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 1.*-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상주1.
*“경상도(慶尙道)라는이름은경주(慶州)와상주(尙州)를함께부르면서유래되었다”
*"백두대간과낙동강이빚어낸삼백(三白)의고을상주는흰쌀과누에고치,곶감의고장이다.
▲상주화북의견훤산성에서바라본속리산조망.천황봉에서문장대로이어지는백두대간마루금이생동감넘친다.

쌀,누에,곶감의공통점은무엇일까.바로하얗다는것이다.영남지방의큰고을이었던상주(尙州)는예부터이세가지로유명해상주를흔히‘삼백(三白)의고을’이라고불렀다.우선‘삼백미’로불리는상주쌀은경기미와어깨를견줄정도로질이좋았고,임금의수랏상에도오르던진상품이었다.게다가생산량도많아한때상주에서생산되는쌀의양은강원도전지역에서생산되는그것에비해두배가까이됐다고한다.

그다음은누에.역사적으로보면우리나라에서누에치기를시작한지는4,000년쯤되었는데,상주함창읍은신라시대부터명주산지로이름난곳이었다.하지만한때는산기슭을온통차지했을뽕밭은지금은많이줄어들었고,양잠농가도더불어사라져예전명성에는미치지못한다.그러나요즘도함창장날엔명주장이설정도로그전통이이어지고있다.은척면두곡리에은척뽕나무로불리는350년쯤된늙은토종뽕나무가있는것도이고장의누에치기가아주오래됐음을알려준다.

곶감의명성은아직도대단하다.

상주는시내한가운데는물론이요,마을길가에도온통감나무다.그래서가을엔주민들이감을따는광경을쉽게만날수있고,가을에서겨울사이엔어딜가나주렁주렁매달린곶감이익어가는건조장을쉽게볼수있다.

여기서잠시궁금증하나.요즘곶감은분명히말간빛이도는주황색인데왜‘삼백’에속할까?사정은이렇다.타래에그대로건곶감에서는하얀분가루가생기지않고사람이손으로만지작거려야만분이생겨난다.수십년전까지만해도곶감을걸어놓고손으로만지며모양을만들었기에하얀분이나와곶감을감쌌던것이다.이렇게해야곶감을오래보관할수있었기때문이다.하지만요즘은기술이발달해하얀분이나오지않아도장기간보관이가능하다.

▲함창읍내에있는전고령가야왕릉.낙동강을중심으로일어난

여섯가야중하나인고령가야태조의무덤이라고전해오고있다.

이렇게‘삼백의고을’로유명한상주는영남지방에선확고한권위를차지하고있었다.우선영남의행정명인경상도(慶尙道)는천년신라의고도경주(慶州)와상주(尙州)고을의첫글자를하나씩따서지은것이다.또영남의젖줄인낙동강은삼한시대에상주벌판에자리잡았던사벌국(沙伐國)의도읍이던낙양(洛陽)에서유래했는데,‘낙양의동쪽에와서야강다운면모를갖추고흐른다’고해서붙은이름이라하니상주사람들이갖는자부심을이해할만하다.

뿐만아니다.이곳상주는낙동강주변으로매우기름지고널찍한들녘이펼쳐져있기때문에오래전부터사람이살기시작했다.곡창일뿐만아니라천혜의방어막인백두대간을두르고금·쇠같은지하자원도품고있어삼국시대에는전략적으로매우중요한요충지였다.화북면속리산자락에있는견훤산성과모동면백화산에있는금돌산성이그증거가된다.

그래서신라는상주를북방경영의전초기지로삼았고,삼국을통일한뒤에는이곳을제2의도읍으로일컬을만큼소중하게여겼다.이런상주의위상은고려를지나조선까지이어졌다.세종때에는경상도감영이설치되기도했던상주의전성시대는임진왜란중인1593년(선조26)경상도감영이대구로옮겨가면서시들고말았다.물론그덕분에현재의상주는도시로서의이미지보다는편안한시골로서의이미지가아주강하게남았지만말이다.

▲공갈못노래비.상주고을에전해져내려오는채련요인

‘상주연밥따는노래’가새겨져있다.

임진왜란때비록감영을대구로옮기기는했으나조선후기에도상주의영역은매우넓었다.대동여지도를살펴보면,상주의범위는지금과마찬가지로서쪽으론백두대간을넘었고,동쪽으론낙동강을건넜다.그래서상주는답사동선을잡기가쉽지않다.가장일반적인여정은중부내륙고속도로점촌·함창나들목을나와북부에서부터남부로내려가면서둘러보는것이다.그다음서부의백두대간쪽을훑어본다음북서쪽의늘재를넘든지,아니면남서쪽의충북황간이나영동으로해서경부고속도로로빠져나가는동선이가장자연스럽다.

상주에서가장북쪽에자리한함창은현재는상주에속한한적한읍이지만,조선시대까지만해도현령이다스리던독립된현이었다.읍내남쪽언덕엔심상치않은모습의고분이보인다.바로고령가야태조의무덤으로전해오는무덤이다.임진왜란이일어나던1592년(조선선조25)경상도관찰사김수와함창현감이국필이‘고령국태조가야왕릉’이라고새겨져있는묘비를발견하여가야왕릉임을확인했다고전한다.

▲최근복원작업을하면서넓게확장된공갈못전경.

공검면양정리에있는공검지삼한시대에조성한저수지다.아직변변한이정표가없으나상주를구성하는중요한장소이므로반드시들러보는게좋다.고려사지리지에는‘공검이라는큰못이있었는데1195년(명종25)사록최정빈이옛터에축대를쌓아저수지를만들었다’는기록이있다.전설에의하면이못을축조할때공갈이라는아이를묻고둑을쌓았기때문에공갈못이라고부른다고전한다.인근고을에는공갈못을못보고죽으면저승에서도쫓겨날정도라는이야기까지있는것을보면함창공갈못의명성은대단했음을알수있다.상주사람들은공검지라는한자지명보다공갈못이라는한글지명을더선호한다.

다음은오래전부터상주고을에전해져내려오는채련요(採蓮謠)인‘상주연밥따는노래’의일부다.

1.상주함창공갈못에연밥따는저큰아가
연밥줄밥내따주마우리부모섬겨다오
2.이물꼬저물꼬다헐어놓고쥔네양반어디갔나
장터안에첩을두고첩네방을놀러갔소
3.모시야적삼에반쯤나온연적같은젖좀보소
많아야보면병이난다담배씨만큼만보고가소
4.이배미저배미다심어놓으니또한배미가남았구나

지가야무슨반달이냐초생달이반달되지

5.문오야대전목손에들고친구집으로놀러가니

친구야벗님은간곳없고조각배만놀아난다
6.저기가는저처자야고추이나잡아다오

고추농살내가놓게새참이나내다주소
7.싸립문대청문열어놓고손님네는어딜갔소

무산일이그리많아내올줄을몰랐던가
8.못줄잡는솜씨따라금년농사달렸다네

모심기는농사치곤칸좀맞춰심어주소
9.이고생저고생갖은고생모질게도사는목숨

한도많은이내팔자어느때나면해볼꼬
10.붕어야대전봉손에들고친구집으로놀러가세

친구야벗님간곳없고조각배만놀아난다
11.능청능청저비리끝에시누올케마주앉아

나두야죽어후생가면낭군먼저섬길라네
12.고추당초맵다해도시집살이만못하더라

나도야죽어후생가면시집살이는안할라네

연꽃도모두스러지고연밥이익은어느가을,공갈못에서연밥을놓고수작거는사내와이를받아넘기는여인의여유가웃음을자아내게하는민요다.김소희명창등이불러서유명해진이민요에는유서깊은상주고을의자연과향토색이물씬풍겨나온다.

인근고을끼리서로영향을주고받는것이민요의특성인데,‘상주연밥따는노래’의정겨운가락은영남지역은물론백두대간너머충청도보은,옥천은물론전북내륙지역까지전파되어그곳에서모내기할때도곧잘불리곤했다.이채련요가널리전파될수있었던까닭은곧잘고을간에문화적장벽이되곤하는백두대간분수령이상주고을을지나면서몸을낮추었기때문이다.그러니공갈못이유명해질수밖에없었던것이다.

하지만,몇년전까지만해도널따란공갈못을제대로볼수없었다.조선고종때못의일부를논으로만들면서축소되었고,1959년공검지서남쪽에오태저수지가완공된이후다시줄어들었기때문이다.그래서명성만듣고찾아간이들은너무협소한연못을보고는공갈못이란이름의유래를‘공갈을치는연못’으로해석해웃음거리가되기도했다.

다행스럽게도최근상주시에서는공갈못복원작업에힘쓰고있다.이번에가보니주변의논을모두연못을바꿔제법공갈못의영역이넓어져있었다.물론전남무안의백련지정도는아니었으나우선아쉬운대로이정도면옛명성을그려보는데부족함이없을듯했다.전국에연꽃으로유명한곳이많지만,역사나전설등여러콘텐츠를볼때상주의공갈못이으뜸이아니었던가.아직연뿌리가넓게퍼지진않았지만,연이란식물이워낙번식력이좋으니곧넓혀진공갈못을뒤덮은연꽃,그리고연밥따는처자를구경할수있을것이란기대감에벌써부터은근히가슴이설렌다.

->/글·사진민병준[월간산[456호]2007.10]<-


/박수관의상주함창연밥따는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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