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반의 가치는 아무도 가지않은 험한 길에 있다” *-

‘머메리즘’의창시자앨버트머메리


[심산의산그리고사람]<8>"등반의가치는아무도가지않은험한길에있다"

‘루트개척’으로새알피니즘창조…알프스황금시대후’초등’의의미새로써

머메리는마터호른의‘보다어려운루트’인즈무트능선과푸르겐능선의초등자로서명성을떨친당대의산악인이다.

앨버트머메리는전형적인영국부르주아출신으로서‘산업생리학’(1891)이라는경제학저서까지출간한인텔리산악인이다.

크랙등반의시범을보이고있는머메리.그가등반하고있는모습을찍은유일한사진이다.

북한산의최고봉은백운대(836m)다.백운대정상에서서사위를돌아볼라치면바로지척에솟아있는인수봉(810m)이한뼘쯤아래로내려다보인다.그럼에도불구하고인수봉에올라서있는사람이보다대단해보이는것은무엇때문일까.

인수봉정상에서백운대를바라볼때도마찬가지다.비록보다낮은곳에서있지만상대적으로우쭐하고뿌듯한느낌을만끽하기마련인것이다.문제는고도가아니라난이도라는것이분명해지는순간이다.

백운대하나만으로문제를좁혀봐도사정은마찬가지다.백운대에오르는방법에는여러갈래가있다.가장손쉬운일반적루트는위문에서부터정상까지연결되어있는쇠밧줄을붙잡고올라가는것이다.보다어려운루트로는인수봉과마주보는바위능선의호랑이굴크랙을통과하는길을꼽을수있다.

절경으로유명한원효리지를타고오르면짜릿한암릉등반의묘미를마음껏즐긴다음정상에가닿을수도있다.백운대남면에나있는‘신동엽길’이나‘녹두장군길’은암벽등반루트중에서도난이도와공포감이높은길로정평이나있다.

다만백운대정상에오르는것이목표라면쇠밧줄을붙잡고올라가면그만이다.그렇다면굳이호랑이굴크랙이나원효리지나녹두장군길을이용하여오르는사람들은도대체뭔가.그들은미련한바보들일따름인가.그렇지않다.그들은정상이라는‘결과’보다는그곳에이르는‘과정’을더욱중시하는사람들이다.

그들은‘남들이가지않은길’을‘보다어려운방식’으로오르는것이야말로등반의진정한가치라고생각하고있는것이다.이런사고방식을‘머메리즘’이라고한다.머메리즘이란간단히말해서‘머메리가생각하는방식’이다.이러한사고방식의창시자는두말할것도없이앨버트프레드릭머메리(1855~1895)다.

머메리즘의출현은알프스황금시대의종언과깊은관련이있다.등반사학자들에따라약간의편차가있기는하지만알프스에서의황금시대란대체로19세기중엽을지칭하는것이다.보다구체적으로는1854년앨프리드윌스가베터호른을초등한시기부터1865년에드워드윔퍼가마터호른을초등한시기까지를뜻한다.

이10여년의세월동안4,000m가넘는고봉60개를포함하여모두149개의알프스봉우리들이초등되었다.그야말로눈에띄는봉우리란봉우리에는모두다사람들이올라갔던것이다.그렇다면그이후의사람들은더이상초등의기쁨을누릴수없게된것인가?그렇지않다고항변하며‘등반의가치’를새롭게정의한사람이바로머메리다.

그가주장한것은“보다어렵고다양한루트(MoreDifficultVariationRoute)”라는한마디로요약된다.남들과는다른길로올라라.보다어려운루트로오르는것이보다가치있는등반이다.

지도를보거나가이드를따라오르는것은부끄러운짓이다.그누구도도전해보지않은길을개척하며굳이가장어려운루트를선택하여오르는것이야말로새로운알피니즘의핵심이다.

머메리의주장은전복적이고,위험하며,매혹적이다.하지만머메리즘덕분에후대의산악인들은무한한개척등반및초등의가능성을만끽할수있게되었다.

호랑이굴크랙과원효리지와신동엽길이탄생하게된것도그때문이다.머메리는목소리만높일줄아는책상물림이아니었다.그는자신의사상을직접행동에옮겨숱한루트를손수개척등반했다.마터호른의초등자는물론에드워드윔퍼다.하지만즈무트능선을통한마터호른의초등자도,푸르겐능선을통한마터호른의초등자도모두머메리였다.

이놀라운발상의전환은이후알피니즘의역사를뿌리째뒤흔들었다.어디에올랐느냐보다는어떻게올랐느냐를더욱중시하는현대등반의역사는곧머메리즘의역사이기도하다.한국산악계의큰어른인김영도의다음과같은명제도그뿌리는머메리즘에가닿아있다.“문제는고도(altitude)가아니라태도(attitude)다!”

청년머메리는당대의반항아였다.하지만이후세대에게그는엄격한잣대이자든든한맏형이되었다.머메리즘이반드시등반의세계에만적용되는것은아닐것이다.이따금씩너무타성에젖어남들이닦아놓은길,빤해보이는쉬운길만을따라가려하는나자신을발견할때마다머메리는예의그매서운눈길을부라리며단호하게쐐기를박는다.너자신만의길을개척하며앞으로나아가라.그렇지못하다면아무런가치도없는일이다.

▲8,000m급낭가파르바트최초등반중사라져

머메리는인류최초로히말라야8,000m급산에도전장을내민산악인이었다.낭가파르바트를선택한것은아무래도유럽에서가장가깝다는지리적이유에서일것이다.

앨버트머메리는히말라야8,000m급산에도전장을내민최초의산악인으로서도유명하다.그는40세가되던1895년6월,그의유일한산악문학저서가된‘알프스에서카프카스로’의원고를출판사에넘긴다음,인도의봄베이로떠났다.당시로서는아무도상상조차하지못했던낭가파르바트(8,126m)에오르기위해서였다.

전인미답의경지였으니제대로된정보나지도가있었을리없다.그는두차례나등정시도를했으나모두좌절한다음새로운루트를찾아보기위하여또다른능선을넘어갔다.당시그가부인에게보낸마지막편지가인상적이다.“설령낭가파르바트에서실패한다하더라도,이거대한봉우리를보고훈자와러시아국경저편에있는위대한산들을바라보았으니,후회는없소.”

그이후머메리의모습을본사람은없다.최초의도전자이자최초의희생자가된셈이다.19세기의산악문학을대표하는그의명저‘알프스에서카프카스로’의마지막구절은마치자신의운명을예견하고있는듯하다.“등산가는자신이숙명적인희생자가되리라는것을알면서도산에대한숭앙을버리지못한다.”

-글/산악문학작가심산/한국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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