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켐프등산학교 전두성 교장
[이클라이머의삶]열린캠프등산학교교장전두성

“등반은道를닦는과정이다”

전두성씨(田斗聖·55)는산이인생의전부였다해도될만큼산과더불어살아온산악인이다.67년배낭여행때오른한라산을시작으로,고교산악부와대학산악부,고교시절(69년)입회한어센트산악회와대학시절(73년)입회한한국산악회활동을통해30여년간山인생을이어왔다.자신의산행에만만족하지않았다.그가아는등산지식을나누기를즐겼다.대학산악부지도강사,코오롱등산학교,한국산악회등산학교강사등을통해서였다.

여러해동안등산학교강사를하거나운영해나가는사이주관과카리스마가뚜렷한그와등산학교를운영하는주도업체나산악회와갈등이생겼다.그럴때마다한동안심한가슴앓이를했다.그래도주저앉지않았다.매순간툴툴털어버리고오뚝이처럼일어났고,지금도열린캠프(cafe.naver.com/frcamp)등산학교와훈련센터를운영하고있다.

어려선배우는재미,나이들어선가르치는즐거움

7월13일오후6시30분경우이동에서시작된산행도열린캠프산행이었다.그는‘길이끝나는데서부터시작된다’는등반행위의원칙을지키려노력하고있었다.이날묵기로한백운산장까지는무당골좌측능선을따랐다.공원법상통제구간이었다.중간중간길도희미했고,능선길은험한바위구간이자주나타나애를먹였다.일행인김기용(정규반18기),양훈(19기),임중빈(21기입교예정)세사람은아직새로운길을여유럽게오르기에는산행경험이적다싶었다.앞장선전씨는적당한바위에앉아쉬고있다가일행이뒤쫓아오면합류하여다시오르기를반복했다.해가완전히넘어가면서산에는어둠이몰려들었지만산아래불빛이점점또렷해지다가점차휘황찬란해졌다.

“북한산을40년가까이다녔을텐데지금도좋은가요?”

“학교방침이못마땅해고3때학교를안다닌적이있어요.반면산은그만둘생각을한적이단한번도없어요.어렸을때는짓궂은선배들의속박을견뎌야했지만,그래도나만의자유가있는곳이산이었으니까요.지금도마찬가지예요.북한산은더많은자유를주는것같고요.바위가있잖아요.어렸을적엔배우는재미였다면지금은가르치는즐거움에빠져있다는표현이맞을것같아요.

내가아는것을필요한사람과나눈다는기쁨이겠죠.물론좀더재미있는등반법을창출하려고애를쓰고있어요.”고교입시를코앞에둔67년중학교3학년때배낭싸들고무전여행에나섰을만큼방랑벽을타고난그다.떡본김에제사지낸다고한라산까지올랐다.그렇게싸돌아다니기를밥먹듯했으니공부를제대로했을리없었다.한해꿇었다.그리곤69년중대부고에입학했다.

당시서울지역골수산악회들은인수파와선인파로나뉘어등반을했다.특별한이유는없었다.단지익숙한바위에서만족하고지냈을뿐이다.60년대말바위입문첫단계가대부분그렇듯이그역시군용워커를신고허리에둘러감은슬링에걸린카라비너에군용자일을걸고남측뜀바위코스부터올랐다.“알피니즘은만년설이있는알프스에서태동했습니다.우리나라는겨울외에는눈도얼음도없어요.

그런환경차이때문에우리나라는암벽등반이알피니즘을추구하는행위로대체되지않았나싶어요.”완전히어두워진8시30분경백운산장에도착한일행이장맛비로불어난계곡물에땀을씻고오는사이그는자신의등반철학에대해언뜻비췄다.“모험등반은어찌보면더욱나은인간이되기위한수련과정이아닌가싶어요.자연속에서용맹정진하는도인들처럼클라이머들은암빙벽등반을통해자아를찾아가는거죠.”

▲생일을맞은임중빈씨(오른족에서두번째)가전두성씨의축하연주에활짝웃고있다.

이날밤마침일행중임중빈씨는생일을맞았다.산장앞마당테이블위에차린‘잔치상’이래봤자초코파이에가느다란초몇개꽂고가벼운안주에양주한병과소주몇병이전부였다.우크렐레반주에생일축하노래가나오자전두성씨와고교동창인임중빈씨는“전선생이고등학교때부터우크렐레를가지고다녔는데,그악기에맞춰내생일파티송을부르게될줄은몰랐다”며즐거워했다.그는어린시절부터우크렐레를치며노래부르기를좋아했다.

이날밤에도얘기를나누다가도틈만나면산노래를부르고,요들송도불렀다.“산노래와우크렐레는정말잘어울려요.가능한한조용히,여럿이서화음을넣어가면서불러요.산노래를통해사람들끼리화합하는법을배우는거죠.”11시쯤올라온양승현씨(8기)는4년만에모습을보였고,안주가떨어질때즈음노승헌씨(4기)는골뱅이무침을싸들고올라왔다.

전원산장에서머물기로했으나강북청소년수련원생30명이올라온다는얘기를들은뒤자정을넘어서자열림캠프회원들은모두들백운산장뒤쪽능선으로올랐다.남쪽바다에서바람이세차게불어냈다.폭풍이올라오고있었다.그런데도새벽1시안팎에도착한김경태,윤성택씨까지도기꺼이비박에합류했다.

▲88년늦가을40피치연장등반을마치고인수봉정상에서손덕규씨와함께비박중인전두성씨.

꼭두새벽에설마등반하랴했는데새벽5시가되자모두들일어나인수봉으로향했다.열린캠프는매주산행을금요일밤산에서만나하룻밤같이지낸뒤이튿날새벽부터등반하는식으로진행되고있었다.모든먹거리는저녁한끼외에는모두행동식이었다.알피니즘에입각한등반을하려면일찍움직여야한다는생각때문이다.어제생일파티의주인공인임중빈씨는3개조중기존B코스조의선등을맡았고,현역준사관인윤선택씨를선등으로전두성씨와기자가함께등반했다.

“중대부고산악부원은자연스레어센트산악회회원이되었어요.그래서선인봉과주봉등도봉산일원의바위는실컷다녔어요.선인파였기때문이죠.그러다어머니께서대학에들어가기만하면산에다니는걸허락해주겠다하여72년광운공대에합격하자마자산악부에들어갔죠.그제서야인수봉을오를수있게되었답니다.”젊은날그는열정적으로등반활동을펼쳤다.고교시절주말이면선인봉으로달려갔고,방학대부분을설악산에서지냈다.

고등학교2학년때토왕빙폭등반대에참가할정도로열성적이었고,대학1학년때설악산백운동일원의개척등반에참가하는가하면,73년서북릉~백운동계곡~용아장성~화채봉연결등반,74년동계천화대개척등반,77년천화대~1275m봉리지~설악골~잦은바위골연결등반등을해냈다.동계천화대리지등반은동계초등으로일컬어지고있다.그는무엇보다주어진환경에서그가생각해낼수있는가장어렵고힘든산행을추구해왔다.81년토왕빙폭과우벽연장등반도그런개척정신과도전정신에서시도했던것이다.

고난은업그레이드되기위한과정이다.

“토왕빙폭은77년초등이후다섯번째완등이었어요.잘진행되다막판에사고가나고말았죠.선등자인김명춘이밤11시경상단을끝내고후등자가올라오기를기다렸는데,후등자인신동우가어센더로등반하다얼음이끼어작동이잘안되자자력으로등반하다추락하고말았던거죠.”60m추락이었다.자일을고정시켜놓은나무가부러지고,신씨가자일에매놓은푸르지크매듭이끊어지는바람에추락거리가컸다.

그래도충격이많이완화되는바람에부상을당하지않은신씨는자력으로중단까지내려와구조차올라온대원들을만날수있었다.하지만상단에있던김명춘씨는구조대가올라올때까지악몽같은시간을보내야했다.새벽서너시면도착하리라예상했던대원이도중에길을잃는바람에상단에도착한것은아침8시나되어서였다.“고교시절토왕폭등반에참가했다가심부름만한게오래도록가슴속에응어리져있었어요.

그래서당시고등학생인동우를등반조에참가시킨거랍니다.동우는다행히괜찮았지만발가락을다섯개나잃은명춘이를보니정말산이싫어지더군요.300만원이넘는병원비를구하는일도정말힘들었어요.자비와후원금으론절반도못메웠어요.그래서그3년전안나푸르나4봉원정때남은장비와귀국길에일본에서사온장비까지몽땅팔고,막입사한회사에서받은봉급의3분의2를석달동안보태야했죠.리더라는게함부로할게못된다싶었어요.몇년전미국에서명춘이를만났을때얼싸안고한동안울었답니다.옛날일이생각났던거죠.”

열정을다받친그에게히말라야등반의기회는비교적일찍왔다.78년대학4학년때그는한국산악회안나푸르나4봉원정(대장전병구)에참가했다.그등반에서1차공격의기회는선배인유동옥씨(크로니산악회)에게주어졌고,그는지원조이자2차공격조였다.그러나C3(7,000m)까지동행한대원은컨디션저하로,셰르파는버너를켜다화상을입는바람에내려가등정후하산길에비박하고내려오는공격조를홀로맞아야했고,C3를철수하는것으로등반도마쳐야했다.

▲90년안나푸르나남벽베이스캠프에서기념촬영한어센트산악회원정대.앞줄가운데가전두성대장.

90년에는어센트산악회원정대를이끌고안나푸르나주봉에도전했다.87년해외원정을머릿속에그릴때는대상지가요세미티의거벽이었으나4봉원정대장이었던전병구씨의권유로대상지를바꾼것이다.“엘캐피탄같은거벽등반에대비해인수봉40피치연장등반을했어요.홀링과어센딩연습을많이했답니다.홀링색이없어플라스틱박스를잘라배낭겉에대고,직선루트만연결등반했지만경사가죽다보니끌어올리는데정말힘들었어요.

이틀쯤하고나니대원들대부분체력이떨어지면서정신적으로피폐해지고신경이날카로워지더군요.”대상지가히말라야로바뀌면서훈련방법도바꿨다.이듬해겨울한라산서북벽에서남벽을잇는나선형등반을하고,매주하중훈련에중점을두었다.대원이14명인대규모원정대를위한경비를마련하는일은힘도들었지만재미도있었다.후원금과대원참가비로도경비가마련되지않자티셔츠를만들어팔고,협찬받은장비를팔기도했다.

안나푸르나4봉등정한도풀겸해서나선원정이었건만뜻대로풀리지않았다.의욕이넘쳐너무일찍원정에나선게무엇보다큰걸림돌이었다.가을시즌이시작되었는데도몬순은한동안지속되었다.C3(6,200m)를구축한뒤보름이넘도록폭설이퍼부었다.그눈이결국등반에치명적인눈사태를일으켰다.“C3상단의거대한스노돔이반쪽은루트를쓸어버리고,반쪽은C2를매몰시켜버렸죠.C3위에데포시켜놓은빙벽장비는당연히사라졌죠.”

다행히캠프에머물고있는사람이단한명도없어인명사고는피했다.빙벽장비는마침베이스캠프를방문했다막하산한구소련산악인들을좇아내려가구입할수있었으나,이중계약을맺었던사다가도중에떠나는바람에셰르파통솔에문제가생기고,대원들은원정기간이늘어지면서점차의욕을상실해갔다.결국C4직전해발6,800m지점에서원정을접어야했다.99일간의원정이었다.

“부자지간일지라도한달이상여행하지말라는이탈리아속담이있죠.그렇게오래도록산악회생활을함께해왔는데도시간이흐를수록갈등이심해지더군요.세대차이,고소와환경에서오는의지력저하등등,원정을끝마치고도몇년간대원들간의갈등이지속되곤했으니까요.이것도한단계올라서기위한과정이라면과정이겠지마는요.”

40년동안변하지않는벙거지에청바지차림

40년가까이산에다녔으면타이즈처럼맵시있거나컬러풀한복장을갖추었을법한데도그는도시에서그렇듯이바위복장도벙거지를뒤집어쓴채청바지에낡아빠진남방이나윈드재킷이전부였다.바위를오르는모습도세련되지는않았다.저벅저벅걷는것같았다.이런복장은있는그대로가좋아서라고했다.

▲95년만장봉정상에서마라토너황영조씨에게하강법을가르치는전두성씨.

그는산에입문한지9년째인76년부터산악지도자로서활동을해왔다.76년수도여자사범대학과세종대학산악부지도강사를시작으로한국산악회산간학교와클라이밍스쿨강사,국립경찰대학산악부지도강사,코오롱등산학교강사·동계반대표강사를거쳐1998년부터2002년까지는한국산악회등산학교를개설하고운영을책임져왔다.2003년한국산악회등산학교와인연을끊으면서새로창립한게지금그가운영하고있는열림캠프등산학교다.

그는광운공대통신공학과를나와83년부터89년까지당시첨단기업인삼보컴퓨터에서도잘나가는개발팀과신규사업개설팀등에서근무했다.그러나히말라야등반을위해과감하게사표를썼다.그게90년안나푸르나남벽원정이었다.귀국후계열사에서몇해동안근무했지만모회사에서근무하던그에게계열사의환경이마음에들리없었다.91년퇴사직후그는산악단체에서행정가로서10여년간일해왔다.

91년부터2002년까지한국산악회안전대책위원장겸이사와한국산악문화회관관리책임역을함께해내면서92년부터98년까지한국대학산악연맹이사겸사무국장도맡았다.그사이산악박물관과산악도서관을개설하고관리하는가하면산악정보자료집을발간하고,그의오랜꿈이었던산노래책자‘산이야기’를발간하기도했다.그와더불어열정을다받친게등산학교였다.하지만그는코오롱등산학교도그랬고,한국산악회등산학교도주도업체나산악회와의갈등끝에인연을끝내야했다.

“산이전부라고생각하고지내온나에게모든것다빼앗고잠시머물다아무렇지도않게가버린셈이다싶었죠.정말화가났어요.지금은괜찮아요.그덕분에열린캠프가탄생했잖아요.인간만사새옹지마란게바로이런거구나싶어요.그동안등산학교와산악회로인한시련역시결국은더나은단계로올라서기위한또하나의과정이다싶어지고요.

▲93년한국산악회임원모임에서구인모씨부부(좌우측),손재식씨(왼쪽에서두번째)와산노래를연주중인전두성씨.
한국산악회등산학교동문들의후원금으로강남제1번지라할수있는서초동에훈련센터까지갖춘열린캠프등산학교는군인경찰대학생신부수녀승려등참가하는층이다양하다.잊혀져가는60년대산악스타들도많이이용하는실내암장이기도하다.

▲전두성씨는등반은사람다운사람이되기위한수련과정이라고말한다.

“저는등반을참인간이되기위한수련과정이라고생각해요.쾌락적인데너무탐닉하다보면목적으로착각할수있어요.등반을두고무상의행위니숭고한행위니하는표현에대해동조하지도않는답니다.레저나스포츠화하는경향도못마땅하고요.등반은어디서건죽음이상존하는행위잖아요?등산학교는산에서의위험을일깨워주고,스스로자신을지킬수있는능력을키워주는역할을해내야한다고생각해요.산이주는가치,알피니즘이라는모험을일깨워줌으로써인간의역할을다시한번인식시켜주는역할도해야겠고요.”

그는철저한원칙론자이면서도산은자유로워야한다고말한다.“교육생들이등산학교를통해사회에서쌓인스트레스나콤플렉스를풀고,또세상이살만하다는것을새삼깨달아가는모습을보면정말즐거워요.등산학교교육도참가자의자유로움에근저를두고있어요.제시하되강요하지않으며,스스로깨닫게도와주는역할만하는거죠.동문산악회를만드는것도반대예요.

산악회를조직하다보면틀을갖추고유지하려애쓰게되고,그러다보면본말이전도되는경우가많죠.무엇보다배타적으로변한다는게나쁜점이고요.”그는등반은자아를찾아가는과정이자사람다운사람이되기위한자기수련과정이라일컫는다.“원정이끝나고날때마다많은것을깨닫곤했답니다.등산학교도그렇고산악문화회관을그만둘때도그랬어요.세월이지나고나니다른사람에대해서도그렇지만나자신에대해많은면을되돌아보면서반성하곤한답니다.섭섭했던점도많지만나스스로잘못한것도많지않았나생각도하고요.스스로발전하는거죠.”

대슬랩2번코스와검악B코스를거쳐기존B코스로진입한전두성씨조는아미동상단에서일행10명과모두합류한다음정상까지신속하게밀어붙였다.오전10시,등반시작후4시간이지났다.그는“군인의목표가전투나전쟁이아니라국가와민족을위해총을쏘는것이듯초기엔등반자체가목적이었지만지금은등반의목적은인간정신추구라고생각한다”고말했다.

“산은자연의한자락이랍니다.역으로저는그산을통해자연을깨닫고있는거죠.알피니즘은산을통해모험을추구하고,자아를찾는수단인것같아요.아무튼산은참좋은것같아요.무한한꿈을주지요,도전의기회도주잖아요.언젠가‘신선도’를보면서문뜩깨달은게있어요.절벽위너럭바위에신선두사람이앉아장기를두고,동자는차심부름을하는데그아래선필부가넋을잃고쳐다보고있는그림이었죠.제가그신선처럼살아온게아닌가싶어요.”

/글한필석차장대우/사진허재성기자/월간산[454호]2007.08.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