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산의깊은울림
김기덕감독의<수취인불명>이란영화가있었다.미군병사가“사방을둘러봐도온통산으로막혀있는숨막히는이땅이지겨웠다”고절망감을토로하던대사를들으면서,우리에게익숙한것이이방인에게는숨막히는이질감일수있겠구나싶었다.태어나뿌리내리고자라온땅과의일체감은단지익숙한것과낯선것을구분하는정도는아닐것이다.우리는모두산아래서태어나산을오르내리며자랐고산등성이에지어진학교를다녔거나숨가쁘게경사급한언덕위셋방에서신혼살림을시작하기도했고,산을깔아뭉개고들어선공장에서일하고있는가하면,산을관통한터널을달려일터로가고,하물며죽어서도산으로간다.
온국민의삶터가모두산이다.우리국토에는산과또다른산사이에쉼표같은여백이있을뿐이라고해도과언이아니다.그럼에도산은종종일상의저자와구별된공간으로치부되곤한다.일상에서비껴난공간,쫓겨난공간,특별히간직해놓은공간.산은숨가쁜일상에서벗어나숨을돌리는곳이거나,일상의공간에서터지고깨진패배자들이몸을의탁하러가는곳,돈과권력같은일상의가치따위와는다른무엇을추구하며수행의길을걷는사람들이모여드는곳이기도하다.큰산에서흘러내린야트막한산줄기가강장동물의촉수처럼,골목이굽어보이는일상의공간에까지뻗어와저자거리의우리들에게선지자의영감을흘려보내는게우리삶터의흔한풍경이다.
이제와생각해보니‘내마음의산’은언제나갈급하게그리워하던설악산이나지리산이아니라잘난것없이야트막한동네뒷산들이었음을깨닫는다.나고자란서울성북구돈암동에뻗어내린북악산줄기는걸음마를떼고난뒤부터아버지의손을잡고무수히도걸었다.이른새벽,정릉약수터로가는길에는어둠과정적에휩싸인가난한이웃들이저마다감당키버거운삶의무게를침묵으로그러안고수행자처럼점점이걸어가곤했다.학생운동때문에쫓기는신세가되어봉천동달동네에숨어살던십오륙년전,나는틈만나면갑갑한옥탑방을빠져나와봉천동과상도동경계에있는국사봉에자주올랐다.시절은암담했지만봄이면개나리가화사했고신록이번지면산아래펼쳐진달동네도그럴듯해보였다.
지금은다뭉개지고고층아파트들이들어섰지만,당시언덕아래로는꼬불꼬불실핏줄처럼뻗어있는골목길을따라초라한집들이낮은지붕을맞대고수런수런정담이라도나누는모습으로들어차있었다.그동네를내려다보고있노라면도저히앞이보이지않던내인생에대한걱정이,어수선하고위태로워보이던그산동네의풍경에자연스럽게이입되면서슬며시어금니를깨물게되곤했다.잠시경기도안산에서살때도틈만나면공단옆,여태도이름을알길없는야트막한산위에자주올랐다.콘크리트팔각정이있는산꼭대기에오르면살풍경한안산공단의풍경과철책너머시화호에갇혀질식할것같던잿빛바다가내려다보였다.
잿빛공단하늘위로도노을이곱게물들곤했는데그럴때면소식을끊고살던가족과친구들생각에코끝이찡해지곤했다.아마도내가그산을오르는심정과실향민들이명절때북녘과가까운임진각에가서시름을달래는것이크게다르지않을것같았다.6년전,나는경기도광주의시골마을로이사를했다.셋집살이를벗어나고싶다는생각에앞뒤안가리고덜렁작은집을지어거처를옮긴것이다.이사를앞두고아내와나는희망에부풀었다.뒤란밖으로곧장산에오를수있다는점이얼마나좋았던지.이사를하기도전에종로의중앙지도에가서우리동네의2만5천분1,5만분의1축척의지형도를사서먼저도상에서지형을익혔다.
가족들이함께,지형도에표기된작은호수를찾아가고,길표시도없는능선길을따라,어린두딸의손을잡고야트막한산들을걸어다녔다.봄이면겨우내쌓여있던낙엽을뚫고원추리가솟아오르고희미한안개처럼진달래가번져가는광경을얼마나반겼는지모른다.인적이드물었던마을산들은능선을따라잡목과풀들로군데군데지워지긴했어도희미하게나마끝없이길이이어져있었다.거미줄을걷어내가며주변봉우리들을하나씩밟아가던그무렵,마을에서가장높은,이천과광주의경계에있는천덕봉에오르면멀리남한강이유장하게흘러가는모습이가슴을후련하게해주었다.현관문앞에서등산화끈을묶고마을을가로질러천덕봉에오른뒤능선을타고집뒷산을넘어뒤란으로돌아오는길은네시간은족히걸리는만만찮은등산길이다.
게다가,천덕봉아래8부능선쯤에동학의2대교주해월최시형선생의묘가있다.서른즈음까지도우리는,이렇게저렇게일본군과관에의해30만명이나살육을당했다는갑오년의봉기를반외세반봉건계급투쟁으로만이해했던것같다.게다가처음부터좀더화끈하게봉기를선동하지않았던해월선생에대해서는떨떠름한반감마저가졌던것도사실이다.나이마흔을넘어천덕봉을오르내리며생각한다.한순간싸움에자기를내던지는일은어찌보면쉬운일일수있다.그러나수모와굴욕을오래감수하면서마음속깨달음을일관되게실천하는일은예사로이행할수있는일이아니다.
여자와아이를가축이나다를바없이천대하던19세기조선에서“아이를치지마시오.아이도한울님을모신귀한존재이니아이를치는일은한울님을치는일이요”한해월선생의말씀을두고두고되새기게된다.뿐만아니라양반과상놈이다른세상인종처럼차별되던세상에서,그완고한상식의벽을훌쩍뛰어넘어모든사람이하늘이라고한말은가히천지개벽의혁명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그는무려38년동안이나산길을밟으며관의추적을피해다닌도망자였고,여느평범한사람과다를바없는모습으로죽어갔다.어쩌면그의수많은깨달음의말씀보다더큰울림을주는대목이다.
인생의순간들마다나와함께했던기억조차못하는수많은작은산들이있었을것이다.조금도잘난것없는우리와닮은모습으로일상의공간에뒤섞여있는낮은산들을걷는일은알피니즘과조금도인연이없는일일수도있다.그러나삶의공간에서몇발자국만벗어나도전혀새로운시선으로스스로와주변을물끄러미바라볼수있어그산을걷는일이좋다.그것이명상이니수행이니하는일들과크게다른일도아닐것이다.아무리높은산도그산줄기의끝자락을지키고있는낮고얕은산에서시작하여산을오른다.그래서낮은산의깊은울림을느낄수있는것이다.
/글김성희모심과살림연구소·/[월간마운틴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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