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와인예찬
《심산의와인예찬》은지난1년간<무비위크>에연재될당시내용의진위여부를놓고많은논란을일으켰다.그만큼이책은소설과에세이사이에서문학적으로대단히모호한경계위에서있다.심산을아는사람은이책에등장하는숱한여인들이실존인물일거라고점친다.하지만타고난글재주꾼의손끝에서흘러나오는이야기가어찌진실하기만을기대할수있겠는가.그런의미에서이책의내용은창작의결과물이기도하다.저자자신도글쓰기최고의가치를독창성과새로움에두고있다.
이책에등장하는여인들은한결같이그에게사랑을가르쳐준다.“젖을물려준엄마이외의첫번째여인이첫사랑이다”는그의정의도자못흥미롭다.비릿하고풋내나는첫사랑을가르쳐준‘밀히’는그래서그의첫사랑여인이다.일견사실같기도한데,이야기의말미에다‘사랑하는처녀의젖가슴’쯤으로풀이되는독일의‘립프라우밀히’라는와인에대해정보를살짝곁들여놓았다.밀히가립프라우밀히라는와인에서따온이름이라는건짐작하고도남는다.
소설《하이힐을신은남자》를쓸당시취재차만난게이는이글에서그르나슈로재탄생한다.그르냐슈는주로레드와인을만드는포도품종이다.이것으로화이트와인을만들었다고하면사람들은화들짝놀라서도망치게된다는의미에서다.그역시그르나슈와의사랑을완성시키지못한자신의유치했던영혼을반성하기도한다.이쯤되면이책은재미난에피소드를통해배우는심산만의독특한와인강의로도읽힌다.
*선굵은남자들의디오니소스축제로서의와인
이책은크게2부로나뉜다.1부가와인과여인에대한오마주라면,2부에서는선굵은남자들의영원한로망으로서의와인을다룬다.산에서는맥주는너무무겁고,소주는너무독해와인이제격이라는지론을갖고있는작가심산이산사나이로활동했던과거역시이책에서색다른이야기로되돌아온다.
산에다니는사람들이정상에오르는일보다더힘들어하는일이있다.바로산에서죽은이의부고를전하는일이다.그런그에게도몇년전아콩카과등정에나섰다가실종되어버린산(山)친구가있다.신혼여행까지동했을정도로절친했던그의부인은소식을전해듣고는지리산으로들어가버렸다.그녀를만나러갈때면그는언제나말벡(malbec)을배낭에짊어지고간다.뜨거운사내의심장,잔뜩꾸민도회지가아니라있는그대로를드러내는산밑마을의흙냄새가나는와인이바로말벡이기때문이란다.
그런가하면이책은웃음을자아내게하는에피소드를많이담고있다.부산에서한주먹하는콩티형님의이야기는한편의코믹단막극대본으로도손색이없다.콩티형님의손에어느날’로마네콩티’라는와인한병이굴러들어왔다.어떤이가재건축문제로골머리를싸매고있던차에콩티형님이전화몇통화로간단하게그문제를해결해줬는데,그답례품이었던것이다.로마네콩티는와인을즐기는사람에게는선망의대상이다.발렌타인30년100병하고도바꿀수없는고가이기도하지만,돈이있어도살수없는희귀품이기때문이다.
근사한접대골프도아니고,이어이없는와인한병을받고는,혹시나하는마음에와인을‘좀아는’작가에게전화를걸어왔다.그렇게꿈인가생시인가싶게로마네콩티1985를만나게된것이다.급히비행기를타고부산까지달려간자리,시음회에초대된여섯명의잔에와인이따라지자가장상석에앉은콩티형님이큰소리로외친다.“완샷!시원하게들들자구.”깨끗이비워진다섯개의잔.그러나잔을들고부들부들떨고있는작가를물끄러미바라보는다섯명의사내.그어이없음과충격,코미디와비극이뒤섞인에피소드를읽다보면자연스레흥에겨운디오니소스축제가떠오른다.
“와인은나이들어만난좋은친구이다.이친구는내게서많은돈과시간과노력을앗아갔지만그모든것의총합보다훨씬더많은양과질의행복을내게선사해주었다.이책은그에게주는나의작은답례품이다.”
*지은이심산의서문가운데
산에오르고와인을마시며글을쓴다.지은책으로는시집《식민지밤노래》(1989),장편소설《하이힐을신은남자》(1992)《사흘낮사흘밤》(1994),다큐멘터리《세상을바꾸고싶은사람들》(공저,1998),산악문학《심산의마운틴오딧세이》(2002)《엄홍길의약속》(2005),작법서《한국형시나리오쓰기-심산의시나리오워크숍》(2004)등이있고,옮긴책으로는《시나리오가이드》(1999)《시나리오마스터》(심산스쿨공역,2007)등이있으며,영화화된시나리오로는<맨발에서벤츠까지>(1991)<비트>(1997)<태양은없다>(1999)<비단구두>(2006)등이있다.
현재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시나리오와와인을가르치며심산스쿨대표이다.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대표,코오롱등산학교강사,한국산서회회원,마운틴북스편집인등으로활동한다.
*그림이은
만화와일러스트를그린다.장편만화《36℃의반란》(전6권,2002)《분녀네선물가게》(전10권,2008완간예정)를출간했고,현재온라인잡지<슈가>에만화를연재중이며,각종잡지및사보에일러스트를그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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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론남부의샤토뇌프-뒤-파프(상)
이십대시절의나는스스로를‘실연의왕자’쯤된다고여기고있었다.지금에야제법쿨(cool)한척폼을잡고있지만청년시절의나는지나치게웜(warm)하다못해거의핫(hot)할지경에이르러상처를많이받는유형의인간이었다.게다가왜그리도외로움을많이탔던지혼자있기를너무도두려워했었다.덕분에쉽사리사랑에빠지고,너무도뜨겁게불타올랐다가,끔찍한상처를받고나자빠지기일쑤였다.
곰곰이뒤돌아보니이십대시절만그랬던것도아니다.십대시절부터나는만나는여자마다결혼해달라고졸라댔었다.진심으로그러길원했다.그래서어린아이가칭얼대듯그렇게절실하게졸라댔었다.하지만결과는매번다를바없었다.언제나실연이다.당시의나는한여자를사랑하면다른여자들이아예눈에들어오지도않았다.내가매우도덕적이거나충실한남자였기때문이아니다.전혀그렇지않다.
다만‘그냥’눈에들어오지않았을뿐이다.내가어찌나집요하게졸라댔던지나를만났던여자들은대개결혼을약속해주었다.하지만말뿐이다.시간이조금만흐르다보면그녀들은대개이렇게말한다.우리이제그만만나,나결혼할남자가생겼어.그럴때마다가슴은찢어진다.물론세상은당장종말을고할듯하다.그러면나는정신을잃을때까지술을퍼마시곤했다.
이십대시절의마지막실연은정말고통스러웠다.그녀역시예의그대사를읊조리며떠나가자나는도저히제정신으로존재할자신이없었다.그날로부터꼬박3박4일동안위스키를퍼마셨다.물론나는빈털터리룸펜이었으므로그모든술값을감당해준것은죄없는내친구들이다.녀석들은마치순번표라도나누어가진듯번갈아가며나타나지겨워죽겠다는표정으로내하소연을듣는둥마는둥하다가술값을계산해주고는사라져갔다.
마지막순간에기절한나는이틀쯤지난후에세브란스응급실에서눈을떴다.당시나를담당했던의사가썩소를지으며내게툭던졌던말이지금도기억난다."내평생당신만큼혈중알콜농도가높은사람은처음봤소".세상에존재하는가장슬프고웃기는격언은이런것이다.세월이약이겠지요.심지어‘세월’이라는표현조차너무거창하다.그냥‘약간의시간’만흘러가면된다.그러면속없는나는‘그녀’의결혼식에간다.결코깽판을치려거나자학하기위해서가아니다.
진심으로그결혼을축복해주기위해서였다.신부대기실에서나를맞는그녀들의표정도가지가지였다.으이구이화상아,여기까지뭐하러왔어?미안해,너도얼렁좋은여자만나.너축의금은안내고밥값만축낼거지?아참,옛날에네가나한테빌려간책,내새주소로좀보내줄래?돌이켜보면그런결혼식조차도즐거운추억거리다.오죽하면내가농담삼아밝히곤했던나의취미생활이‘결혼하기로한여자결혼식에참석하기’였겠는가?
슬프고도웃기는것이세월이지만,결코부인할수없는가르침을주는것역시세월이다.세월이라는것이많이흘러나도결혼이라는것을하고난다음마주치게되는그녀들은전혀예상할수없었던깨달음을내게선사해주었다.너그때왜나를버렸니?내가짐짓익살맞은표정으로그렇게물어보면그녀들은한결같이눈을동그랗게뜨고헛웃음부터내지르고만다.나정말기가막혀,내가널버렸다고?그럼,버렸지,나랑결혼하겠다고철썩같이약속해놓고딴남자랑결혼했잖아!
이쯤에서그녀들은혀를끌끌차며한심하다는듯한숨을내쉬기마련이다.넌말만그랬지전혀결혼할자세가되어있지못한애였어.네가친구나애인으로서는나름근사했다는거인정해.하지만남편감으로는정말빵점,아니,거의마이너스였다구.
서른을훌쩍넘기고나서야,그리고나역시결혼이라는걸하고나서야,비로소깨달았다.이십대시절의나는남편감으로서는정말최악의상대였다는것을.당시의나는돈을십원한푼도벌지못하고있었다.
돈을벌능력은커녕그럴의지조차전혀없었다.덕분에당시의애인들은언제나내게용돈을주어야만했다.하지만청년시절의경제적능력따위야아무래도좋다.문제는내가줄곤‘딴청’을피웠다는사실이다.오해없기바란다.한여자를만나면서동시에다른여자들도만났다는뜻이아니다.그렇다면내‘딴청’의대상은무엇이었던가?산이었고,문학이었고,혁명이었다.이제는모두다버젓한학부모이자우아한귀부인이되어버린그녀들은한결같이이렇게말한다.
네가그때나를얼마나외롭게했는지알아?싸우고헤어져도전화한통없고,갑자기보름씩소식이끊겨애간장이다타버린다음에쓰윽나타나서는기껏한다는말이,설악산에서바위하고왔어!도대체그런남자를믿고결혼하겠다는여자가있을수있다고생각해?할말이없다.그리고미안하다.하지만그녀들이조목조목짚어대는전과기록(!)의항목들은끝이없다.너,나랑만날때,맨날옛날애인들이야기한거알어?도대체어떤여자가자기애인의옛날여자들이야기를듣고싶대?여기에대해서는할말이많다.
속마음이야어땠는지모른다.하지만그녀들은언제나자기이전의옛애인들에대하여궁금해했고이것저것물어왔다.내잘못이라면“대사란언표된것을의미하지않는다”는것을눈치채지못했다는것이다.덕분에나는현재만나고있는그녀의‘함정’인지도모르고옛애인들과의추억들을미주알고주알보고하는병신짓(!)을일삼아왔다.그리고그결과전혀예상치못했던인연들이생겨났다.그녀들끼리서로알게되고,만나게되고,심지어는친해지게된것이다.
이제그녀들끼리의야릇한우정혹은희한한공모에대해서말할때가되었는데벌써지면의끝이보인다.시나리오작법에빗대어이야기하자면이제겨우1장을끝냈을뿐인데서둘러3장을마무리하라는격이다.어쩔수없다.이스토리는2회에걸쳐서연재하는수밖에.그래도주어진러닝타임이다되어가니일단마무리는한번지어보자.
서로를잘알고지내며심지어친하기까지한옛애인들의사회(society),그것을편의상‘전직애인연합’이라고해두자.그렇다면과연전직애인연합과가장잘맞아떨어지는이미지의와인이란어떤것일까?그복잡미묘한구성과저마다다른개성들그리고그모두를하나의완결된작품으로아우르는커다란스케일을한병에구현한다는것이가능한가?
프랑스의론(Rhone)지방은다시북부와남부로나뉜다.론북부는내가좋아하는시라(Syrah)를메인품종으로하여와인을만드는곳이다.하지만론남부는전혀다르다.흔히들론남부를‘와인블렌딩(blending)의천국’이라고부른다.그만큼다종다양한포도품종들을뒤섞어와인을만든다.심지어적포도품종과청포도품종이아무렇지도않게서로의몸을섞어전혀새로운향과맛을만들어낸다.론남부를대표하는블렌딩와인의걸작이바로’샤토뇌프-뒤-파프(Chateauneuf-du-Pape)’이다.
굳이영어로표기하자면’뉴캐슬오브포프(NewCastleofPope)’로서‘교황의새로운성’이라는뜻이다.14세기에교황청이아비뇽으로옮겨진다음여름별장으로사용했던곳이바로이지역이었기에붙여진이름이다.샤토뇌프-뒤-파프에는무려8종류의적포도품종과5종류의청포도품종이들어간다.가장섬세하고화려한블렌딩기법이적용된와인이다.각각의품종들에대한보다상세한설명은다음회를기약하는수밖에없다.
오늘은그전체적인인상에대해서만이야기하자.샤토뇌프-뒤-파프의맛을한마디로정의한다는것은불가능하다.메인품종하나만으로규정한다는것은더더욱어불성설이다.샤토뇌프-뒤-파프는다양한추억들의용광로이다.이와인에는그리움혹은향수가짙게배어있다.뜨거운열정과냉정한균형을동시에가지고있는드문와인이다.나는‘세월’이라는그슬프고도웃기는단어와이토록잘어울리는다른와인을알지못한다.전직애인연합이다.
*전직애인연합의절묘한블렌딩(하)
사람들은특정한해를저마다다른방식으로기억한다.어떤이는1988년을‘서울올림픽이열린해’라고기억할것이고,또다른이는그해를‘죽쒀서개준해’라고떠올릴것이다.유월항쟁과노동자대투쟁의전리품으로대통령직선제를쟁취했는데,막상뚜껑을열고보니어이없게도노태우가당선되어집권한해이기때문이다.아니다,그가취임한것은1987년연말이었던가?벌써20년가까이나과거로밀려난해이고보니기억마저가물가물하다.
뭐아무래도상관없다.내기억속에남아있는1988년은아주선명하다.나는그해를‘어른이된이후처음으로애인없이생일을맞은해’였다고기억한다.꿀꿀한생일을코앞에둔어느날이었다.형며칠전에세브란스에실려갔었다면서?깔깔대는웃음소리밑에연민을감추고그렇게내게전화를걸어온친구는그르나슈(Grenache)였다.낼모레가형생일인데만날사람도없겠네?나랑점심먹을래?나는고맙다는말대신퉁명스러운투정을부렸다.
너지금나약올릴라그러는거지?그르나슈는여전히예의그하이톤의웃음소리를터뜨리며제멋대로약속을잡아버렸다.애인없다고저혼자방구석에쳐박혀찡찡대지말고좋은말할때나와!하지만정작생일날아침이되자그녀는약속을번복했다.12시말고11시,그한정식집말고고옆의커피숍에서만나.그르나슈는이십대중반의한세월을함께보냈던애인이다.외모는전형적인톰보이스타일인데성격마저그러하여흡사남동생처럼느껴질때도있었다.
사람들은묻는다.한때애인이었다가이후친구로남을수도있는가?내겐그런친구들이많다.그르나슈역시그런친구다.내가뭐랬어?루싼느(Rousanne),걔는첨부터형이랑안맞았다구,어쩜그렇게여자보는눈이없을까?나는커피리필을시키며그녀에게눈을흘겼다.너지금그걸위로랍시고하는거야?아침부터자는사람불러내갖고기껏한다는소리가…그르나슈는그러나대뜸제멋대로내말끝을잘라먹는다.나도바쁘거든?형만날려고회사에다가거짓말하고나온거거든?그러니까고마운줄이나아셔.
사실은고마웠다.그래서한정식집으로이동해자리를잡고마주앉으면볼멘소리로나마고맙다는이야기를하려했었다.그런데그녀는한정식집앞까지가서는팩돌아서며내어깨를떠미는것이었다.꼭점심같이먹고싶었는데나는회사로돌아가야돼.어이가없었다.야,너,지금정말…그럼나혼자밥먹으라고?그르나슈는귀엽고도음흉한미소를지어보이며활짝웃었다.형혼자밥먹는거무지싫어하는거나도잘알아.그러니까걱정붙들어매고일단들어가보라니깐?그녀는내뺨에살짝키스를해주고는막무가내로내등을떠다밀었다.
생일축하해,힘내고,건강하고,밥잘먹고!여전히사태파악을못한내가한정식집현관에서다시나오려할때등뒤에서무르베드르(Mourvedre)의목소리가들렸다.오빠여기,나여기있어!정갈한한정식집의작은독방에무르베드르와마주앉아있으려니헛웃음부터터져나왔다.그르나슈가연락한거니?무르베드르도손으로입을가리며웃었다.저언니를누가말리겠어?전채요리를내접시위로놓아주고있는무르베드르는눈부시게아름다웠다.
그르나슈보다일년쯤전에만나던친구인데당시에는박사과정에재학중이었다.어쩐지…이집에서점심먹자고했을때내가눈치챘어야하는건데.무르베드르는어이없다는듯도리질을하면서도편안하게말을이어갔다.여기이제내단골집도아니고,오빠하고나만의단골집도아니야.나가끔씩그르나슈언니하고도여기서만나서밥먹고그래.언니가저번에프랑스갔다올때내논문자료들도이만큼챙겨줬어.
무르베드르는더이상철부지여대생이아니었다.허랑방탕한애인때문에가슴앓이를하고이룰수없는꿈때문에세상을무작정증오하던그런아이가아니었다.나와헤어지겠다고결심하게만들었던새애인하고는지금도매주함께성당에다닌다고했다.확정된논문의청사진을그려보일때는젊은소장학자로서의포부와가능성이내눈을부시게했다.나랑헤어진다음에훨씬더멋진사람이된거같구나.무르베드르는수줍게웃으면서도부드럽게나를타박했다.
오빠도이제정신좀차려,언제까지그러고살거야?나는멋쩍게꼬랑지를내렸다.예전에내가너한테잘못했던거,이제는다잊어버렸니?그녀는후식으로나온녹차를홀짝거리며피식웃었다.잊지는못하지,하지만용서는해줄게.정식집앞에서헤어질때그녀는내게새로운약속장소를알려줬다.인사동의그찻집알지?여기서택시타면십오분안에갈거야.이제는감을잡았다.찻집이름만듣고도그곳에누가나와있을지빤했던것이다.
맙소사,비오니에(Viognier)하고도약속을잡아놓은거야?넌비오니에아주질색했잖아.무르베드르는자신의연구실로돌아가기위해육교를올라가며손을흔들었다.옛날얘기야,걔도알고보니참근사한얘였더라구.만나면손한번잡아봐,요즘도예에빠져서손에각이제대로잡혔어.비오니에는그르나슈와헤어진다음만났던친구다.도예가남편을만나아이도낳고잘살고있다는소식은익히듣고있었다.그남편은내게자기가만든근사한재떨이를하나선물해주기도했었다.
비오니에는나를만나자마자대뜸결혼이나빨리하라고윽박질렀다.애를낳아봐,인생의완전히다른차원이열려.언젠가네가왜살아야되는지그이유를모르겠다고했지?애가그걸가르쳐줄거야,이제허튼짓들좀그만하고빨리결혼해서애를낳으라구.그녀는두툼하게굳은살이박힌손으로내뺨을어루만지며위로아닌위로를해주었다.얼마전에또실연당했다면서?그래서그런지얼굴이말이아니네…내가좋은차(茶)가져왔거든?집에가져가서아침저녁으로꼭마셔,맨날술만퍼먹지말고쫌.그날은하루종일그런식이었다.
1988년의내생일,나는현직애인을가지고있지못했지만,자기들끼리연락을취하여서로번갈아가며나를만나준전직애인들을여럿만났다.그중의제일압권은맨마지막에만난쌩쏘(Cinsault)였다.십대후반의한시절을나와함께보냈던그녀는일찌감치결혼하여아이를두명이나낳았는데,마땅히그아이들을맡길데가없어둘다데리고나온것이다.사내아이는막초등학교에입학한상태였고딸아이는아직유치원에도가지못한꼬마였다.나는쌩쏘와함께그아이들을데리고서울랜드로갔다.
우리는아이스크림을먹으며깔깔댔고청룡열차를타며꽥꽥소리를질러댔다.해가뉘엿뉘엿해져서우리들의그림자가땅바닥에길게누울즈음이었다.야릇한행복감이온몸을감쌌다.나도누군가와결혼하여이렇게아이들을낳고그들과함께청룡열차를타러다녔으면좋겠다는생각이너무도간절하게피어올랐다.
훗날내가결혼을하고아이를갖게되었을때누구보다도기뻐해준사람들중의하나가바로이전직애인연합이다.내가작가가되고돈도제법벌게되었을때누구보다도대견(?)하게여겨준사람들도바로이들이다.그들은애증이마구뒤섞인표정으로이렇게말했다.네가이렇게사람될줄알았더라면그때좀생각해볼걸그랬네.너예전에맨날나한테용돈뜯어갔지?이제나볼때마다맛있는거사줘야해!그들과나는같은세상을살아간다.
쌩쏘의아들이대학입시를치룰때가장믿을만한상담자는바로나였다.프랑스에있는그르나슈의딸에게한글로된팝업북을선물해준것도나였다.내딸에게리틀타익스자전거를물려준것은무르베드르였고,심산스쿨을열었을때도착한멋진화분을직접만들어준것은비오니에였다.
그르나슈,시라,무르베드르,까리냥,쌩쏘,마르싼느,루싼느,비오니에,클레레트…그들각자는모두결코대체될수없는자신만의개성을가지고있다.하지만이들이함께몸을섞으면그이전에는존재할수없었던전혀새로운작품이하나탄생한다.그것이바로샤토뇌프-뒤-파프이다.1988년의그날처럼전직애인연합의멤버들을모두한꺼번에만나볼수있는그런축복받은날이내삶에다시올수있을지모르겠다.만약그런날이온다면그날마시게될와인이야이미정해져있다.바로다양한개성들이조화롭게몸을섞고있는프랑스론남부의걸작,샤토뇌프-뒤-파프이다.
-출처:심산의와인예찬http://www.simsansch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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