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클라이머의삶]김태삼-배경미부부산악인 “산악발전위해사명감을갖고최선을다할터”
아내배경미위원장도산악발전을위해해온일은만만찮다.90년결혼전후5년간대한산악연맹편집실에근무하며계간지<산악인>를펴내는데주도적인역할을해왔고,연맹사무국을떠난이후에도학술편집위원으로서대산련간행물편찬에꾸준히관여해왔다.그런데이제는회보와연감,청소년오지탐험대보고서편찬뿐아니라인터넷홈페이지를통해각위원회를포함한연맹홍보와정보교류까지도맡아야한다.
“한달이지났는데도피부로느껴지지않습니다.지금은2004년연감을마무리짓느라정신없고요.그래도더욱열심히해야겠다는생각이들더군요.그동안참여에의의를둔적이많았는데,지금은주도해야할위치가되었으니까요.”김태삼씨와배경미씨는동갑내기산꾼부부다.두사람은당연히한집에서살지만,낮에도한사무실에서지낸다.
당시덕성여대산악부는도보위주의산행이이루어졌다.그런데2학년이끝나갈무렵인12월첫째주일요일산악부서포터역할을해주던남자선배가도봉산산행중“바위한번붙어볼래?”하곤엉뚱한산행을제시했다.도보산행만고집하던남자선배의뜻밖의제안에동조해오른게선인봉남측이었다.
“저를산으로끌어들인박찬민은중3때한국등산학교를나왔고,또당대최고의클라이머로꼽히는에코클럽유기수선배한테바위를배우고있었습니다.그래서첫바위를끝낸뒤얼마지나지않아저도자연스레에코클럽에들어가게되었죠.고교시절찬민이와둘이서인수봉을하루에서너코스씩오르는것은무척신나는일이었습니다.”가볍고날렵한몸매의김태삼은고3때참가한첫대회인제2회대산련암벽대회에서고등부2위에올랐다.
대학입학후김태삼씨는클라이밍을전공하는선수라면웨이트트레이닝은기본이라생각했고,체력강화훈련외에도건물외벽타기,축대타기등을통해기량을향상시키는데주력했다.군복무를마치고나면스포츠클라이밍이널리보급되어있을것이고,그러면그에맞는일이많이있으리라는예상에누구보다열심히했다.
대한산악연맹회보와인연맺은것은매킨리등반보고서때문이었다.매킨리에서돌아온그녀는등반기를내기위해대산련사무국을찾았다.그때만난연보담당자는넌지시도와주지않겠냐고물어왔다.굳이거절할이유가없어잠시도와주겠다는생각에발을담갔는데,이듬해담당자가사표를내면서아예책임자가되고말았다.
“연맹집행진과의마찰로힘들기는했지만,93년까지5년간펴낸<산악인>은정말정성을다해만든계간지였습니다.내용도괜찮았고요.특히당시산악인들이목말라하던전문등반에관한내용은자랑할만한것이었다고자부하고있습니다.아쉽게도제가손떼면서폐간되고말았지만요.”배경미씨는<산악인>편찬을도맡아하느라바삐지내는가운데91년부터2002년까지10년넘게월간山해외뉴스를담당하기도했다.
배경미씨는88년에,김태삼씨는89년고고상돈10주기추모행사로서매킨리를찾은바있어두사람모두재도전인셈이었다.등반은매킨리시티에서김태삼씨혼자마지막캠프인데날리빌리지에올라가하룻밤비박한뒤데날리패스를향해오르다포기한것으로끝났지만행복이넘쳤던등반이었다.
“부부가둘이서만년설에텐트쳐놓고보석처럼반짝이는흰산을바라보고,또밤하늘에반짝이는별을세며지냈는데더이상즐겁고행복한시간이또어디있겠습니까?어차피정상을고집한등반도아니었습니다.그래서비박이튿날혼자정상을향하는데발에동상기미가느껴지자마자돌아섰죠.다음에다시오마하고말입니다.”
두사람은큰산에대한특별한꿈은없다.단,대상이정해지면최선을다해노력하고,열심히하는것으로만족하기로마음먹었다.배경미씨는“아이가하나일때는그래도고산에가고픈열정이강렬했는데,둘째아이가세상에태어난다음부터는아이들을잘키우는게무엇보다중요한일이다싶어산에다니는것을자제하고있다”고말했다.
김태삼씨는제대후엉뚱하게도여행업으로사회에첫발을내디뎠다.89년트레킹전문여행사인락희항공에입사했고,이듬해는코오롱정보센터로자리를옮겨해외트레킹업무를담당했다.90년결혼이후잠시‘장밋빛인생’이란맥주집을운영한적도있지만,95년아내와함께푸른여행사를개업한이후지금까지여행업외길을걷고있다.
“남들처럼빨간날놀면서할수있는일이뭐가있을까고민하다생각해낸게여행업이었습니다.배운게도둑질이라고제대직후여행업을해보았으니웬만큼아는상황이었고요.엉뚱한일도여러번했죠.등산장비쇼핑몰도해봤고,2003년에는상비군을운영하려면시내중심에좋은인공암장이있어야한다는생각에무교동코오롱건물에실내암장‘매드짐’을만들었으니까요.딱1년만에1억을까먹게되더군요.”
김태삼씨는사업에바삐지내면서도산악활동을열심히한다.봄가을토요일과일요일은코오롱등산학교강사로활동하느라북한산에가있거나,또는대한산악연맹과서울시연맹주최등반대회운영을맡느라대회장에서지낸다.열의가식었다가도새내기클라이머들의반짝이는눈빛을보면다시뜨거워지고,대회때새로운다크호스가탄생할때면보람이느껴졌다.
“여행업이지만서로전혀다른분야를담당하고있기에부딪칠일은거의없습니다.오히려도와줄일이생기죠.태삼씨는사업,가정,산을3분의1씩구분해놓고지내는사람이랍니다.자신이지닌역량의3분의1은사업에쏟아붓고,또3분의1은산에투자한답니다.그래서평소에는아이들과가정을위해노력을다하는거죠.사실휴일에함께지내지못한다는게달가운일은아니지만그렇게열의를갖고산에다니니뭐라트집잡을수없는일아니겠어요?그래서간혹일요일오후아이들과산을한바퀴돌다가등산학교가끝날때쯤찾아가곤합니다.”
김태삼씨는선수활동도해봤고,대회운영도해왔기에누구보다도스포츠클라이밍의흐름에대해잘알고있다.김씨는“이제스포츠클라이밍은하나의협회로서조직을키워야발전할수있다”고생각하고있다.
“인공암장은셀수없을정도로많이생겨났습니다.전국규모의대회에참가하는스포츠클라이머들만해도평균120명입니다.상위10%만큰대회에참가한다고생각하면무척많은인구죠.전국적으로200~300개의인공암장이있는것으로파악되고있습니다.한곳에서운동하는클라이머를50~60명정도잡으면적게는10,000명많게는18,000여명이나되는셈이죠.
“후배들에게시간날때자격증을따놓으라는얘기를수시로합니다.대학시절후배를만들어놓지않고입대한것이지금도후회가된답니다.후배가있었다면지금쯤학문으로자리잡아클라이밍학과가생겨났을텐데말입니다.”김태삼씨는최근열린블랙야크배서울시연맹국제볼더링대회때사뭇흥분된모습이었다.예상했던것보다반응이좋았기때문이다.
“매스컴의관심을받아야스포츠클라이밍이발전할수있다는생각에서난이도경기대신볼더링대회를추진한겁니다.기대했던대로중계방송이이루어지지는않았지만,관중들호응도좋았고,참가선수들도즐거워했습니다.내년에는대중이좀더쉽게찾을수있는장소를택해대회를열었으면합니다.”
“얼마전에실내인공암장이집옆에생겼어요.아이들이인공벽대회에자주가보다보니어색해하지않고,오히려좋아한답니다.큰애는아빠따라인수봉정상에도서너번올랐습니다.둘째한나도산을좋아하고요.요즘은아이들돌보느라산에자주가지는못하지만,봄가을캠핑과겨울스키는틈틈이즐기고있습니다.”
아이들이산을좋아한다는아내의말에김태삼씨는흐믓해하는표정을지었다.“예전에는등산은무조건필드가최고라고생각했는데,지금은그렇지않습니다.사업도열심히하고,아이들도잘키우면서또뒤에서후배들잘되도록도와주는것도하나의등산이란생각이드니까요.”
-글/월간산[427호]2005.05/한필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