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회장과비슷하면서다른스타일
물론아랫사람들을쉴새없이몰아가는면에서그는정명예회장의스타일을빼닮았다.이명박은사장시절임직원들에게“모두사장·회장이돼서뛰란말이야”라는말을자주하면서부하들을독려했고,조금이라도느슨한면이보이면“산보다녀왔어?빈손으로왔으면뭐하러출근했어”라고다그쳤다고한다.
하지만대조적인면도있었다.정명예회장이과감하고즉각즉각판단하는스타일이라면사장시절의이명박은상대적으로고심을많이하는편이었다.이명박사장의비서를6년간했던노치용현대증권부사장은“결재받으러가면‘기다리라’고하고몇시간씩고심하곤했다.그시간이길어져아랫사람들이불평하기도했다”고전했다.
‘파격인사’로성공가도를달렸던이명박역시파격인사를단행하기도했다.그의입사동기인박재면전현대건설회장은“사장취임초기에는누군가맘에들면이런저런단계를‘생략’하고과감히일을맡기는타입이었다”고말했다.조선호텔을지을때일잘한다고소문이난자재담당직원을발탁해자신의밑에두기도했다.
그러나문제가생기기도했다.마닐라공사당시수금문제가지지부진하자이명박사장은외부전문가를파격적으로영입했다.그런데어렵게데려온이인물은건설회사경력이없다보니업무가제대로진전되지않았다.게다가기껏모셔다놨더니다른외국계기업으로이직을준비하고있었다.이명박은이사실을전해듣고대로했다고한다.
박재면전회장은“이후그의인사스타일이신중해졌다.무엇보다조직충성도를십분고려하는듯했다”고회고하고있다.박전회장의말대로“같은실수를절대로반복하지않는사람”이어서일까.실제로그사건이후이명박의인사스타일이실력과능력위주에서충성도를따지는쪽으로바뀐듯하다.
이명박은이번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캠프에서한번믿은사람은거의바꾸지않았다.파격인사도거의없었다.78년부터6년간이명박사장비서를지낸노치용현대증권부사장도비슷한경험을전한다.당시노치용이실제로비서실근무를하고있는데도이사장은한달가량정식발령을내지않았다.그냥전임자의보조로일하는수준이었다.
“이명박사장은가끔내가일하는모습을멀리서지켜보고있는듯했다.그기간중나에게말을걸지도않았다.유심히관찰당하고있다는느낌을받았다.나중에보면여비서한명을뽑을때도그랬던것같다.그냥두고얼마동안관찰했던것같다.”
인사에서도매정하다소리를더많이들어야했다.고려대출신이유난히많아현대건설은사내에서‘고대건설’이라고불렸다.인사철만되면청탁이끊이지않았지만그는학연·지연을거의따지지않았다.현대건설의한전직임원은“최소한자신의모교인고려대출신을티나게챙기지는않았다”고말했다.당시현대자동차는정세영회장이동문인고려대출신을상당히챙겨대조적이었다고한다.이렇다보니자기사람이없다는소리를종종들어야했다.
박정희“걔인간좀만들어주쇼”
77년1월서른여섯의나이에현대건설최고경영자(CEO)에오른이명박사장은얼마뒤포항중·동지상고동창인김창대를찾았다.단둘이술잔을들이켜다이명박이별안간굵은눈물을떨어뜨렸다.오랜지기는그이유를묻지않았다.충분히짐작하고도남았기때문이라고한다.
“입사12년만에최고자리에올랐다.승승장구라고표현할만큼쉽게오른자리가아니다.겉으로드러나지않았지만상처가없을리없다.정명예회장의특별한총애를받다보니주변의온갖질시와눈총을받았다.이명박은‘눈물젖은빵’을먹고자랐다.”
‘냉정하다’는소리를들으면서도쉼없이달려온12년속에는그처럼남모를눈물이스며있었다.사실첫발을떼는것부터쉽지않았다.65년여름직장을구하던이명박의눈길이현대건설신입사원모집공고에서멈췄다.현대건설의첫번째해외사업이던태국파타니나라티왓고속도로현장파견사원을뽑는다는내용이었다.당시의회고다.
“그때만해도현대는임직원380명에불과한작은회사였다.나는현대를잘몰랐다.그러나대한민국처음으로해외파견사원을모집한다고하니까매력을느꼈다.”
당시스무명의신입사원을뽑았는데1000여명의지원자가구름떼처럼몰렸다.1,2차전형을끝내고3차면접때이명박은신원조회에걸렸다.학생운동전력이문제였다.이때정명예회장은“해외파견중문제가생기면회사가책임을지겠다”는내용의신원보증각서를써야했다.정명예회장은‘스물넷의이명박’을이렇게기억했다.
“얼굴이새카만녀석이눈은살아있었다.한쪽눈이찌그러져있는데그때는똘망똘망하게보이더군.그래서합격시켰다.나중에청와대에들어갔더니박정희대통령께서‘이명박이라고있지요.아주고약한녀석인데정치권에기웃거릴줄알았는데현대로갔더군.인간좀만들어보세요’라는얘기를해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은정명예회장에게골칫덩이운동권출신을‘인간을만들어달라’고했지만이명박은이를넘어‘샐러리맨신화’를만들었다.입사5년만에이사가됐고,12년만에사장이됐다.나중엔무려15년동안국내최대건설사의CEO를지낸다.“태국건설현장에서폭도들로부터금고를지켰다”“신군부의산업합리화정책에맞서현대자동차를지켰다”는등‘전설’같은얘기가전해지기도한다.
그러나주변에서그를지켜본이들은“이명박신화는철저한준비의산물”이라고말했다.66년태국도로공사현장에서공구장을지낼때신입사원이명박을처음만났다는임형택전부사장의회고도마찬가지다.그는“이명박은경리부말단사원임에도거의매일야근을자처하던특이한직원이었다”고기억했다.
“자정에현장직원들과일을마치고들어오면당시이명박사원은경리부에서혼자불을켜놓고서류를보고있었다.이시간까지무엇하느냐고물으면‘잘모르는현장서류들이있어공부하는중’이라고했다.”
이런밤샘근무가곧빛을발했다.정명예회장이현장시찰을나왔을때일이다.공사가계속적자가난다고화를내면서그는“공구별적자현황을면밀히분석하라”고지시했다.경리부에난리가났다.이때‘말단사원이명박’이나서일목요연하게상황을보고했다.정명예회장이이명박이란존재를처음눈여겨보게된사건이다.
68년귀국해중기사업소에근무하던이명박은1년간세번승진하는진기록을세운다.69년7월차장으로승진하더니그해말부장에오른것.이듬해5월엔공무담당이사가된다.이때마다정명예회장은“내가승진시킨게아니야.자네스스로승진한거야”라며이명박을치켜세웠다.정명예회장은그룹창립35주년사사에서이명박을벼락출세시킨배경에대해이렇게설명했다.
“경부고속도로건설당시중장비가결정적인역할을했다.원효로·서빙고·관악으로옮겨다니면서중기공장을운영했는데이명박사장이이를맡아건설장비에서자신감을갖게됐다.사실노동자가운데가장다루기어려운층이중기운전기사다.이사장은그쪽을완전히파악해휘어잡았다.”
성실함도남달랐지만정명예회장은그의판단력을높이샀다는전언이다.노치용부사장은“이당선자의순간판단력이남달랐다”고말했다.“이당선자는꼼꼼히메모하는성격은아니었다.오히려구두지시하는경우가많았다.그런데도치밀하고세심함이있었다.건설업은각종사고처리부터입찰금액을써내는일까지순간순간판단하는일이많았는데그런면에서놀라움을많이보여줬다.”
그렇다보니일부에선독선적이라는말을듣기도했다.그러나노부사장은이를업종의특징으로설명한다.그는“결정을빨리하고곧바로실행에들어가지않으면살아남을수없는게건설회사”라며“이당선자는욕을얻어먹는다고멈칫하는일이없었다”고말했다.
현대건설대표이사를하면서인천제철·대한알루미늄등현대가새롭게인수한회사나한국도시개발(현현대산업개발)·한무쇼핑(현현대백화점)등신규설립한회사의대표이사를겸임하도록한것도그의판단력때문이었다.전성기시절이명박은현대8개계열사의CEO를맡았다.
한편에선그가정주영호(號)의충실한항해사였지‘선장’은아니었다고말하기도한다.정명예회장이대형프로젝트를수주해오면이사장이살림은잘했어도직접현장을누빈것은아니라는얘기다.돌파력·추진력·아이디어는좋은데협상과조율능력에서는미지수라는지적이다.그러나김정국전현대건설사장은“전혀그렇지않다”며이런시각을부정했다.그는“수주실적이없으면사장자리를내놔야하는것이건설회사”라며“특히페낭대교는이명박당선자의단독작품”이라고말했다.
“프랑스·일본을포함해41개사가수주경쟁을벌였다.페낭대교는말레이시아본토와페낭섬을잇는8㎞짜리동양최대다리공사였다.공사금액만3억5000만달러였다.일본은차관을대주겠다고했고프랑스는현대보다입찰가가낮았다.그러나이당선자는마하티르총리를설득해모두불가능하다고여겼던페낭프로젝트를따냈다.”
가장자주쓰던말“내사둬!”
상당수현대맨의말대로이명박은잔정이많은사람이아니다.사소한일에그다지신경쓰지않는다.하지만명절에는청소부·수위등외곽에서일하는사람들에게자기이름으로선물을보냈다고한다.자신의열정적인업무스타일때문에아랫사람이고생하는것을스스로알고있는듯했다.
그의운전기사는특히고생이심했다.종일자동차로움직이다새벽1~2시에퇴근하는것이예사.그런다음오전6시까지출근해야했다.더구나그는술을좋아해가끔지각할때가있었다.그러면이명박은전혀불평없이직접차를몰고출근했다.총무부장이운전기사를교체하겠다고했지만이명박은“내사둬!”라는한마디뿐이었다.처음에아랫사람들은‘그냥내버려두라’는뜻의“내사둬!”라는말을이해하지못했다고한다.
일할때는엄격하지만정에약하고마음이여리다는얘기다.다만그는요령피우는사람을싫어했다.이명박이가장싫어하는사람가운데한명은김우중전대우그룹회장이었다.진정한사업가로서문제가있다는얘기다.정명예회장이인수합병으로성장한김전회장에게호감을가지지못한것과비슷한이유라고볼수있다.
현대맨이라면이명박에대해빼놓지않고하는말이“자기관리가철저한사람”이라는것이다.스포트라이트와시기를한꺼번에받는이유에서였을까.이명박은누구보다몸가짐이남달랐다.현대건설에서같이근무했던김영일에머슨퍼시픽부회장은“쉬지않고일하면서도피곤한기색도내비치지않았다.남보는데선하품도하지않았다”고기억한다.
업무상술자리가있더라도흐트러짐이없었다.김정국전사장은“업무상외국인손님접대가있으면당시엔삼청각같은한식집에서식사를했다”면서“음식시중을드는여종업원을마치여직원대하듯했다”고말했다.해외출장을가서도마찬가지다.비행기에서내리면새벽이든한밤중이든곧바로작업복으로갈아입고현장으로달려갔다고한다.일이끝나면부랴부랴귀국행비행기를탔다.관광도,쇼핑도없었다.호텔에선저녁식사를한다음곧바로자기방으로들어가버리기일쑤였다.
현대건설전직사장의말이다.“오너들은전문경영인에대해반드시이중·삼중으로검증을한다.정씨집안은귀가얇다.한방쏘면즉각반응을한다.그런데이당선자는10년넘게승승장구했다.그만한배경은철저한자기관리에서찾을수있다.”
연말휴가를빼고는여름에있는신입사원수련대회가휴식의전부.식목일이나국군의날같은휴일에도회사에나왔다.
독실한기독교인인이유로일요일에쉬는정도였다.일만하다보니이명박은‘재미없는사람’으로통했다.노래도잘부르지않아회사임직원들은“사내행사때어쩌다부르면지독히못했었던것으로기억한다”고했다.
그런데80년께가수이용의‘잊혀진계절’이현대임원들사이에서화제가됐다고한다.이명박사장이배우겠다고해서비서가테이프를구해줬다.그래서출퇴근할때이노래를유일하게배웠다고한다.이후기분좋을때면이노래를중얼거렸다고한다.
이렇게재미없게살아온이명박사장에게가장큰즐거움이있었으니바로테니스였다.그는수요일저녁과토요일오후서울도곡동에있는현대체육관에서직장동료들과테니스를즐겼다.92년회사를그만두기전까지도곡동체육관은그의일급아지트였다.그와같은테니스멤버인김정국전사장은“아마추어치고는수준급”이라고말했다.
그러나이당선자와현대는껄끄러운이별을해야했다.노태우정권말기재벌정책에불만을품은정명예회장은통일국민당을만들어김영삼당시민주자유당후보에게맞섰다.이때가92년1월.비슷한시기이명박은현대건설을떠난다.“같이정치를하자”는정명예회장의제언에으레‘예스’를할줄알았는데대답을하지않았던것.분위기가냉랭했다.
누구보다화려하게현대맨으로27년을지냈지만그는변변한퇴임식도없이현대를떠나야했다.민자당비례대표로정계에진출하면서는‘평생의후원자’였던정명예회장과완전히다른길을걷게된다.그래서인지이후97년발행된현대그룹50년사사에서는‘이명박’이란걸물을찾아보기어렵다.
-/글조민근·이상재기자중앙sunday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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