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원정대장 크리스 보닝턴 *-

[심산의산,그리고사람]<10>크리스보닝턴(1934~)


부와명성모두거머쥔’최고의원정대장’책쓰고강연하고…직업산악인길개척
70대나이요즘에도틈틈히암벽등반하며,지난해12월엔한국을방문하였다.

영국스코틀랜드오크니의해변에있는수직고140m의사암벽올드맨오브호이.크리스보닝턴은1966년이곳을올랐다.

얼마전딸이있는영국에다녀왔다.달새는달만생각하고술꾼은술만생각한다던가.나같은종류의인간은어딜가나제일먼저등산장비가게부터돌아보고그다음에기껏찾아간다는곳이산악문학도서코너다.런던에서제일크다는대형서점에들어서자내입이헤벌쭉벌어졌다.

벽의한면전체가산악문학으로만가득차있었던것이다.내가거의반나절동안이나그앞에퍼질러앉아이책저책을뒤적이자서점매니저가말을붙여왔다.“특별히찾는책이있나요?”나는최종적으로다섯권의책을챙겨일어나며이렇게말했다.

“여기에는책이많은것같지만딱두종류뿐이네요.크리스보닝턴이직접쓴책과그에대한언급이실려있는책.”

지난해영국여행때도마찬가지였다.내가꼭가보고싶었던곳은런던의웨스트엔드도아니고아일레이의싱글몰트위스키공장도아니었다.그곳은레이크디스트릭트였다.이유는단하나,그곳이암벽등반의발상지였기때문이다.

그곳을한바퀴둘러본다음의감상은?우리의인수봉과선인봉이너무도자랑스러웠다.레이크디스트릭트를빠져나올때나는또굳이켄달에가봐야한다고우겼다.“켄달은아무것도없는도시야.”그렇게항변하는아내에게나는대답했다.“그곳은국제적인산악영화제가열리는도시야.그산악영화제의조직위원장이바로크리스보닝턴이고.”

‘심산의산,그리고사람’이라는연재가석달째로접어들자이따금씩독자들의메일을받는다.그들은묻는다.“세계적인산악인들이란하나같이그렇게요절할수밖에없는건가요?”그렇지않다.물론젊은나이에일찍세상을떠난다는것은영웅신화를만드는데일정한기여를한다.늙은’재니스조플린’이나’체게바라’를떠올리기란쉽지않다.

하지만진정한영웅들이란존경받으며늙어가는사람들일것이다.젊은날의영예를훼손하기는커녕끝없는자기혁신으로늘새로운경지를개척해나가는사람.그렇게늙어가거나천수를다한‘행복한산악인’들을보면가슴한켠이뜨거워진다.영국의크리스보닝턴이바로그런사람이다.

본명은크리스찬존스토리보닝턴이다.1996년영국여왕에게서기사작위를받았으니정식으로거명하자면이제그의이름앞에‘써(Sirㆍ卿)’를붙여야한다.하지만우리에게익숙한그의이름은여전히크리스보닝턴이다.1934년영국햄스테드에서태어난그는10대중반부터암벽등반에심취했었다.하지만그가택한진로는엉뚱하게도군인이되는것이었다.

그는왕립군사학교를졸업한이후왕립탱크여단에임관하여3년간북부독일에주둔하면서군수색부대의등산교관으로근무했다.이시기에영국인최초로알프스드뤼남서필라를올랐다는것은특기할만한사항이다.1960년은이군인-등산가최고의해였다.영국-인도-네팔군(軍)원정대의일원으로참가해세계최초로안나푸르나2봉에오른것이다.

“저는군생활을통해참으로많은것을배웠습니다.기획,조직,지휘,운영,그리고책임지는자세.저는군대에서배운이모든원칙들을그이후에꾸린저의원정대에고스란히적용시켰습니다.”서른살이되기전에그는자신의삶을크게바꿀두번의결단을내린다.

첫째는군인과산악인사이의결단.그는주저없이산악인의삶을택했다.두번째는직장인과산악인사이의결단.산에만오르면서생활을꾸려갈수는없다.그래서두번째결단이야말로가장힘겨웠노라고그는실토한다.하지만유니레버라는회사에취직하여마요네즈외판원으로9개월동안일한다음그는과감하게사표를내던졌다.

“남은삶동안마요네즈를팔아야한다는사실이너무끔찍하게느껴졌어요.대신저는‘직업산악인’이되기로결심했죠.원정대를기획하고조직하고기업들로부터협찬을받아오는일,그리고원정의결과로책을쓰고사진을판매하는일등을통하여생계를꾸려나가는방식입니다.”

오늘날에는이러한활동들을당연하게여긴다.하지만크리스보닝턴이이런사업을막시작하던1960년대에만해도너무도생소하게여겨졌던일들이다.이를테면그는길없는곳에길을내는‘개척등반’을한셈이다.요즘말로표현하자면‘벤처사업가’다.그는이벤처사업에서누구와도비견할수없는커다란성공을거두었다.

단지아이디어하나로만성공한것은아니다.그는세상을깜짝놀라게할만한원정을기획하고,최고의산악인들로원정대를꾸렸으며,기어코그들을정상에올려놓았다.그치열했던과정을일일이카메라에담고하나같이두툼한하드커버책으로만들어세상에내놓았다.그가‘20세기최고의원정대장’이라고불리는것은결코우연이아니다.그가‘리더십’문제에관한한세계최고의강연자로손꼽히는것은당연한결과다.

크리스보닝턴을‘성공한직업산악인’이라고부르는것은옳다.하지만그렇게만이야기한다면그의매력을절반도이해하지못하고있는것이다.그는‘진정으로등반을즐기는’사람이다.언젠가그가한국을방문했을때누군가물었다.“당신은8,000m이상의산14개를오르는것에는관심이없습니까?”크리스보닝턴은그매혹적인푸른눈을동그랗게뜨며이렇게반문했다.“그런등반이정말즐거울까요?”

그는자신이정말하고싶은일을하며그일로부와명성을얻은행복한사람이다.올해72세가된크리스보닝턴은아직도레이크디스트릭트에살며틈날때마다암벽등반을즐긴다.내년에다시그곳을방문하게되면그의작은시골풍별장에꼭들러보고싶다.

◆크리스보닝턴의세계초등기록과저서들

14권의산악문학저서…작가로도유명하다.

1960년에안나푸르나2봉에올랐다.1961년에는히말라야의눕체에올랐고,알프스의몽블랑을새로운방식(프레니중앙필라를통하여)으로올랐다.1963년에는남미파타고니아의파이네중앙탑에올랐다.1965년에는브루야르오른쪽필라를통하여몽블랑에올랐다.1966년에는아이거북벽을직등했고,기이한형태의바위탑올드맨오브호이에올랐다.

1970년에는안나푸르나남벽을올라‘히말라야거벽등반’의시대를열었다.1974년에는창가방에올랐다.1975년에는3년전에실패했던에베레스트남서벽에올랐다.세계등반사에길이남을역사적등반이다.1977년에는카라코람의오그리(바인타브락)에올랐다.이등반에서치명적인부상을당했으나기적적으로생환했다.1980년에는중국신장성의콩구르에올랐다.1983년에는인도의쉬블링서봉에올랐다.

그는직업산악인으로나선1966년에‘나는산에오르기로결심하였다’를출간한이후지금까지모두14권의산악문학저서를집필하였다.이들중‘안나푸르나남벽’(1971)과‘에베레스트의나날들’(1986)은세계적인베스트셀러가되었다.1992년에출간된‘산악인들’은훌륭한세계등반사교재로쓰이고있으며,BBC14부작다큐멘터리로제작되어방영되기도하였다.국내에출간된책은산뿐아니라바다,사막,극지,하늘등모든분야의모험가들을다룬‘퀘스트’(생각의나무,2004)하나뿐이다.

-글/산악문학작가심산/한국일보200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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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분야에서든시대를앞서가는사람이있다.세계산악사를살펴보면뚜렷한족적을남긴많은등반가들을찾을수있다.그런데이런선구자들가운데도오랜세월자신만의색깔을고수해온몇안되는산악인중에서나이가들어늙어가면서도새로운경지를개척하며도전을멈추지않는영국의크리스보닝턴경(SirChrisBonington·74)은산악인의존경받는인물이다.

영국을대표하는산악인이며‘알피니즘의살아있는전설’로불리는그가2007년12월초한국을방문했다.그의이번방한은이랜드그룹에서새롭게진행하는아웃도어브랜드버그하우스(Berghaus)명예회장자격으로이뤄졌다.브랜드홍보에의미를둔방문이지만,그의첫방한은우리나라산악인들에게많은관심을끌었다.

팔순을바라보는영국의노산악인은방한첫공식일정으로북한산산행을택했다.평생을등산의세계에서살아온그가한국의산에대해궁금증을갖는것은당연한일.12월5일우이동오투월드에서엄홍길대장과김창호씨등한국산악인들과해우하고산행을시작했다.그는산을오르며북한산의첫인상에대해말문을열었다.

▲북한산에올라인수봉을배경으로포즈를취한크리스보닝턴경.
“인수봉을보니등반하고싶은열망이가슴속에서일어납니다.저렇게멋진바위를가지고있는한국산악인은정말행운아들입니다.전세계를다녀봤지만,한나라의수도에이런크고아름다운암장이있는곳은처음봅니다.”

그의반응은이전에한국을방문했던여러해외산악인들과크게다르지않았다.대도시인근에이런대형암장이자리한경우는세계적으로도드물기때문이다.하지만그는인수봉과백운대,영봉등의지명을정확히기억했고수시로카메라를꺼내사진을찍었다.확실히저명한저술가다운남다른모습의산악인이었다.

북한산영봉에오른그는건너편에솟은인수봉에대해큰관심을보였다.전체높이가얼마나되는지,루트가몇개나있는지,암질은어떤지등많은질문을던졌다.특히확보용볼트에대해자세히물었다.얼마나많이사용하는지,루트의그레이드에영향을미치는정도가어느정도인지등도궁금해했다.지금도바위타기를즐기는현역클라이머다운호기심이었다.

이미잘알려진대로크리스보팅턴은뛰어난등반가인동시에세계적인산악저술가다.남들이찾지않는어렵고멋진산을골라오른것은물론,일찍이그기록을책으로엮어꾸준히세상에내놓았다.1966년첫저서인<나는산에오르기로결심했다(IChosetoClimb)>이후,2005년까지20여권의책을출판하며왕성한저술활동을펼치고있다.지금도많은산악인들이그의책을통해등반과모험의세계에눈을뜬다.우리나라에번역되어출간된책은등반뿐아니라바다,사막,극지등모든분야의모험을다룬<퀘스트(Quest)>뿐이다.

직업산악인의삶택해성공거둬

▲엄홍길대장과함께북한산을오르고있는보닝턴경.
“77년오거봉초등반이가장기억에남아”

12월5일저녁7시서울출판문화회관에서열린강연회를통해한국산악인들은그의리더십과만나는기회를가졌다.그는이자리에서50여년동안펼친자신의등반을1시간20분여에걸쳐축약해소개했다.보닝턴이라는거인의일생을조명하기에는턱없이부족한시간이었다.하지만우리산악인들과크리스보닝턴의만남은잠깐이라도소중하고유익했다.

그는원정대장으로굵직한성공을거두기도했지만,이미70년대부터수많은미답봉을직접오른바있는뛰어난등반가다.그는강연회에서자신에게전환점이됐던것들을골라크게세부분으로주제를나눠등반을소개했다.가장먼저꺼낸이야기는카라코룸의오거봉(바인타브락)초등스토리다.그는이봉우리를가장험난하고기억에남는등반으로꼽았다.

“오거봉등반은에베레스트남서벽등반대에함께했던더그스코트의제안으로시작됐습니다.6명이라는작은팀으로휴가처럼생각하고시작한등반이었는데,제가겪은가장고통스러웠던원정으로기억합니다.하지만저는대규모원정대보다는이런알파인스타일의등반을훨씬좋아합니다.”

영국에서오거봉이라부르는바인타브락은이들이초등한77년까지20여팀이도전했지만아무도성공하지못한봉우리였다.또한더그스코트와크리스보닝턴이오른뒤에도2004년까지재등에성공한팀이없었을정도로어려운봉우리다.

이들은이괄목할만한등반을끝내고하산하는도중심각한사고를당했다.스코트는두다리가부러졌고보닝턴은여러대의갈비뼈를다친것이다.다행스럽게이들은며칠동안의악전고투끝에무사히하산할수있었다.그가이등반을가장기억에남는것으로꼽은이유에는분명생사를넘나든경험이한몫을했다.

▲김창호씨와등반기를보며대화를나누고있는보닝턴경.
오거봉등반에이어그는1981년중국이개방한미답봉콩구르(Kongur·7700m)에도전한이야기를꺼냈다.이봉우리는당시세계의미답봉가운데두번째로높은산이었다.그는피터보드맨,조태스커,딕렌쇼등과함께나흘동안설동에서비박하며분투한끝에정상에섰다.

영국을대표하는최고등반가들이함께한이등반은매우성공적이었다.하지만이듬해그가대장으로조직한에베레스트북동릉원정에서보드맨과태스커가사망해콩구르는이들의마지막등반으로남게됐다.렌쇼역시그이후타계해콩구르초등팀가운데생존한사람은이제보닝턴뿐이다.에베레스트에서동료를잃는아픔을겪었지만,그의등반에대한열정은꺾이지않았다.

"한국다시찾아인수봉오르고싶다”

그는자신의최고등반으로1983년인도가르왈히말의시블링초등을꼽았다.동네치과의사인짐포더링햄과단둘이이룬성과였다.그의표현을빌면,시블링은‘인수봉처럼아름다운화강암벽’이지만,한사람이서있기도힘든칼끝같은봉우리라고한다.그는순수한알파인스타일로오른시블링등반을가장자랑스럽고재미있었다고말했다.시블링등반은남들이가지않은길을택하는그의등반철학을잘보여준사례라하겠다.


▲크리스보닝턴경강연회장전경.200여명의산악인들이모여성황을이뤘다.

강연회마지막부분은다양한모험과등반을동시에펼친50대이후의활동에대한것들이었다.그는1983년남극빈슨매시프등정에이어1985년에베레스트를남동릉으로올랐다.세계최고봉을가장어려운루트로오른등반대를지휘하긴했지만그가직접에베레스트를오른것이이것이처음.미답봉을추구하는그의원칙을꺾은첫등반이었다.

그는강연회를마치며“나도건강이허락하는한10년정도도전을계속할것”이라며,“세계곳곳에지금까지사람의발길이닿지않은봉우리들이산악인의도전을기다리고있다.한국산악인여러분도도전을멈추지않기바란다”고말해큰박수를받았다.

그는한국에서지내는동안수행한업체관계자들이놀랄정도로처음보는한국산악인들과스스럼없이어울렸다.주한영국대사를만난자리에서도‘산악인들끼리는어디서나잘지내니걱정하지말라’고했을정도다.그는언어의장벽도산이라는공통분모앞에서는결코문제가되지않음을잘알고있는사람이었다.

또한그는방한일정동안여러차례한국을다시방문하고싶다고말했다.강연회다음날영국대사관에서열린버그하우스런칭기자회견에서도이러한뜻을재차밝혔다.다음번한국에올때는반드시인수봉을오르고싶다는말도덧붙였다.북한산영봉에서인수봉을바라보던그뜨거운눈빛의의미가무엇이겠는가.알피니즘의전설크리스보닝턴과한국의인연은아직도진행형이다.머지않은미래에인수봉정상에선그의모습을기대해본다.

-글김기환기자/사진허재성기자/월간산[459호]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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