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1] (1962~1976년) *-

한국히말라야원정사[1]1962~1976년

*30년성장기거친한국의근대등산운동

한국에있어서근대적의미의등산은1920년대중반을그시작으로보는견해가우세하다.1931년에는일본인들이중심이된조선산악회가창립되면서서구적근대등산의개념이전래되었고이러한일본인들의활동에영향을받은한국인들이모여1937년백령회를결성하기에이르렀다.이로부터1945년까지는백두산,금강산,설악산등국내명산에대한하계개척등반과서울근교의암장에대한초등반이성행하였다.


해방이후에는한국산악회를중심으로남한의산악지대에서국토규명학술조사와산맥종주가이루어지면서일반등산인구도점차확산되었다.암벽등반도
서울근교인수봉,백운대,선인봉,노적봉,우이암,주봉등지의암장에서활발히진행되었다.60년대에들어서자전후복구사업이거의끝나가고사회적으로안정권에접어들면서국내등산활동은더욱활발해지기시작했다.

학생산악단체는물론일반산악단체의수도급격히불어났고등반수준도향상되어갔다.도봉산선인봉에박쥐코스가개척되는가하면(60년9월)인수봉북서면오버행(60년9월)이초등되는등새로운바리에이션루트에관심을가지게되었으며설악산,지리산,한라산등지에서의극한등반이성행하였다.서구의등산사와비교해볼때60년대한국산악계는적어도국내산과서울근교의암벽에대한고전적등반활동기에서는벗어나기시작했다고볼수있다.

이렇듯1930년경부터본격적으로시작된국내근대등산의발자취는30여년에걸쳐국내산에대한초등기를거치는동안새로운등반방식과등반루트에대해눈을뜨게되었다.그리고급기야는그러한욕구가해외의새로운높이의산에대한갈망으로변해갔다.한국산의낮은높이와그좁은활동범위는이제불붙기시작한근대등산의실천무대로서한계가있었기때문이다.

*한국,히말라야의장을열다.

1962년의히말라야는1950년부터시작된8천미터급초등정행렬이거의끝나가고있을때였다.이미14좌의자이언트봉중에서죽의장막에가려져있는시샤팡마(8,027m)를제외하고는13좌가모두초등정되었던것이다.또한가까운일본만하더라도1956년마나슬루세계초등정으로불붙은히말라야원정의열기가한층고조돼매년10여개의원정대가히말라야를찾고있을때였다.세계산악계의이러한활동은당시고전등반방식에서탈피하려는국내산악계를자극하기에충분한것이었다.

*다울라기리2봉으로국내최초원정

경희대학교히말라야원정대

1960년경당시경희대산악회의주축회원이었던박철암은한국최초의히말라야원정을계획하고네팔의중부에있는다울라기리산군에서그대상을찾았다.이때까지다울라기리1봉(8,167m)은미등정인채로남아있어여러나라에서눈독을들이고있었다.다울라기리2봉(7,751m)은일찍이1905년영국의유명한산악인롱스탭박사가서부네팔의아피(7,132m)와남파(6,755m)에이르는접근로를찾기위해이산의북쪽산줄기를통과하다가발견한산이다.

그후1950년네팔히말라야가해금된직후프랑스의모리스엘조그가북동방면으로정찰한바있다.또54년에는영국의로버츠대가,55년에는독일대가,그리고55년과58년에일본대가각각정찰을한바있지만모두가북쪽으로만시도했을뿐이산의남쪽내원으로는아무도접근하지못하고있었다.

경희대산악부측은문교부,외무부등관계기관을찾아동분서주한끝에62년3월에야정찰등반만하기로약속하고문교부의승인서를받아낼수있었다.그리고5월30일에는고대하던입산허가서를네팔정부로부터얻어냈다.이리하여한국최초의히말라야원정대는1962년8월15일역사적인장도에올랐다.

대원은박철암대장(38),주정극(38),송윤일(27),김정섭(27·당시우석대전신국학대생)등4명으로구성되었고원정경비약110만원은학교측의지원과동아일보사의후원으로어느정도마련되었다.일행은일본에서고산장비와식량을구입하고방콕을거쳐8월22일인도의캘커타에도착했다.그곳에서8월초에미리선박편으로보낸300킬로그램의장비를우여곡절끝에통관하고8월27일에야네팔의수도카트만두에도착할수있었다.

정찰대는이곳에서4명의셀파와1명의쿡을고용하고9월4일30명의포터와함께네팔제2의도시포카라를출발하여카라반을개시했다.여기에서다울라기리의남쪽계곡마양디강을거쳐정글지대를헤치고수차례협곡을건너2봉의남쪽산록460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설치한것이9월22일.카라반을시작한지19일째되던날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관찰한다울라기리2봉의남면은하단부에급경사의암부가가로막혀있어마양디빙하에서는등반이불가능하게보였다.오직다울라기리5봉쪽으로그단애를우회하여야만등반이가능하리라판단되었다.이곳에서정찰대는20일간에걸쳐5,100미터(10월2일)와5,950미터(10월10일)지점에2개의캠프를설치하면서마양디빙하와다울라기리2봉등반루트를탐색했다.

그리고10월11일에는마양디빙하상단6300미터지점에3캠프를설치하고박대장과송대원이2명의셀파를데리고그날로6700미터의무명봉을등정하고돌아왔다.이들이등정한무명봉은독립봉이아닌다울라기리1봉의주능선북동쪽의한봉우리였으나정확한자료는없고일본판<외국산명사전>(1984년삼성당간)에는‘6,599미터의무명봉등정’으로기술되어있을뿐이다.

후에박대장은무명봉의높이에대해‘고도계가고장나서정확한고도는알수없었고셀파와의논해서6700미터로결정했다’고밝혔다.이로써한국최초의히말라야원정은다울라기리산군의남쪽접근로의발견과6천미터급무명봉등정이라는성과를얻고막을내린다.

*네팔해금후재개된본격히말라야원정

다울라기리2봉정찰이있은후경희대산악부는본원정을시도하지못했다.정찰결과2봉남쪽으로는등반이불가능하다는결론을내렸고,다시원정경비를마련한다는것도당시로서는어려운일이었다.그러던중네팔정부가중국과의국경분쟁으로인해65년부터네팔히말라야에외국인의입산을잠정적으로중단한다는조치를발표했다.당시한국산악인의유일한히말라야의관문이었던네팔히말라야가봉쇄됨으로해서당연히후발원정도이어지지못하게되었다.네팔정부의입산금지조치는4년뒤인69년에가서야해제되었다.

해외원정에있어서는일본의북알프스나대만의옥산원정이잇따랐으나유럽이나히말라야의고봉원정은지리적으로멀고그에따른경비조달의어려움때문에쉽게이루어지지못하고있었다.하지만대부분의국내훈련등반대나일본,대만원정을떠나는단체들은그최종목표를만년설의고봉등정에두고있어서히말라야원정에대한욕구는점차달구어져가고있었다.69년2월한국산악회히말라야원정훈련대가설악산죽음의계곡에서,눈사태로10명의대원을잃는사고가있었으나‘하얀산’에대한동경을잠재우지는못했다.

*등정시비에휘말린추렌히말세계초등정

한국추렌히말원정대

1969년네팔히말라야가해금되자국내여러단체가원정을추진하기시작했는데,그중에서도가장먼저원정대를꾸린것은한국산악회였다.1970년창립25주년기념사업의일환으로히말라야원정을추진하기로한한국산악회는이를위해69년9월김정섭(34·하켄클럽)과오인환(24·동국대,양정산악회)을네팔로보내추렌히말(7,371m)과푸타히운출리(7,246m)의등로를정찰하고돌아오게했다.

그결과대상지는이때까지미등인채로남아있던추렌히말로결정났고다음해3월본원정의결실을본것이다.원정대는김정섭대장을비롯해서김호섭(27세·김정섭의동생),전병구(26·어센트산악회),한이석(26·연세대),김기섭(23·김정섭의동생)등등반대원과후원처인조선일보사에서파견한이규태기자를포함해총6명으로구성되었다.

추렌히말은네팔중부에위치한다울라기리산군의서쪽7번째봉우리로같은높이의동봉,중앙봉,서봉으로이루어진산이다.추렌히말(ChurenHimal)의‘추렌’은티베트어로‘내(川)의원류’,그리고‘히말’은‘눈(雪)’의의미를가지고있다.이산은다울라기리산군의여러봉우리중에서도가장독립봉다운용모를지니고있어54년영국의로버츠일행이최초로정찰한이래62년에일본대가,69년엔이태리대가등반을시도했지만세개봉중어느것도등정되지않고있었다.

62년경희대의다울라기리2봉원정이정찰이목적이었던것에반하여등정을목적으로한국내최초의원정대인한국추렌히말원정대는70년3월선,후발대로나뉘어네팔로집결하였다.그리고4월7일5명의셀파와40명의포타를거느리고포카라를떠나9일간의카라반끝에카페빙하말단부4,10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설치했다.4월16일등반을개시한원정대는그날로1캠프(4,700m)를설치하고19일에2캠프(5,230m),22일에3캠프(5,650m),25일에4캠프(5,980m)를구축했다.

그리고다음날인26일엔5캠프(6,400m)를설치했고이틀뒤인4월28일마침내추렌히말동봉을초등정하는데성공했다.새벽5시30분마지막캠프를출발한김호섭대원과린진왕겔셀파는11시간동안고도차971미터를극복하고등정에성공한것이다.이것은한국최초의히말라야7천미터급고봉등정인동시에세계최초의추렌히말등정으로,이소식을접한국내산악계는물론일반국민들까지도찬사를아끼지않았다.

그런데이등정은같은해가을(포스트몬슨기)이산의서봉과중앙봉을초등정한일본원정대에의해강한의문이제기되었다.일본대도동봉등정을시도했으나루트의어려움으로인해서계획을변경해서봉과중앙봉만을등정했다는것이다.그러면서여러가지자료를제시하며한국대의동봉초등정에의문을제기했다.일본인들의이와같은의혹을접한한국산악계에는커다란파문이일기시작했다.

산악계와온국민의성원속에서전국순회사진장비전시회까지마친역사적인세계초등정의기록이의심을받게된것이다.일본대의의혹에대해당사자인한국원정대에서도여러차례반박을했지만해명이미흡해수차례의공방전만거듭되다가등정진위를확인하지못한채해를넘기게되었다.이렇듯한국최초의히말라야등정은한국최초의등정시비를남긴채끝나고말았다.

*대원추락사로끝난1차마나슬루원정

서울신문사마나슬루원정대

구미산악인들이8천미터급자이언트봉의초등정을앞세워히말라야로진출한것과같이한국산악계도1971년부터는8천미터급산등정을목표로원정대가결성되기시작했다.이때까지국내의히말라야원정은62년다울라기리정찰과그로부터8년뒤인70년에추렌히말원정이있었을뿐아직개척초기단계를벗어나지못하고있었다.이미세차례의원정경험을가지고있는김정섭은74년을에베레스트등정의해로잡고그에앞서8천미터급등반경험을쌓기위해마나슬루원정을추진한다.

마나슬루원정대는김호섭대장과김인식,한이석(26·연세대),최창돈(25·전남대),김기섭(24),김정심(여·30·대구청산회)등6명의대원에서울신문사에서파견한이종기기자가추가되었고,김정섭은사무장으로원정대를지원하기로했다.71년1월26일선발대출국에이어2월26일본대가,그리고3월1일김정섭이속속네팔에도착했다.3월20일에는나머지대원들이50여명의포터와함께카트만두를떠나3월31일해발4,300미터의베이스캠프에합류했다.이때는이미선발대에의해1캠프(5,000m)가설치된뒤였다.

전력이보강된원정대는4월7일에는2캠프(5,940m)를,그리고4월10일에는3캠프(6,700m)를설치했고이어서4월15일에는7,100미터지점까지진출,설벽을깎아4캠프를세웠다.이곳에서날씨가악화되자더이상전진하기가어려웠다.4월20일에는잠시날씨가호전된틈을타서김기섭대원이셀파와함께1차정상공격을감행했지만7,800미터지점에서기상악화로후퇴했다.그리고2차정상공격을위해김기섭,김인식,김정심대원이베이스캠프를떠났지만5월1일눈사태로제4캠프에서다시후퇴하고말았다.

김호섭대장은마지막기회로자신과동생김기섭대원을정상공격조로정하고5월3일4캠프로올라갔다.두대원은산소를사용해하룻밤을지낸후다음날7,600미터지점까지올라가5캠프를설치하는데성공했다.그러나이곳에서불의의사고가발생했다.대원들이텐트를설치하고잠시머무르는사이갑자기일기가급변하여돌풍이몰아쳤다.이순간김기섭대원이돌풍에휘말려40미터아래의크레버스에추락,사망하고말았다.한국히말라야원정사상최초의조난으로기록된이사고로인해정상등정은좌절되고4개월에걸친마나슬루원정은마감되었다.

*8천미터에서돌아선로체샤르원정대

대한산악연맹로체샤르원정대

한편대한산악연맹의로체샤르원정대는3월17일서울을출발하여원정길에올랐다.정부보조(8백만원)와한국일보사의후원(2백만원)으로꾸려진이원정대는62년다울라기리원정대를이끌었던박철암대장(47)을비롯해서강호기부대장(31·대산련이사),하세득(30·경희대),최수남(30·하켄클럽),김인길(29·설령산악회),장문삼(29·반도산악회),권영배(27·전북연맹),박상열(27·경북산악회),양승혁(52·대산련전무이사),김초영(48·서울시련이사)대원과한국일보사에서파견된김운영(38)기자등모두11명으로구성된대규모팀이었다.

로체샤르는1921년영국의1차에베레스트원정대에의해발견된이래60년힐라리가이끄는뉴질랜드대에의해6,700미터까지시등된후,1965년일본대가남동릉으로8,150미터까지올라섰으나예기치못한200미터의암벽을만나후퇴하고,70년5월에야오스트리아대에의해초등정된산이다.로체샤르(LhotseShar)의‘로체’는티베트어로‘남쪽‘을의미하는데‘샤르’는다시동쪽을가리키는말이기때문에결국은에베레스트를중심으로‘남동쪽에있는봉우리’란뜻을가지고있다.

대한산악연맹에서히말라야원정계획을수립하던70년은이미8천미터14좌는모두등정된뒤이고위성봉취급을받고있던로체샤르와얄룽캉만이아직미등인채로남아있었다.대산련은이중에서로체샤르쪽으로목표를정하고원정준비에들어간것인데불행히도그해5월12일에이봉우리마저오스트리아대에의해초등정되었다.로체샤르의두번째등정을노리고네팔에도착한한국원정대는경비행기편으로루크라(2,800m)까지물자를수송한후4월3일8명의셀파와3명의쿡,그리고2명의메일런너와함께74명의포터를고용해카라반을개시했다.

원정대가셀파의본고장인남체바잘(3,440m)을거쳐로체샤르의초입이라고할수있는추쿵(4,730m)에이르렀을때권영배대원이급성고산병으로혼수상태에빠지는사고가발생했다.그래서다음날5명의대원이권대원을후송하기시작해4월10일남체바잘에서헬기편으로카트만두의병원으로후송해야만했다.그러는동안에도나머지대원들은등반을속개,4월12일에1캠프(5,700m)를설치했다.그러나짙은개스와눈보라가전진을지연시켜4월22일에야2캠프(6,200m)를건설할수있었다.

이곳부터는톱날같은설릉이동남릉으로길게이어져있었는데눈과얼음이혼합되어있어등반하기에어려움이많았다.원정대는이구간을‘검룡능선’이라명명하기로했다.3캠프는5월3일전년도에오스트리아대가사용한것으로보이는설동의30미터위에있는75도경사의급사면에2시간의작업끝에겨우설치됐다.이곳에서박상열,강호기대원이다음날의4캠프루트공작을위해묵었는데기온이영하28도까지내려가고초속30미터의강풍이불어대수면을취하지못했다.

5월5일에는눈사태가3캠프를덮쳤으나두대원은다행히설동으로피신할수있었다.다음날박대원은최수남대원과교체되었고루트공작은계속되었다.드디어5월12일7,200미터지점에4캠프가설치되었다.그리고다음날최대원과상게셀파가정상공격에앞서피크38봉(7,589m)을오르기로하고출발했다.그러나막상플라토로올라서보니피크38봉은거리가멀어등정이불가능하게보였다.

두사람은로체샤르의정상을향해올라가보았다.약8천미터지점에이르자깊숙한갭(Gap)이전진을가로막았다.과거65년에일본대가돌아선곳이었다.여기서원정대는계속되는악천후와몬순을바로앞둔상태에서더이상등반이어렵다고판단,철수할결정을내리게된다.등반을개시한지50여일만의후퇴였다.

*히말라야등반사상두번째대조난

72제2차마나슬루원정대

마나슬루에서동생김기섭을잃은정섭,호섭형제는71년5월귀국즉시2차원정대를결성하기위한작업에들어갔다.총대장은김정섭(39)이맡기로하고등반대장에동생김호섭(29),고김기섭대원의유해운구를맡을구조대장에서충길(35·동국산악회,김대장의매부),그리고등반대원에최석모(36·국회산악회),구신회(32·고령산악회),송준행(32·부산청봉산악회),연응모(31·반도산악회),오세근(28·조선대),김예섭(22·경기대,김대장의막내동생)등과기록영화촬영을위한카메라맨에박창희(41)와일본인야스히사가스나리(70년일본에베레스트원정대참가)를포함시켰다.뒤에후원처인조선일보사에서파견된윤병해기자가추가되어총대원은12명으로늘어났다..

2차마나슬루원정대가셀파22명과쿡4명,그리고메일런너3명과포터305명을거느리고마나슬루빙하말단부4,30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건설한것은72년3월11일.전년도보다20여일빠른도착이었다.3월14일등반을개시한원정대는그날로5,200미터까지올라가1캠프를설치하고일주일뒤인3월22일에는2캠프(6,000m)를,그리고27일에는김호섭대원이2명의셀파를데리고3캠프(6,500m)를설치했다.여기서부터계속되는폭설과싸우면서고전하다가4월7일에는4캠프(7,250m)까지전진하는데성공했다.이제정상까지의고도는불과900여미터밖에남지않았다.

4월8일3캠프에서는작전회의를열어정상공격일을5캠프를설치한직후인4월13일에서15일사이로정하고3개조의정상공격대원을결정했다.이곳에는셀파들도12명이나집결되어있어서날씨만좋다면3일내로정상공격이가능할것도같았다.그런데4월9일부터내리기시작한눈은폭설로변해다음날까지계속되었다.시간이지날수록적설량은더욱많아져1미터가넘는눈이모든캠프에쌓였다.이것은불행한사태를예고하고있었다.

이날밤거대한눈사태가3캠프를덮쳤다.정확히4월10일새벽3시,폭설의무게를견디다못한눈더미가6명의대원과12명의셀파가자고있는6동의텐트를쓸어가버린것이다.그곳에있던12명의인원중텐트밖에서제설작업을하고있던2명의셀파만이100여미터를눈사태에쓸려내려가다가구사일생으로빠져나왔다.이들은밤새깊은눈을헤치며2캠프로탈출해다음날조난상황을알렸다.망연자실한김정섭대장은2캠프에도눈사태가일어날것을우려해그곳에있던대원과셀파들에게1캠프로철수토록지시했다.

그런데3캠프의대원중에생존자가있었다.1캠프로하산하던대원들이5,400미터지점에서부상당한채움직이고있던김예섭대원을발견한것이다.김대원은즉시대원들에의해구조되어베이스캠프로후송되었다.2차마나슬루원정대를덮친눈사태는5명의대원(일본인1명포함)과10명의셀파등도합15명의인명을앗아갔다.이것은1937년독일의낭가파르밧원정대가제4캠프에서눈사태로당한16명의조난사고(대원7명,셀파9명)이후히말라야등반사상두번째로큰조난참사였다.특히김정섭대장은70년1차마나슬루원정에서김기섭대원을잃고또다시김호섭대원을잃어두동생을히말라야에묻어야만하는비운을맞았다.

*마나슬루,안나푸르나,에베레스트에서3파전

마나슬루에서대조난참사가있은후한국산악계의히말라야원정은3년간공백기를갖는다.로체샤르와마나슬루에서의잇다른패배는산악인들은물론원정후원자들로하여금보다심사숙고하게하는분위기를만들었다.특히5명의유능한산악인을잃은마나슬루조난사고의후유증은예상외로컸다.74년에이르러히말라야원정의열기는다시고개를들기시작했다.한국산악회가창립30주년을기념하기위한안나푸르나1봉원정을추진하기시작했고대한산악연맹은세계최고봉에베레스트원정을기획하기에이른것이다.

1975년,한국산악계에3년간의침묵을깨고히말라야발길이되살아나기시작했다.한국산악회가안나푸르나1봉을,대한산악연맹이에베레스트를,그리고두차례의쓰라린실패를맛본김정섭이다시마나슬루를목표로각기정찰대를네팔현지로파견했다.본래마나슬루대는75년에본등반을계획하였으나준비가여의치않아1년연기하기로하고우선김경배(30·피톤클럽),정병택대원(26·포항제철산악회)등2명만을네팔로보내입산허가신청을하고등로를정찰케했다.

*한국산악회안나푸르나정찰대

한국산악회창립30주년을기념한안나푸르나1봉정찰원정은한국방송공사와공동으로추진되어대원들은75년4월16일서울을떠났다.이정찰대는이은상회장(72)을비롯해서손경석대장(49),김항원(28),오인환(29),변유근(26),한정현(28)대원과방송공사의박춘병(36)기자,그리고이홍균(49)팀닥터를포함하여총8명으로구성되었다.이들은당초안나푸르나초등루트인북면을정찰할예정으로정식입산허가까지받아두었으나때마침그지역캄파족의반란으로대상을남벽으로바꿔5,300미터까지시등하고돌아왔다.

한편77년포스트몬순의에베레스트입산허가를받아놓은대한산악연맹은75년8월부터11월초까지쿰부히말라야지역을광범위하게정찰하고돌아왔다.최수남대장(35)을비롯한김인섭(32),고상돈(28),김병준(29),이원영(26),한정수(28),김운영(한국일보기자)등7명의대원이참가한이정찰에서대원들은아일랜드피크(6,189m)를등정하고푸모리(7,145m)의6,200미터까지등반했다.
3건의정찰등반으로1975년을넘긴한국산악계는3좌의8천미터급자이언트봉을목표로활발한본원정준비에들어갔다.그3좌의자이언트봉은마나슬루(8,163m)와안나푸르나(8,091m)그리고에베레스트(8,848m)로,국내산악계의관심은과연어느팀이‘한국최초의8천미터등정’의주역이될것인가에쏠려자못경쟁적인분위기가되었다.

*무기력하게끝난3차마나슬루원정

76한국마나슬루회제3차마나슬루원정대

한국산악인들이노리고있던3좌의자이언트봉중에서76년가장먼저원정대를맞이한것은마나슬루봉이었다.전년도에서1년이연기되어성사된3차마나슬루원정은강신호단장(49)의후원으로김정섭총대장(41),최석모부대장(38·국회산악회),김경배지원대장(30·피톤클럽),서충길등반대장(37),김예섭(25),이영진(28·동국산악회),김종욱(26·에코클럽),정병택(26·타이탄산악회),박재천(24.서울공대),최정철(25),홍건식(26),김도섭(25),김운영대원(43·한국일보)등13명으로구성된대부대였다.

그러나3차마나슬루원정은기상악화와팀웍부재로인해정상공격도하기전에7,700미터지점을최고도달점으로와해되고말았다.이로써한국히말라야원정의개척기를주도했던김정섭형제의세차례에걸친집념의마나슬루도전은16명의생명을잃고도끝내뜻을이루지못하고마감되었다.이마나슬루야말로한국산악인에게는집념의산이자비운의산으로남은채한국산악계에숙제로던져졌다.

한편안나푸르나를목표로원정을추진하던한국산악회도본등반을실현하지못하고다음해의프레몬순기입산허가를받고76년8월2차정찰대를파견했다.이원정에참가한전병구대장(34·한산이사)과김종욱대원(26·에코클럽)은안나푸르나북면루트를2개월간정찰하고10월29일에귀국했다.

-출처/www.himalayaz.co.kr/월간마운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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