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기행4 : 망각의 세월 이야기

어릴적에시골에살면서듣고본것을이제야제대로이해하고,이런것들에대한아스라한추억을글로옮겨보고자한다.

첫째이야기:다리밑에서주어온아이이야기

우리고향에서는대부분의아기를"북창다리"와"채운다리"에서주어와서키웠다고한다.왜냐하면우리고장의두다리는바닷물이드나드는하천위에세워진가장큰다리이었기때문이다.그러나지금은방조제로막혀서바닷물이드나들지않고그냥담수가흐르는하천으로변하였다.나도아버지나어머니가"너는북창다리밑에서주어왔다."라고하시면괜히내가정말로주어온의붓자식이아닌가하는조바심을친적이있었다.그런데그것이실제로는북창다리밑이아니라어머니다리아래에서나왔다고해야할이야기를아이들에게둘러서말한것이’이애는북창다리밑에서주어왔다.’고하는에피소드로남아있는것이다.요즈음은아마도내가다리밑에서가아닌엄마다리아래에서태어났다는것을청소년무렵이면대개는알고있을것이다.다만어른들이아이들에게탄생이야기를제대로설명하기가어려워서에둘러서그고장의가장큰다리로바꾸어말한것이다.우리애들은병원에서제왕절개수술로태어났으므로엄마다리아래가아닌배위서주워왔다고해야할까요?

둘째이야기:보퉁이를머리에인할머니이야기

공부를하러도시에나와있다가시골의고향마을로갈려고버스정류장에서버스를기다리고있노라면,시골할머니들이보퉁이를머리에이고서는황급히"어디가는버스행선지"를물어보셨다.특히시골장이선날에는더많은경우를당하였던기억이난다.나는친절히어디가는버스는여기저기에있고시간은언제라고까지알려드렸다.그런데나중에그런경우를가끔접하다보니이상한생각이들었다.타고가야할버스가코앞에있는데도행선지를묻는다는것을생각하여보니,할머니들이"한글"을모르신다는것이었다.이런것을유추하여보면우리는당연히학교를다니었고,한글은기본적으로다깨웃쳤다고생각하고있었지만,60년대까지만해도당시에60대되신분들중에는초등학교를제대로다니지못한분들이많았다는것을알수있다.나중에생각하여보니이분들이일상생활하시는데불편하셨을까하는생각이미치자,우리선대들은자기들은비록못배웠을지라도"자식들만큼은제대로가르쳐야겠다."라는일념으로보퉁이를머리에이고장에나와서갖은농산물을팔고하셨던것이었다.이것을아주나중에시골행버스속에서이사실을느끼고는조금더배웠다고으쓱거리던내가속으로심히부끄러웠던기억이새롭다.

셋째이야기:조카보다어린고모이야기

우리큰어머님은현재고향의시골에홀로계시는데,연세가1919년기미생이시니우리연세로는95세이시다.우리큰어머님은6형제의맏이신큰아버님에게19세에시집을오셨다고한다.시집을오니부잣집이라는말은온데간데가없고사돈댁의논을소작을부쳐서생활하는지경이었다는것이었다.그때에시아버지(나의조부)는42세이셨고,시어머니(나의조모)는40세이셨단다.

결혼후에한1년이지난후에사촌큰형님을출산하셨고,큰아들을젖을먹여키우시는중에거의돌이되었을때에시어머님께서막내로따님을출산하셨다는것이었다.이미아들을6형제나두셨고는데,막내로고명따님을얻으신것이었다.그분은아직도70대중반의연세로정정히시골에서살아가시는우리고모님이시다.그래서할머님의노산으로인하여아드님(우리사촌형님)과시누이를같이젖을먹여서키우셨다는것이다.요사이같으면40가까이에도결혼하는것이가끔있을정도로만혼이흔하지만,그때만하여도40전후에할아버지,할머니가되고,며느리가출산하였는데다시할머니가출산하는것이가끔은있었던것으로짐작이되는예적이야기이다.그래서고모님은큰어머님을키워주신어머님으로여기시고아주각별히대하시고모신다.

7남매의맏이에게시집오셔서지금은남편(큰백부님)과시동생다섯을모두먼저저세상으로보내고,홀로시골집에서고군분투하시면서생존해계신다.우리큰어머님과같이우리앞세대들은일제강점기에태어나시고,일본의전쟁으로인하여징용을당하고,광복과한국전쟁등을온몸으로겪어내었으며,그리고사일구혁명과오일육혼돈을겪으면서우리를낳아주시고길러주셔서우리가이렇게잘살고있다는점을명심하고살아야한다.그러므로시골에외롭게살고계시는윗분이있으면,종종찾아뵙고그분들의희생과고생에대하여감사와위로의말씀을드려야하는것이우리가그분들에게차려야할최소한의예의가아닌가한다.

네번째이야기:손의지문과손톱이자랄틈이없었던분들의이야기

나는군대생활을방위소집(요사이말로는공익요원근무,신체검사에서보충역으로판정을받은이유는어릴때에심하게앓은후유증으로인하여치과에이상이발생하여안면기형이되었기때문이었다.)이되어서면사무소에서근무하였다.주요업무는호병계장업무를보조하여,각종민원서류를필사하는것이었다.그때만하여도호적서류가한문으로되어있었고,일제시대부터작성되어계속연결이되어있어서어떤경우에는한가족호적이아주많은분량으로되어있어서,그것을필사하려면하루종일소요되기도하였다.70년대중반까지도아직호적이한글화와분가,복사시설이되어있지않아서일일히민원서류를손으로먹지를대고필사를해야만하였다.

그때에현재의주민등록체계가도입되어전주민을대상으로새로운주민등록증을발급하였다.그때가마침농촌의추수계절이라주민들을면사무소로나오라할수없어서면사무소직원들이해당부락까지출장을가서주민증을발급하였다.그런데주민등록증을발급받으려면지문을날인하여야하는데,농촌에서일하시는대부분들의지문이닳아없어져버려서경찰공무원들이지문을채취하느라고애를먹고하였다.그때에우리나라농촌에사시면서얼마나많은일을하고악착같이살았는가를그분들의손을보고알았다.손톱은아에깍을필요가없을정도로닳아있었고,지문도다닳아서지문을뜰수가없을정도가되어있었다.요즈음은농촌에서도일할때에는손에장갑을끼고일하지만70년대만하더라도대부분이맨손을그많은일을하였다는사실이다.

지문을뜰수가없어서궁여지책으로바가지에뜨거운물을담아오라하여,30분정도손을담가서손이불어서지문이나오도록하여겨우지문을뜰수있었다.그시절에는농촌에기계화라는것이경운기정도가보급되기시작하였고,논에모심기,김매기,벼베기,타작등을대부분인력에의존하여서하였고,그수고의대부분은손으로일을하였기때문에손톱과지문이남아있지를않았던것이었다.

먼저에쓴글에서나타났듯이시골할머니들이머리에보퉁이를이고장에다녀오는모습이30-40년전의우리의시골의모습이었고,그들의고생과수고가있었기에오늘의우리가누리는경제적풍요와발전이가능하였다고본다.

그들은일은무척고단하게하였지만막상나이가들어서병마와싸울즈음에는의료보험제도등사회보장제도가마련되지않아서제대로된치료를받지못하고고인이되고는하였다.

이시점에서그당시의선대(우리의부모님들)들의희생과고생에대하여정중한마음으로위로와감사,그리고존경을표해야하는것이우리의조그마한성의가아닐까한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