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히말라야원정사[2]1977~1978년
*한국,최고봉에베레스트를등정하다.
대한산악연맹에베레스트원정대
75년과76년두차례에걸쳐에베레스트지역정찰을마친대한산악연맹은77년6월11일발대식을갖고공식적으로‘77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를출범시켰다.원정대장은당시대산련회장직을맡고있었던김영도(53)공화당국회의원이맡았고등반대장에장문삼(35),등반부대장에박상열(33·경북산악회),그리고이윤선(36·강원연맹),김명수(33·양정산악회),곽수웅(33·부산대륙산악회),고상돈(29),한정수(29·하켄클럽),이상윤(29·명지대),
김병준(28·한국외국어대),조대행(31·카톨릭의대),이기용(28·설령산악회),이원영(27·한국등산학교강사),도창호(26·동국산악회),김영한(30·대전쟈일클럽),전명찬대원(25·부산청봉산악회)과보도대원으로한국일보사에서파견한김운영(44),이태영기자(36)가참가해총인원18명이었다.이원정대의예산은모두1억3천여만원이었는데정부에서6천만원을지원받고나머지는한국일보사가나서서11개기업체의협찬을받아충당했다.
한국은최고봉에베레스트에도전하는10번째국가이자원정대로는25번째팀이었다.1953년부터77년에이르는24년동안에초등루트인남동릉외에북동릉(60년중국)과서릉혼바인꿀르와르(63년미국),그리고남서벽(75년영국)에새루트가추가되어있었다.그중한국대가택한루트는53년영국대가오른사우스콜을경유한남동릉이었다.원정대가카라반을시작한지21일만인8월9일,1진이5,400미터의베이스캠프에도착했다.이때는아직몬순기가끝나지않았으나원정대는등반기간을벌기위해8월11일부터등반에들어갔다.
이로부터26일만인9월6일8천미터지점의사우스콜에네번째캠프가설치되었다.극지법등반치고는빠른전진이었다.9월8일에는남동릉8,510미터지점에5캠프가설치되었고,다음날새벽6시30분,1차공격조로지명된박상열등반부대장과앙푸르바셀파가정상을향했다.그러나깊은눈을헤치며나아가자니예상외로많은시간이소모되었다.눈은올라갈수록깊어져10미터를전진하는데40분이나걸리는곳도있었다.오후1시50분에간신히남봉(8,763m)에도착한공격조는잠시휴식을취한후다시정상으로향했다.
그러나이미두사람의몸은고소에서의러셀로체력소모가커거의탈진상태에있었다.시간감각마저흐려져산소통의잔량을체크할판단력도잃었다.여기에다설상가상으로8,800미터지점에있는일명힐라리스탭이라는수직침니를막올라섰을때산소까지바닥나버렸다.정상을거리상으로불과100여미터놔두고체력의한계점에도달한두사람은오직살기위해서돌아서야했다.이때는오후5시가넘어해가기울기시작했다.탈진한두사람은남봉으로겨우돌아와데포해놓았던산소통을발견했으나벨브를열기력조차없었다.
8,600여미터의고도에이르렀을때앙푸르바가하산을포기하고누워버렸다.혼자힘으로는더이상움직일수없는상태까지이른것이다.여기서박부대장은비박을결심했다.거의탈진상태에서비몽사몽간에하룻밤을버틴두사람은다음날새벽날이밝아오면서200여미터아래있는5캠프를발견했다.만하룻만에구사일생으로되돌아오게된것이다.비록등정은못했지만두사람의비박은당시까지등반사상가장높은곳에서의무산소비박으로기록되었다.
김영도대장은절박한심정으로2차공격조로고상돈대원과펨바노르부셀파를지명했다.이제올려진산소는단한번의정상공격만을할수있는7통밖에남지않았기때문에좀더철저한작전과지원계획을세워야했다.9월15일,2차공격조로선발된고상돈대원과펨바노르부셀파는5시30분마지막캠프를떠나정상을향했다.이들은1차공격조가만들어놓은러셀자국덕분에비교적순조롭게전진을거듭한끝에오전9시30분남봉(8,763m)을통과했다.
1차때보다도3시간20분이나빠른운행이었다.두사람은힐라리스탭을넘고박상열대원이후퇴한그지점을통과하여오후12시50분마침내지구의용마루히말라야에베레스트정상에올라섰다.등반개시36일만의일이었다.이로써한국은세계에서8번째에베레스트등정국가가되었고,고상돈대원은58번째등정자가되었다.한국대가세운9월15일등정은포스트몬순기에서는가장빠른날짜로이기록은15년동안깨어지지않았다.
*한산,안나1봉에서4봉으로변경하여등정
한국산악회안나푸르나4봉원정대
한국산악회는75년안나푸르나원정을계획했었으나몇번의연기끝에78년에4봉으로목표를바꿔원정대를파견했다.최종선발된대원은전병구(36·어센트산악회)대장의지휘아래함탁영(39)부대장,유동옥(31),변유근(29),이명호(29),전두성(26)대원등이었다.이들은3월24일8명의셀파와78명의포터만을고용해2.2톤의물자를가지고포카라에서카라반을개시했다.대원들은해발3,720미터의카라반지점에서부터엄청난폭설로고생을거듭한끝에4월5일4,00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구축했다.
안나푸르나4봉(7,525m)은네팔중부의안나푸르나산군주능선상에있는봉우리로55년슈타인메츠가이끄는독일의소규모원정대에의해북서면으로초등정되었다.그로부터영국(57년),영국-인도-네팔합동대(60년),체코(69년),유고(69년),일본(70,73년),서독대(74년)가모두북서쪽으로등정했고76년에는독일대가최초로남면모디콜라를통해서등정,모두6개국에서9개대가올랐다.한국대는이산의10번째등정을노리고초등정루트인북서면을택해등반을개시했다.
4월7일에는1캠프(5,050m)가설치되었고,10일에는400미터의암벽지대를돌파해2캠프(5,640m)를,그리고15일에는3캠프(6,000m)를설치하고폭설속에서도등반을계속하여6,690미터지점에4캠프를설치했다.원정대는여기서5캠프를설치할계획을바꿔곧바로정상공격을감행했다.공격대원은유동옥과파쌍노르부,펨바라마셀파등3명이었다.이들은4월22일6,800미터까지올라가비박을하고다음날폭풍설을뚫고오후3시50분에정상을밟았다.
곧이어하산을시작한일행은도중눈보라속에서길을잃고헤매다밤늦게야겨우4캠프로돌아왔다.다음날에는하산길에눈사태를만나150미터가량미끄러지면서카메라가들어있던배낭을잃어정상사진조차가지고내려오지못했다.또한등정자유동옥대원은심한동상을입어귀국후에발가락7개를절단해야만하는비싼대가를치러야했다.
-출처/www.himalayaz.co.kr/월간마운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