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선재에 얽힌 사연들 *-

마지막조선황실과낙선재에얽힌사연들

□아~낙선재!
[낙선재]

낙선재는사적제122호창덕궁(세계문화유산,역대조선왕조의임금들이가장오랫동안머물러있던궁궐)의궐내에있어요즘한창세인의관심을끌고있는옥류천등후원구역이나다른창덕궁의수려한건물들처럼많은관심을끌지못했다.

그러한낙선재가황세손이구씨의죽음과함께다시금관심의대상이되고있다.그래서문화재사랑이번호의‘이야기가있는사진첩’에서는마지막조선황실과낙선재에얽힌사연들을전하고자한다.

□이구씨의장례식이있던날의낙선재!!

[분향소]

이미언론에보도되었듯이조선마지막황세손인이구씨의장례식이지난24일오전10시,창덕궁희정당앞뜰에서약3,000여명의조문객이운집한가운데치러졌다.빈청이마련된낙선재에필자가도착한시간은오전9시!안마당엔일반조문객을위한분향소가마련되어있었고,낙선재의한켠바로고인의부모님의빈청이마련되어있었을그자리에서이젠고인도자신의마지막궁궐생활을빈청이라는공간에누워있는슬픈형태로영위하고있었다.

이른아침부터취재인파와조문행렬로인산인해를이루는가운데’전주이씨대동종약원’관계자들을중심으로고인의시신을희정당앞뜰장례식장으로운구하려는준비가행해지고있었다.

오전10시가가까워오자유족들은마지막으로고인앞에분향을드리고난뒤,육군의장대의도착과함께본격적으로발인을위한운구절차가이어졌다.

[낙선재안내판]

많은추모인파와취재진들의취재열기속에드디어고인의시신이낙선재를떠나고,분향소와빈청이조금씩철거되는동안에도이곳을찾은방문객들은낙선재앞에놓인안내판을읽으며조선황실과낙선재와의인연을바라보고있었다.

이렇게해서명목상이나마조선황실의마지막적통을이어오던이구씨의시신이옮겨지고낙선재와조선황실의슬프고도질긴인연은비로소끊어지는듯했다.

[재궁(상)과일본식관(하)]

한편낙선재와안뜰을마주한채있는전각한편엔일본에서이구씨의시신을모셔온일본식관이하나놓여있었다.관위부분에개폐식문을달아고인의얼굴을확인할수있게한특징(일본식관의특징)을지닌이관은조선왕실의재궁과함께오는8월15일에개관할국립고궁박물관에보관할계획이라고한다.

□낙선재는어떤곳인가?

낙선재는근래까지조선황실의가족들이살았던곳이다.조선말기를거쳐대한제국기에고종과순종이편전으로사용하기도했고,해방후에는조선조의마지막황후인윤황후(순종효황후),고종의외동딸인덕혜옹주가이곳에서생을마쳤다.이구씨의부친인영친왕과이방자여사도1963년일본에서돌아와낙선재에서기거했다.특히영친왕은귀국후7년여병원생활을하다가1970년임종직전낙선재로옮겨와타계했다.

[동궐도]

한편,1820년대제작된동궐도에서는낙선재의모습은당연히보이지않는다.뒤에언급하겠지만낙선재는헌종대에세워진전각이기때문이다.서쪽에낙선재가있고행각으로둘러싸인동쪽에"석복헌"이있고다시그동쪽으로"수강재"가있는데이건물들을통틀어낙선재라한다.원래는석복헌과수강재남행각밖으로중행각이둘러있고다시그바깥쪽으로외행각이길게늘어서있었으나중행각,외행각은철거되었다.

[장락문편액]

순조28년(1828)에건립한연경당보다20년뒤에세워진낙선재는궁궐에조영되는주거건축술로서그구성의법식과보존상태가훌륭하며특히연경당보다는낙선재가지형과환경에따라자유분방하며,다양한건축물을보여주고있는점에서중요한가치를지니고있는건물이다.12칸의낙선재남행각에있는"장락문"이정문이되며,장락문의편액은흥선대원군의글씨이다.

이러한낙선재는처음지어질당시에는창경궁에속해있었다고한다.그러나지금은창덕궁에속해있으며오랫동안보수를하지않아낡고부식이심한데다왜색풍으로증ㆍ개축되는등문화유적으로문제가많다는지적에따라1992년10월부터4년간복원공사를해지금의모습이됐다.

□낙선재는언제만들어졌을까?

앞서언급했듯낙선재는원래는창경궁에속했던연침의하나였다."궁궐지"에서는창경궁에속한건물로기록되고있으나근래에는창덕궁에서들어가도록되어있는건물로창덕궁의동남쪽에창경궁과이웃한곳에자리잡고있다."승정원일기"와낙선재상량문에헌종13년(1847)에건립된것으로기록된건물로서국상을당한왕후와후궁들이거처하기위해세워진것으로전하고있다.이를뒷받침하는예로낙선재바깥뜰에사각정이있다.4면에亞자분합문과고창을둔것으로서관을발인할때까지두던빈전이다.즉일반의정자와는그용도가크게다른건물이라하겠다.

[낙선재뒤뜰]

다시말해낙선재는조선의24대임금헌종이즉위한지13년(1847)되던해낙성을본건물로써분명일반적인궁궐의전각과는다른어떤목적이있어만들어진것은분명한것같다.

마침여기에관한이야기가하나있어옮겨보면,낙선재는헌종이사랑하는여인경빈김씨를위해지었다고전해온다.헌종임금은임금이되고서야장가를들었고,이때왕대비가주관하는국혼령(國婚令)이발동되었다.익히아는바대로전국의처녀는영이떨어지면시집가는일을연기하며기다려야하고,이후3단계에걸쳐왕비감을선발하는일이진행된다.

많은후보를단계마다줄이다가세번째간택때가되면세여인만남게되고,그중의한여인이왕비로낙점되고혼사를치렀다.그런데헌종은떨어진두번째김씨성을가진여인이마음에들었다.그와왕혼(王婚:임금이선택한여인과동거하는혼인)을하고사랑에빠졌다.그래서헌종은사랑하는김씨여인을위해왕비전에멀리떨어진,그것도궁이다른창경궁에,그러면서도쉽게다닐수있는자리에집을지었다는것이다.그것이바로낙선재인것이다.

[석복헌(좌),수강재(우)]

이런아름다운이야기가전해오는낙선재경내는대략8000여평으로서쪽에낙선재가있고행각으로둘러싸인동쪽에석복헌이있으며,다시그동쪽으로수강재가있어이건물들을통틀어낙선재라한다.수강재와석복헌은육순을맞이한대왕대비순원왕후를위해그이듬해(1848)에지어졌다.

□낙선재는어떻게사용되었나?

낙선재는고종이편전으로사용하기도하였으며,1917년대조전이불탔을때는순종이이곳에기거하였고,1926년에순종이승하하자순종비인순정황후와조선시대마지막공주였던덕혜옹주도이곳에서생활하였다.계후인윤비가이곳에서여생을보냈고이방자여사도이곳에서생활하다가1989년에타계한뒤로일반인들에게개방되었다.

[낙선재최후의가족]

그리고최근에는영왕비가1989년까지이곳에서생활하여낙선재는다섯궁의전각들중가장최근까지왕실의사람들이살았던곳이다.영왕비일가가현대식으로개보수하여사용하던낙선재일곽은낙선재상량문에따라헌종당시의모습으로복원되었다.

낙선재는헌종의침전으로,석복헌은경빈김씨의침전으로,수강재는순원왕후의침전으로꾸며당시의생활상을재현하였다.이세채의집들은언뜻보면서로닮아보이면서부분적으로는제각기많은변화가있다.같은반자를달았으면서도그방법이다르고,문창호를바른미닫이를달았으면서도창살이서로다른형태로짜여있다.

낙선재와조선황실!그아픈역사의인연!!

이제는낙선재와조선황실의슬픈인연에대해이야기해보고자한다.그러나그에앞서조선황실의아픈시련을겪게되는과정을먼저짚고넘어가지않을수가없겠다.

ㅇ조선황실불행의태동은언제부터인가?

아관파천1년만에고종은안팎의여론에힘입어경운궁으로환궁하고국호를대한제국,연호를광무라고치고자주국가임을내외에선포하였다.왕이아닌황제가다스리는국가가된것이다.때는열강들의다툼이한참인때였다.이위기를극복하기위한고종의노력도수포로돌아가고,대세의물결을막지는못했다.결국그자신도1907년강제퇴위당하고,그의아들인순종이황위를이어받지만,3년만인1910년경술국치를당하게된다.

살아서망국의치욕을한몸에받은고종과순종.이때부터시작된황가의비극은그후손들대에이르러결정적이게된다.고종에게는순종이외에도,영친왕,의친왕이있었는데,순종이자식을얻지못해영친왕이의민황태자로책봉되었다.영친왕은일본에의해천황의조카인이방자여사와결혼하였는데,여기서낳은황세손이바로이구씨였다.

ㅇ낙선재와조선황실의슬픈인연


흔히들’낙선재’하면조선왕조의낙조(落照)를상징하는최후의전각쯤으로연상하게된다.이처럼낙선재는조선왕조최후의왕손들이슬프고도기구한운명을마감한무대였다.낙선재가쇠잔해가는조선왕조최후의무대라는감회를느끼게하는데는그만한이유가있다.

돌이켜보면일찍이황태자였던영왕이은이1907년12월어느날,이곳낙선재뜰에서놀고있다가느닷없이11세의어린몸으로통감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에게이끌려일본으로납치되어끝내볼모신세가되었고,황제에서이왕으로격하된순종황제가1926년4월25일에43세를일기로대조전흥복헌에서한많은일생을마감한이후,순정효황후,세칭윤비도장장43년이라는긴세월을홀로낙선재에서그비운을달랬다.

[21세때의윤황후]

윤비는1906년13세에동궁(순종)의계빈이되어다음해에융희황제(순종)의황후가되었으나,1910년한일합방늑약이강요되던흥복헌어전회의때옥새를치마속에움켜쥐고통곡하다가숙부윤덕영에게강탈당하는통분을격기도했으며,6.25동란때는공산당에의하여낙선재에서쫓겨나는수모를당하기도했다.말년에이르러대지월이라는불교의법명을얻어나라의비운과자신의고독을달래다가,1966년2월3일낙선재에서73세로영욕의일생을마감하였다.

[영왕이은과이방자여사]

또한영왕이은도조국이광복되었지만곧바로환국하지못하다가1963년12월가까스로귀국길에올랐을때는이미말을못하는기억상실의상태였다.그후7년간의병원치료도헛되이1970년5월1일낙선재에서눈을감았다.11세에일본으로납치되어1920년4월28일일본의4대귀족의하나인나시모토미야케의19세난규수(후에이방자로개명)와결혼했지만,8.15종전으로일본의황족도아니고한국국적도갖지못한신세가되어20년가까이도쿄에서생활하다가볼모로끌려간지무려57년만에식물인간이되어환국한것이었다.

함께돌아온여왕비이방자여사도그후낙선재생활27년,향년88세를일기로1989년4월30일에역시이곳에서운명하였다.이방자여사는자신의저서<비련의황태자비>에서영왕과의결혼사정을다음과같이서술하고있다.

"나는1916년8월,볼모가되어일본으로잡혀와있던영왕의약혼녀로정해졌다.나와이은전하는단순한한일민족융화라는목적뿐만아니라권력투쟁의음모속에서희생된것이다."

이방자여사는결혼다음해인1921년8월첫아들진을안고첫서울나들이를하였는데사흘째되던날갑자기진이폐렴으로세상을떴다.그후두고두고이방자여사는아들진의죽음을조선사람들의음해때문인것으로여겼다.그러나따지고보면앞뒤경호와최후의진찰까지일본사람들이도맡았는데그사실이보다더의심스럽다고생각하는사람이많았다.

고종황제의고명딸인덕혜옹주도정신질환상태에서독감으로1989년4월21일에낙선재에서한맺힌생애를마쳤다.덕혜옹주는1912년복녕당양씨의몸에서태어난마지막옹주로서,1918년여덟살의어린나이로시종이던김황진의조카와약혼까지맺었지만별수없이일본으로업혀가고말았다.어머니인양귀인의무릎에싸여어리광을부리던어린아이였지만,일본인들이옹주마저볼모로데려가려는낌새가보이자부랴부랴늘가까이있는시종의조카와약혼을맺어놓은것이었다.

이와같은아버지고종황제의근심어린배려도헛되이1919년고종께서운명하시자마자일본인들은다음해에10세난옹주를납치하여우리나라의지위를낮춰버릴셈으로일개대마도도주의아들과강제결혼을시켰다.대마도주아들과의동거생활3년만에덕혜옹주는그동안의시련으로인한우울증에실어증까지겹쳐끝내사람을알아보지못하였다.

이처럼낙선재는조선왕조최후의왕손들이슬프고도기구한운명을마감한무대였다고할수있다.<참고·인용:서울600년(김영상),조선의궁궐(신영훈)>

□낙선재와황세손이구,그리고…

이제우리는조선황실마지막적통을이어오던이구씨를떠나보냈다.이름뿐인왕인아버지와허울뿐인황세손의멍에는그의삶에지울수없는족쇄를남겼다.더욱이황실을인정하지않는이승만정부에의해고국으로돌아갈수도없는신세였다.이와중에외국인인줄리아여사와결혼하여행복한삶을꿈꾸지만,현실은전혀그렇지가못했다.아이를낳지못한줄리아여사와의결혼생활도강제이혼으로이어졌고,다시한국과일본을오가며,정착하지못하는삶을살아야했다.

[황세손이구장례식]

바로그마지막황세손이사망했다는소식이전해지고,전국민의애도와관심속에장례가치러졌다.일본영친왕궁터가있던호텔에서사망했다고전해지는조선황실의마지막적통이구.한많은비극으로점철된인생이어서그럴까?그의죽임이새삼가슴아프게다가오는것같다.그가아니그의시신이아버지와어머니가임종한곳에서쓸쓸히역사의뒤안길로사라질수밖에없었다는사실이이렇게마음한구석을씁쓸하게만드는것은무엇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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