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철강왕’박태준회장을20여년간보좌하며포스코3대회장을지낸정명식(丁明植·77)전한국산악회회장얘기다.포스코회장을지내기까지의스토리는무궁무진하다.지나고나서들으면‘아,그렇구나’정도로느껴지지만실제의삶은누구나그렇듯도전으로점철돼있다.정회장은그도전을성공으로이끈주인공이다.
그의삶은한국의노년세대들이대개그렇듯대한민국의파란만장한역사와궤를같이한다.6년제이던중학시절에일제로부터해방을맞았다.미군정시절엔고교를다녔다.시대의어지러운상황을감수성예민한시기에모두겪었다.산에다녔다.경기중학산악부창립자에가까울정도로열성적이었다.대학입학해선아버지의사망과6·25전쟁을겪는다.서울대공대산악부를창립한다.피난생활후서울로올라와대학졸업하고대학원에진학한다.이것만하더라도일제,해방,미군정,한국전쟁등격변의한국현대사를전부몸소체험한역사의산증인이다.
철강왕박태준회장20여년보좌
그는가장젊은사람에속해미네소타대학원에서토목공학석사공부를했다.한달180달러를받았으니,일당으로치면6달러였다.당시우리나라1인당GNP가100달러가채안되는시절이었다.풍족하지는않았지만학생신분으로서그만하면만족할만한수준이었다.물론학비와책값등은모두따로지원받았다.중·고시절에산을그렇게좋아했지만제대로된등산화나발에맞는등산화를신어본적이없었다.하지만이곳미네소타에와서처음으로발에맞는등산화를신어봤다.등산화에발을맞추다난생처음발에맞는등산화를신은것이다.그러나미네소타엔산이없어등산할수없었다.
3년만에석사학위를받고59년귀국했다.학교에자리를잡기위해시간강사를했다.바로위선배까지교수로쉽게임용됐다.그도‘쉽게나겠지’라는생각으로버텼다.주위에서도조금만더참으라고격려했다.생활은힘들었지만막연한기대를가지고참았다.일은많았다.시간강사하느라강의준비를해야했고,미국유학갔다왔다고수당도거의없는미국의복구지원팀고문관통역까지떠맡겼다.교수증원승인허가는쉽게나지않았다.정부예산자체가절대적었던시절이라한번중단된예산이다시늘지도않았고,조금늘었다하더라도워낙쓰일때가많던시절이었다.언제다시승인날지알수없는상황이었다.생활은점점더힘들었다.그새결혼해서아이는셋이됐다.
마침그때한국의첫설계사무소가59년문을열었다.엄청난사회간접시설공사가잇따르자이전까지주먹구구로하던설계를체계적으로하기위해내무부토목국장을했던김해림씨가개업한것이다.민간이국가주요사업에처음으로설계공급을시작했다.임시생활방편으로설계주임으로일을시작했다.시간강사에고문관통역에설계사무소주임까지1인3역으로눈코뜰새없이바빴다.설계사무소일은생활비를벌기위한방편이었지만,이후그의인생을결정짓는주요수단이돼버린다.아마대학교전임강사로발령이났다면그의인생은교수로정년퇴직하고끝났을것이다.운명의방향은그의의도와는다른곳으로흘렀다.누구나마찬가지겠지만.
설계사무소에서그가처음맡은일이식수를제대로공급하는상수도사업이었다.지금의남산1호터널옆에있는보광동취수장이그의첫작업결과였다.부산까지지원했다.낙동강물을끌어다쓰는상수도사업도그의작품이다.공사비가없어차관신청도그가직접했다.사업계획도냈다.문서도직접작성했다.북치고장구치고‘원맨쇼’하듯바빴다.그의인생에가장바쁜시기가세번있었다.처음이49년고교시절1년에100회이상산에다닐때였고,두번째가설계사무소일을한시기였고,세번째가포항제철(포스코전신)에있을때였다.
설계사무소에서바쁘게일할때도학교에서교수로발령내면돌아갈생각이었다.그런데65년까지끝내안났다.절망적이었고,자존심도무척상했다.대한민국에서못살겠다는생각까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