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지 탐험에 한평생을 투자한 ‘아브루치 공’ *-

오지탐험에한평생을투자한’아브루치공’(1873~1933)

伊왕족신분잊고山에미쳤던로맨티스트…혈통의편안함보다는모험즐겨
알래스카엘리어스산세계초등…阿·북극등오지탐험에한평생

아브루치가사진가비토리오셀라와함께오른아프리카중동부의루웬조리산.

인류역사상지구전역을커버하는본격적인탐험과등반의시기를꼽으라면19세기말부터20세기초까지이다.그리고이시기를가장격정적으로보낸단한사람을꼽으라면그는당연히이탈리아의아브루치공이다.그는알프스는물론이거니와히말라야와알래스카그리고아프리카와북극등지에서이전까지는아무도가본적이없는신천지에숱한발자국을남겼다.

그는또한평생이루지못할사랑과꿈을가슴속에품고살았던장엄한로맨티스트이기도했다.아브루치는이탈리아사보아왕가(1861~1946)의자손이다.덕분에본명이무척길다.그의공식적인이름에는언제나‘루이지아메데오디사보아아오스타’라는기나긴수식어들이따라붙는다.하지만등반사에서는간단히줄여그저‘아브루치’혹은‘아브루치공’(그는정식으로‘공작’의칭호를받았다)이라부른다.

19세기말의왕족혹은귀족들은대개해군지휘관으로키워진다.아브루치역시그러한과정을밟아16세에이미해군소위계급장을달고1년반의기간동안대서양과태평양을항해했다.그가당시스페인의왕으로재위했던아버지의부음을받은것은이항해기간동안이었다고한다.

흥미로운것은그가20세를막넘어설즈음스위스체르마트에서앨버트머메리와만났다는기록이다.당시머메리는마터호른즈무트능선를초등하여이미유럽산악계의선두주자로자리잡고있었다.하지만그가올랐던즈무트능선은너무도험준하여재등이이루어지지않고있었다.청년아브루치는당돌하게도머메리에게자신과함께재등해달라고졸랐다.

머메리는청년의패기가마음에들었던지기꺼이그를데리고다시한번마터호른에올랐다.그리하여아브루치는마터호른즈무트능선의재등기록을갖게된다.머메리는여기서한걸음더나아가이이탈리아청년을영국산악회회원으로받아들인다.이것이1894년의일이니머메리가낭가파르바트로원정을떠나실종되기꼭1년전의일이다.아브루치로서는선배세대최고의산악인으로부터마지막축복을받은셈이다.

그는훗날머메리를기리기위해낭가파르바트원정을계획했으나때마침인도전역을휩쓴전염병때문에포기하고만다.하지만“머메리는언제나내가슴속에있다”며아브루치는회상한다.“그는나를왕족의한사람으로대하지않고대등한산악인으로대해줬다.나는그를마음속깊이존경했고,그와의우정을영원히기억할것이다.”

아브루치의이름을온세상에떨친것은그가24세때해치운알래스카세인트엘리어스산(5,489m)세계초등기록이다.이산이매력적인등반대상지로떠오른것은이미오래전의일이었지만접근자체가어렵고너무도혹독한추위가가로막아이전까지의모든시도들이좌절되고있었던상황이었다.

왕족출신인아브루치는혈통이안겨줄편안한삶보다는모험과등반에더큰가치를두었다.그가24세때매서운추위를뚫고세계최초로오른알래스카의세인트엘리어스산.

아브루치는20명의대원들이50일동안버틸수있는3톤의식량을썰매에싣고빙하지대를횡단하는대캐러밴을펼친끝에끝끝내이산의정상에오른다.당시그와동행했던산악사진가가이탈리아산악회의창립자퀸티노셀라의조카비토리오셀라인데,현재‘세계산악사진의아버지’로불리는인물이며,이후세상을떠날때까지아브루치와깊은우정을나눈것으로유명하다.

이후아브루치의열정과도전은당시까지지구상에남아있던모든미답의극지와오지에집중된다.그는1899년121마리의개가끄는개썰매를지휘하며북극점에도전한다.아브루치는손가락을절단하고동상과설맹으로고통받으면서도집요하게앞으로나아갔으나결국북위86도지점에서돌아서고만다.당시아브루치원정대가식량마저소진된채필사의생환작전을벌이던과정은극지방탐험사의전설로남아있다.

1909년의K2도전역시초기히말라야등반사의신화이다.그는당시남동릉6,700m까지도달했는데,이능선은현재‘아브루치능’이라고불린다.훗날1954년의이탈리아원정대가K2세계초등에성공할때채택한루트가바로아브루치능이다.K2가자신의웅장한자태를사진을통하여세상에알린것도당시아브루치와동행한비토리오셀라의카메라를통해서였다.

드라마의주인공에게로맨스가빠질수없다.아브루치와미국부호의딸캐서린앨킨스의사랑은당시‘세기의로맨스’로세상을떠들썩하게했다.캐서린의아버지는당시미국공화당대통령후보로거론될만큼유력한정치인이자대단한부호였다.이탈리아왕족의아들과미국부호의딸사이에는그러나너무도많은장애물들이얽혀있었다.

아브루치는사실‘무늬만왕족’이었지별다른재산을모아놓지도못한상태였고,무엇보다도탐험과등반에미쳐있는가난한산사나이였을뿐이다.이두사람의사랑은결국이루어지지않았다.하지만아브루치는평생독신으로살면서캐서린과편지왕래를계속했다.전형적인로맨티스트의사랑법이다.

혹자는아브루치가‘단지왕족이라는이유만으로’그를폄하한다.

그가국가적차원의대규모원정대를꾸릴수있었던데에는물론왕족이라는출신성분과그에따른재정적뒷받침들이큰역할을해냈을것이다.하지만모든왕족들이다아브루치처럼탐험과등반을해낼수있는것은아니다.그에게산은자신의혈통보다소중했다.그는왕가의일원으로서세상을살아간것이아니라탐험가와등반가로서세상을살다간것이다.



"생산과분배,소유를함께"소말리아에’아브루치빌리지’농촌공동체세워

아브루치는1차세계대전당시연합국함대사령관으로서맹활약을펼쳐대단한명성을얻었다.하지만왕가에서는이‘제멋대로인왕족’의인기가높아지는것을반가워하지않았다.결국아브루치는해군제독직을사퇴하고아프리카로향한다.그는일찍이아프리카자이레의루웬조리산(4,829m)의세계초등기록을가지고있었고,1906년에는루웬조리산군의4,000m이상의산14개를모두오른적도있다.

원시의대륙아프리카는아브루치의이상향이었다.그는아프리카의소말리아에서전혀새로운삶의방식을꿈꾸었다.생산과분배그리고소유를함께하는일종의사회주의적이상을가슴에품고새로운농촌공동체를세우려한것이다.1926년3,000명의소말리아인과200명의이탈리아인들이16개의작은마을로구성된새로운공동체를세운다.바로저유명한‘듀크아브루치빌리지’이다.

그는1933년세상을떠날때까지이농촌공동체를위하여자신의모든것을다바쳤다.그가꾸었던꿈이현실속에서실현되려면몇세대의세월이필요할지도모른다.그것은아직도진행중인꿈이다.1976년,소말리아내전이발발하자아브루치조카의아들이그의묘지를이탈리아로이장하려했다.당시그것을만류한소말리아원주민대표의읍소가가슴을친다.

“우리의조상들이그의곁에묻혔고,우리역시죽고나면그의곁에묻힐겁니다.그는언제나우리를보호해왔고앞으로도그러실겁니다.이곳은우리의성지입니다.다른곳으로모셔가실수없습니다.”현재아브루치의묘지는여전히소말리아에남아있다.

[심산의산그리고사람]<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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