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非世說) 趙英男의 살 길은 虛勢와 오만함을 버리는 것
조영남이 그렸다 해서 적잖게 팔린 그림들이, 실제는 그가 그린 게 아니라는 이른바 ‘대작’을 둘러싼 논란이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있는 형국이다. 사기로 보는 시각이 높아지면서 사법당국이 개입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 이에 따른 논쟁도 치열하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가”라는 경구가 문득 떠 올랐다. 그림은 조수더러 시켜놓고 자기는 줄 하나 긋듯 사인만 하고는 자기가 그린양 치부하는 게 말이 되는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그림질을 하다 생긴 일이니까 미술계와 방송 연예계 등에서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고 복잡하다. 미술계 쪽 사람들의 조영남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차갑다. 반면에 그가 먹고사는 터전이랄 수 있는 연예계 쪽은 조영남의 ‘해명’을 좀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헷갈리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다. 한 며칠 간 이 사안을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영남이 그렸다는 많은 작품의 진위여부에 대해 ‘조수’ ‘협업’ ‘관행’ 등의 일반 용어가 나오더니 데이미언 허스트니 마르셀 뒤샹이니 앤디 워홀이니 하는 외국 작가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콘셉트’니 ‘미니멀리즘’ 같은 전문 용어도 나온다.
이런 작가들이나 전문 용어를 아는 일반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미술하는 작가들이 조수를 두고 작업을 한다는 사실조차 처음 접해본다는 게 시중의 일반적인 여론이다. 이러니 안 그래도 복잡다단한 세상에 국민들이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번 일로 조영남이 궁지에 몰린 것만은 확실하다. 국민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 그저께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가 있은 모양인데, 여기서 국민들의 근 74%가 조영남의 행위를 ‘사기’로 보고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상식적인 것이다. 조영남의 것이라 해서 비싼 값에 많이들 팔렸을 것인데, 그 게 조수가 그린 것이었다면 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초반보다는 영 풀이 죽었지만, 조영남은 그래도 다른 작가들도 다 그랬다는 ‘관행’을 앞 세운다. 그러나 궁박한 언설이다. 굳이 어려운 이름의 외국 작가들을 둘러세울 필요도 없다. 조수를 두고 작업을 하는 국내 유명작가들도 꽤 있다. 문제는 조영남이 이런 작가들의 작업 행태를 자기도 그러한 양 관행으로 환치해 국면을 돌파해보려는 것인데, 이런 언행이 오히려 그를 더 사기성 쪽으로 몰아가는 족쇄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그가 내세운 이른바 조수와의 협업 관행의 추잡스런 속살이 알려지면서 분노의 여론마저 더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조영남은 국내 유명작가들과 반열을 같이하는 처지가 못 된다. 그들의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려면 그에 따른 실력은 물론이고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시 적시할 필요도 없지만, 조영남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런 마음의 태세 없이 그저 대가들의 흉내를 겉으로 내려다 무리한 것이고, 그 무리가 결국 지금의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그 무리함을 호도하는 변명은 결국 거짓을 낳게 된다. 지금 조영남의 처지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던 조영남이 미술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물론 그의 재능 탓이다. 조영남이 이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가 자신 작품의 오브제로 삼은 ‘화투’는 기발한 착상이다.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콘셉트를 모방한 그의 ‘요강’ 작품도 참신한 것이었다. 화투를 오브제로 해 그는 많은 작품을 생산했고, 그에게 화가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안겼다. 그는 그래서 좀 우쭐해졌을 것이다. 뛰어난 가창력의 가수에다 화려하고 도발적인 언변으로 방송연예계를 넘나드는 기존의 유명세에 날개를 붙인 격이다. 천하가 우습고 조그맣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수반되는 게 있다. ‘허세’다. 다른 어려운 말 들이댈 것 없다. 조영남의 이번 사태는 결국 그의 허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허세가 과하면 착각을 수반한다. 그리고 따라오는 게 과다망상이다. 보는 관점이 제각각이겠지만,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개인적으로 나는 조영남의 트레이드 마크를 ‘자신감’으로 보았다. 그가 무대에서건 방송 마이크 앞에서건 늘 튀는 언행으로 일관하는 것은 이런 자신감의 일환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걸 좀 안 좋게, 시덥잖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 말하자면 자신감이 자만내지 오만함으로 인식되면서 생겨나는 시선이 많았다는 얘기다. 조영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런 오만함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안티 팬’들 또한 의외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무렵인가, 조영남은 모 텔레비전에서 이런 말을 한다. “클림트나 피카소 한테도 없는 그런 위트나 재미 이런 게 나한테 있는 것 같더라…” 평소의 조영남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말이다. 이 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말 그대로라면 그는 피카소나 클림트보다 위트나 재미가 뛰어나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그의 작품을 자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장면을 이번 일이 터진 후 보면서 허세를 바탕으로 한 과대망상이 이 때쯤 이미 조영남의 머리 한 켠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만과 허세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요인이라면 해결의 가닥은 의외로 쉽게 잡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좀 힘 들겠지만 그것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사태를 올바르게 직시하는 일이다. 모두가 조영남 그 자신으로 비롯된 일이다. 그리고 그가 잘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잘못을 빌 일이다. 작가적 양심과 겸손한 자세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 이상의 변명은 구차함만 더 할뿐이고 욕스러움만 남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가면 된다. 이번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도 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오직 순탄하게만 그 빛을 발할 수는 없다. 어떤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그 고비를 넘어서면 새로운 길이 주어진다. 화가 조영남의 살 길은 그것이다.
비풍초
2016년 5월 23일 at 7:09 오전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애시당초 연예인이었고, 인기를 먹고 자란 그였기에 무엇이 허세이고 무엇이 오만인지 인기라는 이름 안에서 구분하기 힘들것입니다.
koyang4283
2016년 5월 23일 at 3:40 오후
그러니 그저 딴따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