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군으로 미군 포로가 된 한국인의 그후

2002년미국역사방송에서미국의사가이며전기작가인스티븐암브로스(StepenAmbrose)

가제작한놀만디상륙전다큐에서처음세상에알려진나치군복입은한국인이 방영되였었다.

그당시놀만디상륙전후포로를심문한한미군병사가암브로스에게그가심문한독일군복을입은

한국인포로는4명이었다는사실을증언해주었다.

이사진이국내에알려지면서상상할수도없었든일에한국인들은놀라움을금치못하며

어떻게그런일이있을수있었는지에대해비상한관심을보였었다.그때내가이사진을대하는순간

나치군복입은한국인의얼굴은루마니아작가게오르기의25시소설의 주인공인25세의요한모리츠의

얼굴이오버랩되였었다.일제의악랄한식민지배를받은한국인 후손만이느낄수 있는직감이었다.

2-3년전이사진의주인공을찾기위해한국의한방송이제작한다큐에서중앙아시아까지

추적해 2차대전때 소련군으로 유럽전선에서 독일군과의 전투한 동포들을 만나 

면담을했으나아는 사람이 없었고, 미군에포로가된그후 그의행적은찾지못했다.

한국에서는한국인의상식으로있을수없었든일이어서지대한관삼을보였든이사진속의

주인공은이미모두의기억에서사라졌으나현재미국인터넷에서사진의한국인주인공이왜,

어떻게독일군복을입고미군에포로가되였는지에대해현재까지 활발하게토론이벌어지고

있는이유는아리안외인종은인간이아닌짐승으로분류했든나치독일이어떤 이유로한국

인을독일군에편입시켰는지에 대한의구심때문이다. 

나치독일은소련과전투에서막대한전사자가발생하자1944년부터년령에 제한 없이 징집영장

을 발부해 전투요원이나 전투부대 지원병력으로 배치했다.이와함께 소련군포로중독일군에

입대를 원한는 포로들로 구성된 부대를창설했다.더나아가발틱해3국중의한국가인리투아니아 

출신만으로 구성된리트아니아부대와 루마니아 군대가 소련과격전을벌이고있는전선으로 

배치되고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무쏠리니의이태리군도소련과의격전장으로배치되여 소련군에게 

전멸되거나 아니면 포로가 되였다.2차대전중 소련군에 포로가 된 독일군의 병력은 50만

명이었으나 시베리아 굴라그로 유배된 독일군 포로중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포로는 5천명

정도다.

인테넷에서 사진의 주인공의 포로가된후 그의 행방은 소련과 미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포로교환은 없었고 독일군에 편입된 소련군은 소련으로 돌려 보냈울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행방을 알리는 글을 찾아냈다.

ThenameofthesoldierinthisphotoisKyoungjongYangwhowasborn
inShinEuijoo,NorthwesternKoreaonMarch3,1920.Hewas
conscriptedtotheKwantungarmyin1938andcapturedbytheSoviet
inNomonhanandcapturedagainbyGermansinUkraineinthesummerof
1943,maybeinthebattleofKharkov,andcapturedfinallyby
AmericansinUtahbeach,NormandyonJune6,1944.

독일군복 입은 병사의 이름은 양경종으로 생년월일은 1920년 3월3일,

평안도 의주에서 태어났다.1938년 일본군에 징집된 그는 관동군에

배치되여 소련군과 전투중 노몬한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되여 소련군에

편입된 그는 1943년 우크라이나 카라코프에서 독일군에 포로가 되였다

독일군에 편입되여 1944년 6월6일 놀만디 상륙작전 미군의 상륙지역인

Utah beach에서 미군에 생포되였다. 

HewasfreedfromaPOWcampinBritainonMay,1945andmovedand
settledinAmericain1947.HelivedneartheNorthwesternUniv.in
IllinoisuntilhediedonApril7,1992.HelivedasanordinaryUS
citizenwithouttellinghisunbelievablelifestoryeventohistwo
sonsandonedaughter.

그는 1945년 영국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출소해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정착했다.그는 일리노이주 NorthwesternUniv. 부근에

살다 1992년 4월 7일 별세했다.평범한 미국시민으로 살든 그는

험난했든 그가 격은 역경들 그의 자식인 두아들과 한 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Hisstorywasrevealedbyanarticleof’WeeklyKorea’onDec.6th,
2002,whichbecameabigtopicintheKoreansocietyhereatthetime.

그의 이야기는 2002년 12월6일 ’WeeklyKorea’에 소개되여 그당시

한국에서 화제가 되였었다(그의 포로수용소 출소후의 자취를 찾아나선

다큐제작진은 그이 출생지와 이름은 찾았으나 행방은 찾지 못했다.

그당시’WeeklyKorea’ 는 어떤 내용을 보도했는지 그당시 뉴스를 알고 

계신분이 있으면 댓글 남겨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