사장들의 뜻에 의해 유일신으로 받들던 아텐 신을 포기하고 기존의 모든 신들을 다시 섬기도록 하여 자신의 이름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꿨다. 투탕카멘도 결국은 선왕의 대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한지 9년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투탕카멘이 오늘날 고대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그가 비운의 파라오였기 때문 만은 아니다. 지상의 피라미드에서 지하의 사막의 계곡으로 바뀐 파라오들의 무덤은 여전히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Carter)경에 의해 완벽한 형태로 그의 무덤이 발굴 된 것이다.
권력도 제대로 한 번 누려보지 못한 파라오여서 발굴학자들의 관심도 끌지 못한 투탕카멘의 무덤은 도굴꾼들에 의해서도 그 가치를 낮게 평가를 받아왔는지는 몰라도 3500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중요한 것들은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의 특별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황금으로 된 마스크와 무려 110kg에 달하는 황금관등 250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발굴에 관여한 발굴팀 중에서 카터경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카나몬경이 다음 해에 모기에 물려 죽었다. 뒤이어 그의 동생 허버트 대령도, 카나몬경의 간호를 담당했던 간호원도, 카터의 비서도 연이어 20명이나 원인 모를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