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제조기 재봉틀에 얽힌 아픈사연.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나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자주 볼수 있고 양복이라고 불려지는 남자들 옷은 색상만 다르지 거의가 거기서 거기의 모양이다. 이토록 요즈음은 모든 옷들이 치수에 따라 수 천벌씩 재단하여 재봉틀로 드르륵 박으면 된다. 그토록 되게 만든 것이 재봉틀이다.

그 재봉틀은 개발과정에 너무나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글을 읽었다.

1830년에 파리의 뒷골목 빈민가에 살고있는 시몽은 1분간에 200바늘, 손바느질의 14배 빠르게 할 수 있는 재봉기계를 발명했다. 그렇지만 당시 손 바느질을 해서 먹고사는 수많은 직공들이 두려워 10여년이나 비밀에 부쳤다. 어느날 그의 집은 불타져서 잿 더미로 변했다. 직공들이 그가 개발했다는 기계가 자기들 생업을 위협할 것 같아 집을 부수고 불을 질러 애써 개발한 기계도 타버렀다.

1848년 두번째 만들었지만 역시 재봉노동자들에 의해 불 살려지고 가난의 밑바닥에 떨어진 최초의 재봉틀 발명자는 거지가 되어 가난과 절망속에 죽었다.

1819년 미국 매사츄세츠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하우라는 불구자가 보스턴에서 기계 기술자의 조수로 일하였고 아내는 집에서 싹 바느질을 하였는데 밤 늦게까지 바느질 하는 아내의 모습이 애처로워 바느질 하는 기계를 발명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연구 하던 중 어느날 꿈에서 본 토인의 창 끝 한가운데 구멍이 뚤려져 있는걸 보고 재봉바늘을 착안했다

1844년 24살 때 하우는 윗실과 밑실로 겹 바느질 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바느질 기계를 발명했다. 빚도 많이지고 너무나 가난하였다.

하우 재봉틀 역시 옷만드는 공장의 직공들 반대에 상용화 되지 못하고 특허를 팔기위해 영국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발명품을 도둑 맞았다. 소득 없이 돌아와보니 그의 아내는 가난과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도난 당한 하우의 재봉틀을 우연하게 입수한 사람은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인의 아들 아이삭 매리트 싱어 (1881_1875)였다. 그는 발 밟는 장치와 헌겁을 밀어내는 장치를 덧붙인 후 제작 판매했다.

한집에 한대의 재봉틀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여러 도시에 전시회를 열고 재봉하기 시합도하고 125달러짜리 한대 기계를 5달러만 내면 가질수 있도록 활부 판매도 했다. 싱어의 재봉틀은 순식간에 전세계에 보급되고 싱어회사는 세계 제일의 재봉틀 회사가 되었다.

발명품들이 그것을 발명한 사람은 고생만 하고 그것 때문에 병이들려 일찍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큰 성공을 한 경우를 자주 보았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큰 성공을 할것이다고 여기고 신제품을 개발도하고 창업도 하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볼수있다. 오히려 그러고 난후 수년이지나고 그런 제품이 다른 사람이 개발하어 많이 보급되고 엉뚱한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 자주 볼수 있다.

손으로 한땀 한땀씩 바느질 하는 시대에 재봉틀은 의류제조에 큰 혁명이었다. 위에 사진의 싱어라는 마크가 찍혀있는 재봉틀 어릴때 어머니도 쓰셨던 것이다. 그것으로 아버지 무명 바지저고리도 만들고 우리들 옷도 손수 만들어 주셨다.

예전에는 의식주(衣食住)가 족하면 행복하다고 하였다. 의가 제일 첫머리에 쓴다 그만큼 의복이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 그러나 다른 분야는 첫번째 발명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더 능율적이고 좋게 하는 변화된 것도 많으나 의복제조는 아직도 싱어의 발명품 재봉틀로 그때 그방식 윗실과 아래 실이 서로 작용하여 헝겁이 깁어 지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얼마전 광고를 보니 여성들 속옷이 재봉선이 없는 옷이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던데 재봉선 없이 접합시키는 방식인지 아니면 통째로 제작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상식으로 가능 할 것 같고 머지않아 우리들의 옷도 만드는데 지금의 아날로그식 재봉틀이 필요 없이 만들어지는 날이 곧 올 때가 되었다.

여타 다른 산업들을 보면 아나로그식의 재봉틀도 머지않아 창고에 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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