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통역은 사기꾼이었다.

지금은 지속된 출생율 감소로 병력자원이 모자란다고 하지만 1980년 초에는 오히려 병역자원이 남아 돌아 의사와 치과의사들은 군의관 훈련을 마친 후 현역으로 필요한 군의관요원만 남기고는 나머지 인원은 장교로 임관과 동시에 예편시켜 무의촌에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제도가 있었다. 나도 운이 좋았든지 나빴는지는 몰라도 군의학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식 전날 대한민국 장교정복을 지급받지 못하자 공중보건요원으로 차출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근무한 곳은 경기도 양평군보건소였다. 당시에는 양평군에 치과가 하나 뿐이어서 농촌환자들을 위하여 3년간 바쁘게 근무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미국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평화봉사단은 케네디 대통령 때에 시작된 기구로서 미국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그들의 전문지식을 발휘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하게 하는 제도인데 당시만 해도 한국이 미국사람들의 눈에는 그 범주 안에 들었나 보다. 당시 활동하던 미국평화봉사단원은 중학교에서 영어회화교사로활동하거나 보건소에서 결핵관리요원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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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r.Voetsch (한국명 박인식)와 함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1980 >

MrVoetsch 오른쪽이 당시 취재 나온 신경민 MBC기자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양평군보건소에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건소행정계장이 내 방에 찾아 왔다. 양평군보건소에 평화봉사단 한 명이 결핵관리요원으로 배치되는데 이 친구가 한국어에 서툴고 군청 내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의 통역노릇을 해 줘야겠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때 나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학까지 영어를 공부하고 영어로 된 원서로 의학공부를 하였다고 해도 어찌 미국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하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군청내에서 가장 공부 많이 한 사람축에 속하고 진료실 책장에 영문원서가 보란듯이 가득 꽂혀진 마당에 영어를 못하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하여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어쨋든 예정된 날짜에 미국인 평화봉사단 Mr.Voetsch 가 양평군보건소에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군청에 가서 인사를 하여야겠기에 Voetsch와 나는 행정계장의 안내로 군수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첫 날은 인사를 나누는 처지라 어려운 대화는 없어서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야 ! 김 선생… 김 선생이 영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잘 한다며 ?”
“김 선생은 영어를 어디서 그렇게 배웠어 ? 대학 나왔다고 다 영어 하는 것은 아닌데 !”
“김선생 ! 서울에서 출퇴근하기 힘든데 우리집에서 하숙하지 ! (애들 영어공부 좀 봐줘..섭섭치않게 해줄께) ”

다음날 출근길에 만난 군청의 과장들과 계장들의 칭찬성 인삿말이 빗발쳐서 내 스스로가 놀랐다. 아마 다행히도 군수실에 함께 있었던 행정계장이 군수실에서 나오면서 “미국친구의 얘기는 길었는데 왜 김선생님 통역은 짧어요 ?” 라고 한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미국친구 얘기 중에서 내가 못 알아 듣는 것은 빼고서 통역을 하고, 군수님 얘기 중에서도 쉬운 얘기만 통역하고 한 것 뿐 인데요…” 하는 변명은 목구멍까지 나오다가 다시 내 가슴 속으로 미끄러 내려가고 말았지만 그날을 계기로 나는 보건소행정계장과 양평에 근무하는 동안 유난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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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하이퐁시 아동병원의 치과진료지원방안에 대해 회담하는 장면 >

 

이 숫법은 22 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하이퐁시에서 치과의료 봉사단장을 맡아 하이퐁시를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대로 써먹게 되었다. 사전준비를 하러 단신으로 하이퐁시를 방문할 때에는 분명히 봉사단 공동주최자인 인천시청의 국제통상국에서 하이퐁회담에 통역이 참석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통역이 베트남어-한국어 통역이 아닌 베트남어-영어통역이라는 것은 인천시청의 담당공무원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쨋건 그 동안 지구촌 60 여 개국을 배낭여행 하면서 근근히 써왔던 영어실력을 가지고 회담내용이 치과의료봉사에 관한 단순한 내용이였기에 그럭저럭 하이퐁시 외무국장과 영어로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두 달후 무사히 진료단을 이끌고 찜통같은 날씨 속에서 하이퐁에서 펼친 일주일간의 의료봉사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하이퐁시 TV 뉴스에도 방영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인천시청과 인천시치과의사회에서는 나를 영어로 외국인과 회담을 할 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로 아직도 착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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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하이퐁시 아동병원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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