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선자는’지하철공사간부’라는인력자원을동원했다.그들에게기관차운전을배우게했다."기관차몰려고행정고시쳐공무원된게아니다"는불만이터져나왔다.이당선자는그들을설득했다.시장취임후1년반,마침내지하철노조는파업에돌입했다.그러나지하철은차질없이운행을계속했다.공사간부들이운전석에앉은것이었다.결국노조가백기를들었다.서울시장시절부터이당선자의일거수일투족을기록하고있는비서김윤경씨는"사람의능력과잠재력을최대한,마지막순간까지다뽑아쓴다"고이당선자를표현했다.
이말에이당선자리더십과용인술의본질이담겨있다.그는자존심을건드리거나,명예욕을자극하거나,무한신뢰를보내는등다양한수단으로사람의능력을뽑아낸다.그사람이그의반대자라해도아랑곳하지않는다.이를위해의도적으로과거를불문에부친다.5년전서울시장취임식날,서울시고위간부가그를찾아와’살생부’를내밀었다.시장선거때상대편을도운명단이었다.그는살생부를뜯어보지않고돌려보냈다.일부언론에명단이보도되기도했다.그러나보복인사는없었다.소문이퍼졌고,살아남은그의반대자들은도리어더열심히일했다.
원세훈전서울시행정부시장은"출신과연고를따지지않고필요한곳에필요한사람을쓰는것이이당선자의스타일"이라고말했다.CEO가실력을중시하는조직에선경쟁이불붙는다.이당선자는현대그룹회장시절직원들의반대를무릅쓰고’적군’인현대차노조편집장의여동생을비서로채용했다.성적이최고였기때문이었다.여비서는성심껏일했고,결과적으로현대차의노사관계도부드러워졌다.
이당선자는실수했다고해서사람을자르지않는다."그릇을씻지않는사람보다씻다가깨는사람이낫다"고이당선자는말해왔다.서울버스체계개편초기그는여론의집중포화를맞았다.’이명박시장퇴진국민서명운동’까지벌어졌다.주위에선교통체계개편을주도한음성직교통관리실장경질을건의했다.그는건의를일축했다.대신자신이대국민사과를했다.원전부시장은"일을시키되책임을자신이지기때문에밑에선일에몸을던지게된다"고말했다.
이당선자의잠버릇을보자.그는자다가전화를받아도평상시처럼통화하고다시잔다.현대그룹CEO시절형성된버릇이다.해외현지에서전화하기좋은시간은한국에선한밤중이나새벽이다.그는사장이졸린내색을보이면급한업무라도부하직원이전화를걸기어렵다고판단했다.
해외에서한국시간에맞추면하루이틀이금방넘어간다.의사결정이느려지고시간과자원이낭비된다.그는연습을거듭했고,새벽1~2시에자다가전화를받아도낮에전화를받듯이또렷한목소리를낼수있게됐다.직원들은아무때나이당선자에게전화를걸곤했다.
그는끝까지일을챙긴다.한나라당경선을하루앞둔8월18일,그는오전9시부터오후9시까지12시간동안캠프사무실을지켰다.그는전국의당협위원장들에게일일이전화를걸어투표를독려했다.경쟁자였던박근혜전대표는그날기자회견뒤일찌감치캠프를떠났다.
‘끝없는경쟁’은이당선자가집착하는조직관리방식이다.그는대선기간중캠프에칸막이를치지않았다.경선때는후보홍보물을한곳에맡기지않았고,후보연설문은많을땐네사람이썼다.
젊은실무자들을중용하는것도이당선자가조직전체에긴장감을불어넣는방법중하나다.서울시장시절그는간부회의때과장급이하실무자들까지배석시켰다.대선기간에도국회의원보좌관들을늘회의에참석시켜질문을쏟아냈다.실무자들은신을내일하고,간부들은자리를뺏기지않으려는위기감으로일에달려들었다.
이당선자는자신의조직에2인자를허용하지않아왔다.그것은이당선자가절대적권한을지닌오너밑에서오랫동안독점적위치의CEO로지내오는과정에서몸에밴것일수도있다.2인자의존재가자신에게정보와권한이집중되는것을방해한다고여기는듯하다.이당선자가박근혜전대표측과의갈등뒤캠프의2인자로불린이재오의원을사퇴시킨것을그런맥락에서보는시각도있다.
이당선자는끊임없이사람을체크한다.흔히이당선자의복심(腹心)으로평가받는정두언의원도정무부시장시절이당선자의인터폰을세번받았다."이인사(人事)왜이렇게했어?"모두정의원이사전에보고했던,인사에관한질문이었다.대선기간대통합민주신당의네거티브공세가한창일때이당선자는클린정치위원회에방어의전권을맡기다시피했다.그러면서도이따금홍준표클린정치위원장대신실무진을찾아물어봤다.일종의크로스체크였다.
‘CEO이명박’에겐냉정하다는평가가따라다닌다.목표성취에골몰하는리더가흔히듣는얘기다.이당선자의측근과지인누구도이를부인하지않는다.정두언의원은"일을해내려다보니사람관리를하지않아그렇다"고분석했다.곱씹어보면’내편’이었다고챙기지않는다는얘기다.전여옥의원은"그같은냉정함이한국사회의고질병인연고주의를끊게되길바란다"고말했다.그러나냉정함이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흐르고포용력부재(不在)로나타날경우우군을돌아서게하고적을양산할소지도있다.
이당선자는12월19일밤대통령당선후"대한민국경제를반드시살리고,국민통합을반드시이루겠다"고목표를제시했다.그가’대한민국CEO’로서대한민국주주인국민에게약속한목표를어떻게’실천’할지가주목된다.
-/글이상렬기자중앙sunday제41호/-
3.자존심하나로가난·콤플렉스넘었다
‘신화의뒷면’에감춰진성장기
포항동지상고야간부의졸업기념사진.흰색점선안이이명박당선자.친구김창대씨제공 |
경북포항의바닷바람은매서웠다.지금부터62년전겨울일본오사카에서돌아온이명박대통령당선자(당시4세)의가족을맞았던겨울바다는지금보다더추웠을것이다.그의가족이탄부산행귀국선은대마도인근에서침몰했다.이당선자의큰누나귀선(77)씨는한언론과의인터뷰에서“당시어머니가명박이를살리기위해끈으로꽁꽁묶어업고있었다”며“그와중에도명박이는울지않았다”고말했다.
이후이당선자는14년간포항에살며초·중·고교를마쳤다.가난을가장처절하게경험한것도이곳이다.포항은이명박을어떻게키웠을까.
이명박당선자가중학시절살던포항북구덕산동집.지금도형편이어려운사람들이살고있다.포항=김선하기자 |
“덩치가반에서중간이나됐을까요.그런데턱하니칠판을둘러메고는….”
이당선자의모교인포항영흥초등학교운동장에서만난동창박이득(66)씨는“그친구,당찬구석이있었다”고말했다.6ㆍ25전쟁중시내초등학교는죄다군부대에수용됐다.인근해수욕장소나무숲이교실을대신했다.칠판등수업용구를챙길때면이명박은뒤로빠지는법이없었다.청소시간에도그랬다.“빨리빨리일하고가자”며가장먼저소매를걷었다.
박씨는1965년이당선자가현대건설에입사한직후서울에서만난적이있다고했다.“좋은회사들어가월급받으니좋겠다고했지.대뜸‘이봐,그회사내거야.내가남의월급이나받으려고열심히일한다고생각하면너무비참하잖아’라고하더라고.어릴때와똑같더라니까.”
이명박당선자의포항동지상고시절사진.가장왼쪽이이당선자.친구김창대씨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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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가난은소년이명박을점점내성적으로만들었다.원래도넉넉지못했던집안은그가다녔던초등학교근처목장에서일했던아버지이충우(81년작고)씨가전쟁이후실직하면서더어려워졌다.이당선자는『어머니』란책을쓸정도로모친채태원(64년작고)씨에대한애정이남달랐다.그러나아버지에대한기억을풀어놓은적은많지않다.그의아버지는어떤사람이었을까.이당선자일가의고향인포항북구흥해읍덕성1리를찾았다.시내에서승용차로한참을들어가야하는곳이다.
이당선자의사촌형수유순옥(76)씨는“우리시삼촌(이당선자의아버지)은참훌륭한분이었슴니더”라고말했다.“내가시집와포항시내사는시삼촌댁에인사를갔어예.부부가고물장사를하고있었는데웬거지아이가웃통을벗고지나갑디더.시삼촌이이리와보니라하고부르더니헌옷을골라입히고잔돈푼까지쥐어주데요.그리고‘벗은거지는못얻어먹어도입은거지는얻어먹는다더라’면서그냥보내요.지켜보던시숙모가‘저분은자기대에복을못받으면자식대에서라도꼭받을끼다’라고합디다.”
이명박당선자의고교생활기록부.국어·수학은3년내내‘수’였지만일부상업과목은‘미’를받기도했다. |
당시이당선자가족은남을도울형편이아니었다.유씨는“집에가보니판때기를얼기설기얹은게꼭개집같더라”며“점심때밥을차리려고물어보니‘우리는귀국후점심먹어본적이없다’고했다”고말했다.좀더커서도마찬가지였다.중학시절친구들은“명박이네는집에부엌이없어툇마루에구멍을뚫고거기화로를넣어밥을해먹었다”고전했다.
이당선자는주변사람들에게“아버지는성실하고정직한분이었지만돈버는재주는없었던것같다”고말했다고한다.지기싫어하던당찬소년과가난하면서도한없이사람좋은아버지의관계가어땠을지짐작할만하다.
소년이명박을괴롭힌것은가난만이아니었다.아버지가일하던목장이동지상고재단이사장소유여서그의두형은이학교를졸업할수있었다.그러나그가고교에진학할때는사정이달랐다.어머니는“우리형편에너를고등학교못보낸다는건네가더잘알것”이라고했다.그러면서도당시수재소리를듣던둘째형상득(72ㆍ현국회부의장)을위해선대학등록금을걱정하고있었다.
친척들은“이당선자가족이단칸방에서발조차제대로못뻗고잘때도이부의장이밤에공부할자리는꼭남겨뒀다”고전했다.이당선자는나중에“형들교복과옷을물려입은것도억울한데이젠형들때문에고등학교도못가는구나…가난과형들이원망스러웠다”고당시를회상했다.그는장학금을받는다는조건으로간신히형들이다닌고교의야간부에들어갔다.형들에비해얼굴이못났다고생각했던것도큰콤플렉스였다.
이당선자가가난과형에대한콤플렉스라는두개의산을넘을수있게해준힘은뭐였을까.포항중·동지상고동창인김홍대(66)씨는“아마자존심이었을것”이라며“명박이는행상하고리어카끈다는티를전혀안내솔직히잘몰랐다”고말했다.당시동지상고야간부는2∼3년씩진학이늦은학생이대부분이었다.이당선자처럼중학을마치고바로진학한경우가외려드물었다.그러나이명박은무슨일이든누구에게든지려들지않았다.고3때벌어진시험거부사건때도그랬다.고교동기김칠복(68)씨의말이다.
“학교배구부가대구에서열린대회에출전했어요.나도선수였는데경기뒤학교에와보니시험을친다더라고.우리는공부하나도못해시험못치겠으니다들답안지에이름만써서내자고내가‘백지동맹’을주동했지.선생님들이발칵뒤집어졌어요.걱정을하고있는데선수도아니었던명박이가오더니‘이름다썼는데(주동한너는)왜안나가느냐’고하면서교실밖으로뚜벅뚜벅나가더라고.덩치도작고공부만하는친구인줄알았는데내가좀창피했어요.”
이당선자가중학시절살았던포항북구덕산동집은아직도그자리에남아있다.일제시대절터였던이곳에는극빈층15세대가모여살았다.금방이라도지붕이내려앉을것같은이집엔지금도형편이어려운10여세대가옹기종기살고있다.인근에서공인중개사를운영하는최상택(51)씨는“집은아예값을매길것도없고땅값도평당100만원이나할까말까”라고말했다.
이당선자가고교1학년때뻥튀기를팔던북구학산동포항여고앞길은말끔하게포장돼옛모습을찾아보기어려웠다.고교친구강원구(67)씨는“당시장사하던모습을종종봤는데명박이가대통령이되다니…”라며말을잇지못했다.그시절뻥튀기기계가있던자리의맞은편길에는이번대선기간내내후보들의포스터가나붙었다.공교롭게도포스터속이명박의시선은자신이장사하던바로그위치를향하고있었다.
이당선자는59년12월고교졸업을앞두고포항을떠났다.그는나중에“77년현대건설사장발령을받은뒤처음으로다시고향땅을밟았다”고밝혔다.정신없이바쁘기도했겠지만그곳에서자신을괴롭혔던가난과콤플렉스가지긋지긋했을것이다.그가서울에와보니먼저상경한부모님은이태원판자촌에단칸방을얻어놓고채소노점을하고있었다.60년봄이되자중·고교시절그와가장친했던포항친구김창대(65)씨가상경했다.이당선자대신받은고교수석졸업상장과부상인탁상시계를들고왔다.김씨의말이다.
“명박이가갈데가없으니내자취방에와서같이공부했는데전날아무리심한막노동을했어도오전4시면일어나공부하더라고.고려대가서도명박이가환경미화원으로일하며학교를다녔는데리포트제출때면친구들이그사람걸베꼈다고그래요.”
대학친구가기억하는이명박은어떤사람일까.고려대경영학과동기인엄종일(65)전건영사장은“워낙조용한사람이어서등록금낼때가돼서야명박이가어렵다는걸알았다”고말했다.“다른친구들은시골에서소판돈을올려보내니뭉칫돈으로내는데이친구는여기저기서모아온듯한꼬깃꼬깃한돈을냈다”는것이다.
청년이명박의삶이달라진것은대학3학년때상대학생회장에출마하면서다.본인은나중에“안으로만움츠러드는성격을바꾸고싶어서출마했다”고말했다.64년한·일국교정상화반대시위를주동하고이일로반년가까이옥고를치르면서그는비로소자신을짓누르던콤플렉스를극복하기시작했다.65년현대건설에입사해초고속승진을계속하면서가난도사라져갔다.
이당선자는올해5월중앙SUNDAY와의인터뷰에서“나는강한사람만나면무한히강한힘을발휘하는데,되게약한사람만나면흐물흐물해진다”고말했다.사실일까.만약그렇다면자신이경험한가난과콤플렉스때문일까.김창대씨는“이당선자의현대건설입사초기에친구세명이대구에서막걸리를마신적이있다”며“당시술집여종업원이‘집안형편때문에여기서일한다’고하자이당선자가주동이돼돈을거둬빼줬다”고말했다.그는“청년시절이당선자가기르던잡종개를잃어버리고어찌나슬퍼하던지놀라기도했다”고덧붙였다.
초·중학교동기이자고려대동문인방무성(66)씨도“극장간판그리던고향친구가80년대에무릎을크게다친일이있다”며“당시명박이가수술비몇백만원을모두부담했다고들었다”고말했다.방씨는자신이박정희정권시절인71년야당인신민당소속으로8대국회의원선거에출마했다낙선했을때도비슷한경우가있었다고했다.“서슬퍼렇던시절에야당으로나왔으니….다들겁먹고외면하는데명박이가자기서너달치월급을털어선거자금을보태줍디다.”
이당선자는75년현대건설부사장이된날김창대씨를찾아가술을마시며“성인이된뒤처음으로다른사람앞에서눈물을흘렸다”고말한적이있다.“포항의어린시절과돌아가신어머니가생각났다”는것이다.김씨는기자에게“맨주먹으로그자리에가기까지얼마나많은사연이있었겠느냐”고말했다.찢어지게가난했던포항촌사람의자존심이마침내가난과콤플렉스에한판승을거둔순간이었다.
-/글김선하기자중앙sunday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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