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다시 걷는 발걸음
” 50주년 단종문화제 “
전통역사축제 단종문화제
단종(端宗)은 1452년 12살 어린나이로 조선 6대 왕으로 올라
14살에 정순왕후를 맞이하고
단종 3년 6월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났을때가 15살이었다.
세조 3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10월24일 17살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나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매장하였다.
이후 숙종 24년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호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영월군민들은 1967년 4월 단종제향일에 문화제를 함께 개최함으로써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킨 단종문화제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왕릉에 제향을 올리는
50년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전통역사축제이다.
장릉(莊陵)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 된 장릉
조선 후기 숙종대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단종국장 재현 행사장 (동강둔치)
올해 50주년 “단종문화제”를 통해 재현되는 발인행렬 1400명에 달하는 단종국장은
세계화를 위해 외국인 500여명이 참가한다.
견전의, 발인의
섭다리
장릉(莊陵)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
박충원 낙촌비각
중종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 36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단종릉(端宗陵)
제 5대 문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손자이던 단종.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비명에 간 아버지 문종.
자신을 낳은지 하루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어머니.
자신을 복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
무엇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사무치게 그리운 아내 정순왕후.
단종은 살아서 영월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체념하며
숙부 세조(수양대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으니
약관에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험한 바람에 꺾여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단종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나이가 불과 열일곱이었다.
단종릉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배식단(배식단)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영천(靈泉)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던 우물이다.
홍살문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홍문,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장릉전경
정자각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장판옥
충신위 32인, 조사위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엄흥도 정여각
충신 엄홍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재실(齋室)
능을 지키는 참봉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기구를 보관해오던 곳이다.
온통 하늘을 가리고 있는 향나무 고목이
장릉에 얽힌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단종역사관
배견정(拜鵑亭)
장릉 능선의 남쪽에 자리잡은 아담한 정자
단종릉에서 나와 이동한 곳은
선돌과 한반도지형인 선암마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