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세에떠나가신고모님을추모하며
100세를넘게사신다는것은장수의의미도있지만,그기에따른고통도함께한다는것을느끼게해준다.우리나라의평균년령이80세에육박하고있으나,100세를넘어사신다는것은그렇게흔치않는일이다.우리의가족과혈족가운데100세를넘게사신분은아마도우리고모님이처음이신것같다.그렇게오래도록살아오신그길은그렇게행복하지만은않았다.
우리고모님이살아오신한세기100년은우리의역사만큼이나풍랑의세월속에서힘겨운삶을살으셨다.조선조말의혼란스러운시기에태어나셔서일제의강점기의갖은고초를경험하면서성장을하여괴산에사시는경주이씨가문의유학자이신고모부님과결혼을하셔서2남2녀을낳으셨다.그때만해도유학자의선비정신으로사시는고모부님을대신하여집안대소사를주관하셨다고들었다.
큰딸은청주로시집을가서잘사시고,둘째아들은은행원이었다.그런데형수님이기독교신자여서가정의화목을위해형님도교회를다니셨는데,30대말즈음에7월17일이공휴일이어서교회에서교인들과한탄강에물놀이를갔다가점심을먹고물에들어갔다가그만그물속에서나오지못하고,가장먼저하늘나라로승천을하였다.자식을먼저보내는부모의마음은얼마나아팠을까?
고모님이80대에고모부님이세상을떠나셨다.큰아들은경제기획원에근무를하였는데,정년이가까워지면서지방공무원으로고향의선거관리워원장을하면서고향집에서출퇴근을하였다.그러던중어느날교통사고를당해식물인간이되어지방병원에서서울병원으로이송을하여치료를받아도회복가능성이없다고집으로모시고가라는권고를받고죽음을받아드리며집으로옮겨갔다.
집에도착하여밤을지세며지켜보고있는데,미동도하지않던형님이조금씩반응이보여다음날서울로모셔와서다시병원에입원을시켰다.그렇게몇일을경과를보는데,나도그때병원에서형님을보았지만죽음을기정사실로받아드렸는데,식물인간의상태에서기적적으로깨어나셨다.정신을회복하고보니너무오랜시간뇌사상태가오래지속되어몸은척추에서부터하지까지마비가되었다.
다리는반대로휘어져휠체어를타고병원생활을하였다.몇군데의병원을거치며한방병원에도입원을하였고,재활병원에서재활치료를받았지만,치료효과는나타나지않았다.모두가죽는다고생각하였던형님이다시살아난것은기적에가까운일이었다.아마도그일을지금와서생각해보면서울에서괴산까지엠브란스를타고먼길을달려가면서뇌에어떤충격을주어서회복이가능하지않았을까?
형님도2남2녀을두었는데,막내아들결혼식에는휠체어를타고지켜보셨다.그리고그지루한몇년의병원치료에도더이상의효과가없어시골에내려가3년여를더사시다가돌아가셨다.막내딸도남편이은행에근무를하다가40대에1남2녀를남겨두고너무일찍이하늘로떠났다.두딸은아직남아있지만,남편과두아들을가슴에묻고도100세를넘게살아오신고모님의마음을바라보면가슴이아프다.
시골집에서고모님과큰형수고부지간에큰집을지키며사셨는데,형수도가슴알이를많이하여서그런지심장에무리가와서그런지심장이좋지를않아한달에한번서울병원에서약을복용하며사셨는데,병세가더악화되어고모님을모셔야하는현실에고모님의도움을받으시며생활할수가없어공기가좋은곳에서요양을한다며집을떠나고,달랑고모님혼자서생활을하셨다.
그러다보니청주에사는큰딸이드나들면서돌보아드리고있는데,청주큰누나도80이넘어힘겨워하셨다.그래서가족회의를거처지난봄부터초정노인요양소에서생활하시다가이곳요앙병원에서한많은생을마감하셨다는연락을받고어머니와두동생과함께빈소에다녀왔다.아들이없는고모님의빈소가얼마나쓸쓸할까걱정을하면서달려갔는데,다행이큰형님의두아들과작은형의아들이빈소를지키고있었다.
작은며느리,그리고손녀사위들이공간을지켜주고있어서형님들의일을대신해주는모습속에서고모님의지난날을되돌아보는시간을가졌다.너무오래도록사시면서가족들에게무거운짐을안겨주신고모님도이젠무거운짐을훌훌털어버리고하늘나라로편안하게떠나시게되었다.호상이어서곡소리가뜸했지만,가족들의진정한마음이한곳에어울어진조카들의모습은대견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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