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외과의사는 이발사였다는데.
요즈음은 인체 해부를 쉽게 하지만 그 예전에는 시체도 해서는 안되었다.
부득이한 일로 사람 피부를 칼로 째는 인체해부는 의과대학 교수가 아닌 이발사가 하였다고 한다.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법률로 금지 되었고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돌아와 부활한다고 믿었고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또 다른 살인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 교리에 따라 엄격히 금지했다.
갈레노스(129~199)라는 사람이 원숭이. 말. 소. 곰. 돼지. 등을 해부하여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1500여년동안 의과대학 해부학의 교재로 사용 되었다.
1514년 벨기에 브리쉘에서 태어난 안드래아 베살리우스(1514~1564)는 소년 시절부터 개와 고양이 등의 시체를 해부하여 그 내부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파리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 하던 중 인체를 해부하는 것은 교수나 학생이 아닌 이발사가 하여. 해부를 손수 할수도 없고 구경 하기도 힘드니 큰 실망을 하고 1536년 해부학 선생이 되고자 고향인 벨기에로 돌아와서 루뱅대학의 해부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마음대로 해부를 할 수는 없었다.
어느날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베살리우스는 검은 망토를 입고 사형수가 죽어 있는 교수대로 갔다 교수대에서 매달려있는 사형수의시체를 가지고 간 칼로 줄을 잘라 시체를 검은 망토에싸서 누가 볼까봐 가슴 졸이며 둘러매고 루뱅대학 건물로 들어가 해부를 하였다.
피로 범벅이된 손으로 열심히 들어다 보고 기록한 것이 오늘날 해부학 교재의 시초라고 한다.
그의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 해부학연구에는 큰 진전이었다.
그 날밤 교수대에 시체가 없어진 회괴한 사건으로 베살리우스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급히 밸기에를 떠나 파리로 갔다 그후 파도바대학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종전의 인체의 상식과는 다른 인간의 턱뼈가 2개가아닌 하나, 넙적 다리뼈가 개처럼 휘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 때문에 남자는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다는 것이 아니고 같다는 것 등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이 모두 틀린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화가 잔 칼카에게 세밀하게 인체도를 그리도록하여 1543년에 놀랍도록 상세한 7권의 해부학 책을 발간 했다고 한다. ‘인체 구조에 대하여’ 라는 재목의 이 책은 근대 해부학의 시작의 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베살리우스의 책을 ‘악마에 의헤서 쓰여진 책’ 이라고 몰아부쳤고 동료 학자들과 사회전반으로부터 맹렬한 공격과 비판을 받았다.
결국 베살리우스는 비난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노트를 모두 불태우고 당시 개혁적인 지도자 도이칠란드 황제 카를5세 왕실의사로 일하다가 신경쇠약으로 1564년 그리스도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 하던 중 배가 난파되어 그리스의 조그마한 섬 잔테에서 그의 나이 50세에 쓸쓸히 죽었다.
세상은 용기 있는자들에 의해서 달라지고 있으나 그 용기 있는 개척자는 큰 빛을 보지 못하고 가난과 질시를 받으며 곤궁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참 많다.
베살리우스도 그렇지만 콜럼버스도 지구는 둥글다는 신념으로 공포와 같은 항해를 무릅쓰고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말로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없는 세비아의 선원들 기숙사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고, 1830년 파리의 빈민가에 사는 시몽은 아직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재봉틀, 손바느질 보다 14배나 빠르게 재봉할수 있는 재봉틀을 만들었으나 가난한 재봉공장 노동자들의 생계 때문에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으로 죽었다. (제글. 16.7.18일자 의복제조기 재봉틀에 얽힌 아픈사연) 이 시몽의 아픔도 상상해보면 안타깝다.
이 베살리우스의 용감한 결단이 그에게는 큰 죄인이 되었고 악마로 취급되어 올 때 갈 때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어 곤궁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오늘날 사람 몸 속 기관을 나쁜 것은 빼내어 버리고 그보다 훨씬 싱싱한 것으로 교체하는 경지까지 발전했고 사람의 수명이 그 당시보다는 40년정도 더 살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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