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쓰나미 현장을 찾아서 – Banda Aceh

매년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면 2004년 인도네시아 서쪽 끝 수마트라지방의 아체에서 시작된 초대형 재앙인 지진해일, 쓰나미가 생각난다. 2004년12월26일 아침, TV에서는 긴급뉴스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지구재난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장면이 전세계에 타전되었다. 진앙지는 반다 아체(Banda Aceh)에서 가까운 인도양 해저지만 반다아체시를 완전히 수장시키고 인도양을 건너 태국과 말레이지아,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를 강타하고 무려 8,000km 떨어진 아프리카까지 덮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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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빌딩만한 파도가 덮친 반다아체 해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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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쓰나미 재난이 발생하기 전(왼쪽)과 직후(오른쪽)의 항공사진 비교. >

 

2004년 인도양 쓰나미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진앙지에서 가장 가까운 수마트라섬 북서쪽 끝에 있는 반다아체였다. 진앙지는 반다아체시 해안에서 서쪽으로 160km 떨어진 인도양 이었다. 워낙 광범위한 지역에 대규모로 발생한 재난이었기에 통계조차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만 17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어 전체 희생자 23만명의 3/4이 된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희생자가 22만명 이라고 하는데 이쯤되면 전체 희생자도 28만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인도양 지진해일로 집을 잃거나 주거지역을 옮겨야하는 인구만 해도 10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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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핏 외형만 보면 모스크처럼 보이는 Banda Aceh 국제공항 전경 >

 

내가 반다아체를 처음 찾아 간 것은 2013년3월, 라오스에서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이틀 정도 여유가 있어서 반다아체를 찾았다. 반다아체는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기로 불과 1시간 남짓 걸리며 요금도 왕복 USD.100 못 미친다.  반다아체 공항 터미날은 좌우 대칭적인 구조와 커다란 돔이 마치 전형적인 모스크처럼 생겼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로비로 나오자 택시기사들이 방문객을 둘러 싼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이라 택시를 전세내기로 하고 요금흥정을 하였다. 요금을 흥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사의 영어소통능력과 기사의 심성을 떠보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행히도 40대 중반의 기사는 쓰나미에 대한 설명과 인도네시아의 정세에 대해 나름 자세히 설명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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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넓은 녹지에 파도를 의미하는 대형 조형물이 보인다. 이곳은 2004년 쓰나미로 희생된 아체주민의 공동묘지로 무려 70,000명이 잠들고 있다고 한다.  재난을 겪은지 9년이 지나 반다아체시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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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 희생자 약 70,000명이 잠든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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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nda Aceh 지역사회의 중심지 중앙모스크 Baiturrahman Grand Mosque >

 

쓰나미복구 감사기념 공원  THANKS TO THE WORLD MON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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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가 뛰어난 중앙 모스크를 중심으로 반다아체의 모습은 무척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 옆의 운동장은 쓰나미 기념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운동장 한 복판에는 쓰나미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고,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장을 복구에 전세계에서 보내준 지원에 감사하는 기념비도 함께 있다.  트랙 주위에는 쓰나미 복구에 참여한 세계각국의 기념비도 보인다. 각국 기념비에는 그 나라 언어로 감사의 표시가 적혀 있다. 물론 태극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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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중앙모스크 반대편에는 쓰나미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재난 당시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지진해일에 대한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다. 쓰나미기념관의 천정에는 세계각국의 만국기와 함께 각 나라의 언어로 평화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쓰나미 기념관 옆에는 공동묘지가 보이는데 이곳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통치 시절의 공동묘지로 쓰나미 재난과는 상관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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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인도양 쓰나미 기념관 >

 

PLTD Apung-1   육지로 올라 온 발전용선박 

반다아체 시내에는 쓰나미 재난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다.  해안에서 수 km 떨어진 곳 주택가에 대형 선박이 있는 것이 보인다. PLTD Apung-1 이름의 2600톤 규모의 발전용 선박인데 파도에 휩쓸려 이곳까지 밀려와 육지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현실과 동떨어져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또 다른 주택가 지붕 위에 어선으로 보이는 선박이 얹혀진 모습이 보인다. 이 어선도 파도에 휩쓸려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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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t on the Roof  

어선으로 보이는 선박이 주택가의 한 가옥 지붕 위에 올려져 있다. 쓰나미 때 파도에 휩쓸려 올라왔다가 물이 빠지면서 민가 지붕 위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주변의 집들은 모두 비교적 새 집으로 보여 쓰나미 후에 재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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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재난 완화 연구소  TSUNAMI & DISASTER MITIGATION RESERCH CENTER

폐허된 건물이 남아 있는 대형공터의 건물에는 쓰나미연구소라는 간판이 적혀 있다. 이곳 옥상에 올라가면 수 KM 밖의 해변이 Ulee Lheue 지역이 보인다. 2004년 쓰나미때 집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빌딩만한 파도가 밀려 들어온 곳이다. 이곳은 쓰나미 연구소 옆의 폐허만 남은 건물은 예전에 병원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마당 한 구석에는 파손된 헬리콥터도 그대로 전시 되어 있다.

Ulee Lheue Mass Grave  쓰나미 공동묘지

쓰나미 연구소 옆의 넓은 공터는 Ulee Lheue 공동묘지로 반다아체 지방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인데 약 14,800명이 묻혀 있다. 쓰나미 공동묘지의 특징은 개개인의 묘비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워낙 엄청난 희생자와 일일장을 지내는 이슬람사회의 관습도 있기도 하지만 일일히 신원을 밝힐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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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나미 연구소와 옆에 있는 옛 병원터전, 지금은 쓰나미 희생자 공동묘지로 변했다. >

 

Lampuuk Beach  바다아체 시내 외곽의 쓰나미 현장

쓰나미가 덮쳤던 흔적이 남은 시내를 둘러 보고 반다아체 시내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약 40분 떨어진 Lampuuk Beach를 찾았다. 이곳은 인가가 드문 해변가로 아주 한가롭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해변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민가는 모두 쓰나미 재난 이후 새로 지은 건물이다. 간간히 길목에 쓰나미 경고지역이란 안내 간판과 쓰나미가 발생할 경우 대피할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민가가 밀집되지 않아 인명피해는 많지 않았지만 Ulee Lheue 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파도가 덮쳤 황폐로 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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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mpuuk Beach로 가는 길에 지진해일(쓰나미) 위험지역 경고판(위)과 대피방향 안내판(아래)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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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mpuuk Beach 주말의 모습, 젊은이들이 많이 와도 수영복차림은 없다. >

 

평일 Lampuuk Beach는 인적이 거의 없다. 세차게 이는 파도 소리만 들린다.  Lampuuk Beach의 유일한 숙소이자 식당인 Joel Restaurant도 한산 하다. 한 손으로 꼽을 만한 정도의 서양 청년들이 서핑을 즐기는 모습 뿐이다. Lampuuk Beach 주변에는 방갈로가 5채 정도 있어 그중 하나에 짐을 풀었다. 산 비탈에 세워진 방가로는 선풍기와 모기장, 그리고 수세식 변기가 전부다. 그나마 수세식 변기가 있는게 다행이다.  워낙 따가운 햇볕에 파이프로 통해 흘러 나오는 물에 냉기는 없어 온수는 필요없다.

늦은 오후가 되니 넓은 해변에 나 혼자 뿐이다. 다음 날 주말에는 현지인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남녀 어울린 그룹도 있지만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는 사람은 남자고 여자고 없다. 수마트라 자체가 자바섬 보다 더 남녀 불구하고 신체적인 노출에 엄격한 것 같다.  인도네시아의 서쪽 끝 반다아체도 한류열풍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해변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자 서로 먼저 말을 건네고 사진찍으려고 경쟁이다.  나도 잘 모르는 한류 연예인들의 이름과 노래를 부르는데 오히려 내가 당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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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mpuuk 해변의 평일 모습, 사람이 거의 없다. >

 

우연한 기회에 2004년 쓰나미현장을 둘러보고자 Banda Aceh를 찾았지만 Lampuuk Beach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 그후 매년 쿠알라룸푸르에 회의차 참석할 때 마다 시간이 나면 찾게 되었다. 모든 잡념을 잊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아 이틀 정도 파도 소리를 벗삼아 지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반다아체를 등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택시 기사로 부터 의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원래 수마트라섬의 주민은 자바섬이 중심이 된 중앙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원을 중앙으로 많이 빼앗기지만 개발에서는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2004년 쓰나미 재난을 계기로 아체지방에 복구사업이 펼쳐지면서 이런 앙금이 많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아체지방의 쓰나미 복구사업과 관련된 우리 나라 처신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엄청난 재난에 전세계에서 구호금 경쟁이 벌어져 총 액수는 140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처음에 60만달러의 지원책을 내 놓았다. 이는 너무 적은 금액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나중에 다른 나라들이 대규모 지원책을 밝히자 마지 못해 한국도 5000만달러 까지 올렸지만 그 과정에서는 국내에서조차 비난을 받게 된 것이 기억이 난다. 이때 북한도 15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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