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영웅’게리헤밍
알프스선열정의등반가,山아래선’고독한히피’ 프티드뤼서벽·에귀뒤푸남벽초등…목숨건구조로’알프스영웅’찬사 불우한환경극복못하고방황의나날…우울증앓다36세젊은나이에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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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요세미티의하프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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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8월13일,알프스의프티드뤼서벽에서는두명의독일인등반가가조난상태에빠져있었다.즉각구조대가급파됐지만상황은절망적이었다.상대적으로수월한노멀루트로정상에오른후조난지점으로하강하려했던제1구조대는강풍과폭풍설에발이묶여버렸고,서벽을가로질러북서릉으로접근하려던제2구조대역시피톤조차박아넣을수없을만큼꽝꽝얼어버린바위벽앞에서속수무책이었다.
모두들그렇게발만동동구르고있는사이에무정한시간들은한없이흘러가며칠이지났다.두명의조난자에게죽음은피해갈수없는길인것같았다.때마침이탈리아방면에서몽블랑에오르기위해근처에서등반을준비중이던게리헤밍(1933-1969)에게그소식이전해지기전까지는많은시간이지난후였다.
프티드뤼서벽에누구보다정통한사람을꼽으라면당연히게리헤밍이다.그는일찍이1962년,요세미티의‘철학자’로열로빈스와함께그벽에달라붙어‘아메리칸다이렉트’라는루트를개척해낸산악인이다.자신의등반을포기하고구조활동에나서려는그를동료가만류하자게리는단호하게자신의입장을밝혔다.
“그벽은내가알아.이곳의가이드들은절대구조할수없어.나마저외면하면그들은죽어.더이상무슨말이필요해?”샤모니로달려온그는정예대원8명을선발해2개조로나눈다음‘알프스등반사상가장가능성없는구조활동’을총지휘한다.4명은루트를뚫고4명은식량과장비를지원하는방식이다.루트를뚫고올라가는구조대의선두는당연히게리가맡았다.
그것은끔찍한사투였다.일찍이그벽에직등루트를뚫었던게리조차앞으로나아갈길을찾지못해손발이얼어갔고기력은쇠진해갔다.조난자와구조자들이내지르는절망과고통의울부짖음이알프스전역에쩌렁쩌렁울렸다.이들의비극적인조난상황과헌신적인구조활동은당시프랑스,독일,이탈리아신문에연일대서특필됐다.
이를테면실시간생중계되는‘핫이슈’가돼버린것이다.마침내게리는,조난상황발생후일주일만에,거의가사상태에빠져있는그들과조우하는데성공했다.게리는쉬어버린목소리로무전기에대고외쳤다.“아직죽지않았어.내가그들을데리고내려갈게!”당시게리가펼쳐보인영웅적인구조등반은이후‘샤모니의전설’이됐다.
무려40년이지난지금까지도샤모니사람들은어느날갑자기나타나초인적인등반으로다죽어가던사람들을구조해낸이‘알프스의이방인’에대한이야기를늘어놓는다.그가‘이방인’으로취급당한것은단지미국인이기때문만은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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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붉게물든알프스프티드뤼의웅장한모습.게리헤밍은1966년프튀드뤼서벽에서조난당한독일인등반가2명을극적으로구조하면서’샤모니의전설’이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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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직후그를둘러싸고들이닥친전세계의매스컴앞에서게리는굳게입을다물었다.“내이름은게리헤밍,미국에서왔소.”그뿐이었다.나이를물어도묵묵부답,등반경력을물어도묵묵부답.게리는피곤한얼굴로기자들을헤치며자리를떨치고있어섰다.“피곤해.길좀터줘.가서쉬어야겠어.”세인의관심이집중되는것을몹시도싫어했던게리는남겨진사진조차몇장되지않는다.
모든사진들속의그는언제나같은모습이다.더부룩하게자란긴머리카락,우울하고퀭한눈빛의두눈,낡고해진붉은색점퍼,빛바래고찢어진청바지,그리고데카당스한스카프.알프스사람들은그를‘숨겨진영웅’이라칭송하면서도뒷전에서는‘양키출신의정신나간히피’라고수근거렸다.실제로그는사람들이‘히피’라고부를때흔히들연상하는그모든악덕들을온몸으로구현한사내였다.
난잡한성관계와마약과다복용,그리고반전사상과사회적부적응.게리는이에덧붙여평생헤어나지못했던치명적인결함을한두개쯤더가지고있었다.바로정신착란과우울증이다.게리헤밍의삶을되짚어보노라면명치끝이아파온다.그의아버지는흉악한범죄자였다.일찍이남편과이혼한그의어머니는게리로부터아버지의기억을지워버리려부단히노력했지만어린소년의상처는쉽사리봉합되지않았다.
세상에정붙일곳을찾을수없었던청년게리에게유일한안식처는다름아닌바위였다.20대의게리는조수아트리와타퀴즈암장에서놀랄만한기량을연마한후요세미티하프돔북서벽에새길을연다.한때공군사관학교에재학한적도있고,그곳에서강인한정신력과체력을기르며만족스러워하기도했지만,체제전복적이고자유분방한그의성격상오래머무를곳은못됐다고한다.
1960년이되자그는“미국적삶의방식에넌덜머리가나서”알프스로날아간다.그가1960년대에알프스에서펼친등반은당대최고의것이었다.이들중로열로빈스와함께한프티드뤼서벽아메리칸다이렉트초등기록및존할린과함께한에귀뒤푸남벽초등기록은세계등반사에굵은글씨로아로새겨진기념비적등반이다.
하지만세계최고수준의등반경력도,외국매스컴의비아냥어린찬사도,그의가슴속깊은곳에숨겨진본원적상처와슬픔을어루만져주지는못했던것같다.언제나작가가되고싶어했던그가유독죽음이나자살에대한글들을많이쓰게된것은이때쯤이다.“죽음따위는두렵지않다.다만삶의방향을찾지못하는것이두려울뿐이다.”
1960년대후반에미국으로다시돌아온그가마주친것은환멸뿐이다.한때영혼의교류를나누었던히피시절의친구들은이제모두다자신들이그토록경멸해마지않던‘기성세대’가돼버린이후였다.
그는돈을벌기위해막노동도하고작가가되기위해글을쓰기도했지만무엇하나뜻대로되지않았다.우울증은더심해지고정신착란역시자주일으켰다.
어찌보면그는처음부터이세상과는어울리지않는사람이었는지도모른다.게리헤밍은기어이자살로자신의짧은삶을마감한다.향년36세.그가자살직전남긴메모가인상적이다.“빨리미국을떠나야만돼.이나라에서는언제나죽음이나를덮치려호시탐탐노리고있어.”
"흔적남기지마라"독특한등반철학…삶의흔적남기고싶지않아서였을까
평소에는거의말이없고,이따금씩입을열면남들은알아들을수조차없는내용을읊조릴뿐이었지만,게리헤밍에게도마음을터놓을만한상대가몇명있었다.그는언제나월터보나티와로열로빈스를존경한다고말해왔다.월터보나티의고독한용기와모험정신,그리고로열로빈스의겸손한삶의태도와사려깊은등반철학으로부터많은것을배웠노라고고백해왔던것이다.
아메리칸다이렉트초등직후게리는이렇게말했다.“어디를올랐느냐는전혀중요하지않아.어떻게올랐느냐가중요하지.인공등반장비는최후의선택일뿐이야.자신의힘만으로올라야돼.나는이렇게우아한태도를로열로빈스에게서배웠지.”자폐적인은둔자스타일의게리는여기서한걸음더나아가자신만의등반철학을만들어낸다.
“네가오른길에아무것도남기지말아.너는그냥그곳을스쳐지나간사람일뿐이야.네뒤에오르는사람도마치그곳을초등하듯오를수있도록내버려두어야만해.”게리는자신의등반기록자체에연연하지않았다.매스컴과의인터뷰따위에넌덜머리를냈던것도그때문이다.그는심지어자신이오를때설치한피톤과슬링들마저모두제거해버려야만직성이풀렸다.
알프스에는그가오른무명의험봉들이즐비한데,게리는그것들대부분을단독등반으로올랐고,등반이후루트개념도따위를남기지도않았다.흔적을남기지말것,게리가거의강박관념에가깝도록집착한등반철학이다.어쩌면그는삶의흔적조차남기고싶지않았을지도모른다.
[심산의산그리고사람]<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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