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이집트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이 3300년 동안 지하에서 잠을 자다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온지 84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카터경이 이끄는 발굴팀에 의해 1922년 세상의 빛을 보게 되면서 비록 그의 육신은 미이라의 신분이지만 이름만은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의 화려한 부활 84년을 맞이하여 투탕카멘의 이야기를 지난 해에 소개하였던 글을 바탕으로 다시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집트역사에서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이야기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제18왕조의 비운의 소년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en)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투탕카멘이 태어날 때는 아메노피스4세가 기존의 종교체제를 뒤 흔드는 큰 변혁을 시도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그는 당시까지 섬겨온 여러 이집트의 신들을 다 버리고 오직 태양의 신 아텐(Aten)만 섬기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텐(Akhnaten)으로 바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실력자였던 제사장들과의 대립에서 결국은 아크나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9살의 투탕카멘이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탕카멘은 그 출생 자체도 미스테리 투성입니다. 투탕카멘의 선왕인 아크나텐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란 얘기도 있지만 아크나텐은 딸만 두었다는 설도 있어 아크나텐의 조카라는 설과 아크나텐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 3세의 또 다른 아들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혼란은 당시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결혼이 성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한편 인척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 애매하기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서는 처남, 매부 등으로 칭하는 것이 영어로는 brother-in-law 로 표시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요즘의 혈연관계와 당시의 혈연관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일대 일로 대응이 되지 않기에 생긴 혼란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하기야 얼마 전 한 여성국회의원의 할아버지뻘 친척의 족보를 가지고 의성 김씨냐 안동김씨냐를 따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300 년 전의 일을 명쾌하게 밝히기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투탕카멘은 요즘 족보로 치자면 이복동생뻘 되는 안케세나문(Ankhesenamun)공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투탕카멘의 원래 이름은 선왕인 아크나텐의 영향을 받아 파라오에 오를 때의 이름은 아텐 신의 이름을 따서 투탕카텐(Tutankhaten)이었습니다. 불과 9 세의 어린 나이에 파라오로 즉위한 소년 투탕카멘은 신과 동등한 막강한 절대 권력자로서의 권력은 노련한 제사장들에 의해 누려보지도 못한것 같습니다. 아크나텐이 파라오에 즉위하기 전부터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그동안 섬기던 신들을 부정하고 아텐 만을 섬기던 아크나텐이 죽자 나이 어린 투탕카텐을 파라오에 앉히고 유일신으로 받들던 아텐 신을 포기하고 기존의 모든 신들을 다시 섬기도록 하고 투탕카텐의 이름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들 한테 눌려 살 수 밖에 없었던 소년 파라오는 급기야 즉위한 지 9년 만에 의문을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집트 고고학당국이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첨단과학의 힘을 빌어 재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투탕카멘의 사인은 다친 상처가 감염되어 죽은 것으로 타살은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투탕카멘이 오늘날 고대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그가 비운의 파라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영생을 믿고 死後 세계에 대한 대비를 완벽하게 하여 자신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도록 미이라로 만들고 엄청난 재물을 함께 묻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지만 도굴꾼들에 의한 무덤의 훼손 때문에 파라오들의 무덤은 사막의 계곡 지하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막의 계곡에 위치한 많은 파라오들의 무덤도 도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투탕카멘의 무덤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된 채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투탕카멘이 3300년 동안 잠들었던 룩소의 사막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집트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산 자의 도시, 서쪽은 죽은 자의 도시로 구분 됩니다. 아마 태양이 지는 것을 죽음과 연관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파라오의 신전은 강 동쪽에 있지만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파라오들의 무덤은 모두 나일강 서쪽에 있습니다. 고대이집트의 중심도시였던 룩소도 강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카르나크룩신전, 룩소신전들이 있지만 강 건너 서안에는 죽음과 관련된 장제전들과 사막 계곡의 지하에는 파라오들과 왕, 그리고 귀족들의 무덤이 숨겨져 있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 발견한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경은 처음부터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카터는 어릴때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불우한 소년이었지만 한 귀족을 따라 이집트여행을 하였을 때에 탁본재주가 눈에 띄여 고분발굴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카나몬경의 후원으로 독자적인 발굴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다른 고분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투탕카멘은 고대이집트 역사상 가장 불우한 파라오로서의 일생을 지냈기에 그의 무덤에 대한 관심은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1922년 우연히 찾아낸 투탕카멘의 무덤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파라오의 무덤이란 것과 권력을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했던 파라오였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물이 발굴되어 전 세계가 놀라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중요한 것들은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의 특별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황금으로 된 마스크와 무려 110kg에 달하는 황금관등 2500여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투탕카멘의 발굴에 관여한 발굴팀 중에서 카터경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카나몬경이 다음 해에 모기에 물려 죽었습니다. 뒤이어 그의 동생 허버트 대령도, 카나몬경의 간호를 담당했던 간호원도, 카터의 비서도 연이어 20명이나 원인 모를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투탕카멘의 무덤입구에 “파라오의 영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이 닥치리라!” 라는 글이 씌여져 있다는 얘기와 함께 이를 가리켜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라고 부른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신비의 파라오가 등장하고 발굴과 관련된 인사들이 연이어 숨을 거두자 이런 풍문은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세계는 전쟁의 악몽을 떨쳐내는데 이런 미스테리에 흥분하며 투탕카멘의 열기는 상업성에 물들어 세계의 패션계에 영향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터일행의 죽음과 관련된 “파라오의 저주”는 누군가의 농담에 의한 해프닝이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제가 BBC방송의 다큐멘타리에서 본 기억으로는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무덤을 경비한 영국군인이 몰려드는 기자들과 농담을 한 것이 그대로 기사화 되어서 파라오의 저주라는 얘기가 나돌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쨋건 투탕카멘은 출생과 사망의 과정에서부터 그리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과정에서 조차 미스테리에 둘러 쌓인 파라오로서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