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도깨비. 도깨비.

지난 겨울 갑자기 뜬금없이 도깨비를 부르는 소리가 주위에 난무했다. 여기서도 도깨비, 저기서도 도깨비, 심지어 중국의 금한령마저 무색하게 만든 한국발 도깨비의 위세는 겨우내 이어졌다. 티비엔 드라마 도깨비 이야기이다. 일부 팬들은 지난 설 연휴 내내 방송된 전편 재방송 때문에 고향길도 마다하고 행복해했다고도 한다. 유선 방송이 나오지 않아서 이 드라마를 보게 된건 그 열풍이 사그라지기 시작한 봄 무렵이었다.

< 주문진항,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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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여년전 고려의 무신으로 전장을 누비던 김신은 간신의 계략에 말려든, 자신의 누이의 지아비이기도 한 (가상의)어린왕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의 누이 역시 죽임을 당한다. 상인지 벌인지 모를 신의 선택으로 영생을 얻은 김신은 간신을 죽이고 이후 도깨비로 불리며 900년을 살아간다. 그를 죽게 만든 어린 왕은 독살되고 그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저승사자로 환생하여 끝없는 죽음에의 인도를 반복한다. 마침내 자신의 영생을 끝내줄 도깨비 신부를 만난 김신은 저승사자와 기묘한 동거를 하게되고 자신의 누이의 환생과도 마주친다. 마침내 기묘한 동거를 이어온 그 저승사자가 자신과 누이의 원수인 900년전의 어린 왕의 환생이란 사실을 알게되고 혼란에 사로잡히는데. 때마침 도깨비가 된 김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간신의 악귀에 도깨비 신부가 위험에 처하고 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미뤄왔던 자신의 영생을 끝내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토록 원했던 불멸의 마침에서 김신은 다시 무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중간세계에서의 끝없는 기다림을 선택한다. 기억을 잃고 살아남은 도깨비 신부는 10년뒤 마침내 기어이 도깨비를 소환하지만 이번엔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상을 등지고 다시 이별을 선택한다. 몇번의 환생이 이어진 뒤, 둘은 다시 조우하고 끝없는 윤회의 길에서 동행을 시작하는데.

< 고창 보리밭,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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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영혼, 이승과 저승, 도깨비, 저승사자, 삼신할머니, 환생, 윤회, 왕과 왕후, 고려의 무신 등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온갖 이야깃거리를 섞어 잘 비벼만든 줄거리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가미하여 대중의 흥미를 자아내었다. 작가의 욕심과 필력에 찬사를 보낸다. 아울러 어차피 허구의 존재인 도깨비와 저승사자를, 과거 우리가 “**의 고향” 등을 통해 접한 멍청하고 우울하고 음산한 존재에서 유쾌하고 멋지고 밝은 존재로 재탄생시킴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한다.

< 월정사 전나무길,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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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건 드라마 곳곳에 등장하는 평범한 곳곳의 풍광과 잔잔한 에피소드이다. 동해 주문진항의 방파제는 지금도 남녀들이 쌍쌍으로 줄서서 기다리며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남도의 보리밭과 강원도의 메밀밭, 월정사 전나무 숲길, 인천의 오래된 책방, 서울 아파트 숲속의 산책길, 용평 스키장의 곳곳과 종로 운현궁의 고택은 지금도 패키지 관광코스가 되어있다. 그리고 안성에 있는 석남사 돌계단과 캐나다 퀘백까지도.

< 안성 석남사,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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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의 마지막 길에 차 한잔 대접하려는 저승사자가 운영하는 찻집은 갖가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다.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려 혼신의 힘을 다하다 정작 과로사로 죽음을 맞이한 의사, 저승사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정신과 의사, 아이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이에게 천국이란 차를 주문하는 엄마, 마지막 길에 몇해전 죽은 자신의 안내견 영혼의 따뜻한 마중을 받고 길을 떠나는 맹인, 텅빈 냉장고를 보고 엄마가 마음 아파할까봐 자기가 마지막으로 살던 고시원의 냉장고를 채워줄 것을 부탁하는 고시생. 저승의 길목에서까지 이어지는 갑질 퍼레이드. 모두 우리 주위에서, 뉴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안타까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이백 몇십명의 어린 학생들이 줄서서 찻집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기막힌 이야기는 차마 글로 쓰지 못한듯 하다.

< 인천 책방,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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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상인가, 벌인가. 900년을 살면서 자신이 보살핀 아이가 어른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걸 열번 이상 보며 가슴아파하는 생은 과연 축복인가. 막내의 막내로 태어나서 빛바랜 사진속에 남아있던 아버지의 육형제와 그 배우자가 한분씩 사진 속에서 사라지는 걸 보아왔다. 막내이다보니 아무래도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슬퍼해야할 시간들이 가장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아니 벌써 시작되었다. 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진정 전생에서 반대의 연으로 만난 사람들인가. 다음 생에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그간 나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위해 살아갈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신이 머무는 순간이 있다는데 부디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를 등등의 부질없는 생각들에 잠시 의지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기도 한다.

< 캐나다 퀘벡, 출처: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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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같은 줄거리, 예쁘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장면들로 잘 포장한 이 드라마는 본질적으로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 이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가슴아프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천국, 누군가에게는 지옥인 세상. 자신의 천국을 지키려 누군가를 끊임없이 지옥으로 밀어내려 하는 참담한 세상, 그 간극을 좁혀보겠다는 노력들이 끊임없이 공격받고 매도당하는 이 이상한 세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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