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악계의 영원한 비주류 ‘에릭 십튼’ *-

산악계의영원한비주류’에릭십튼’


영국신사들의고루함에힘겨워하던에릭십튼이,빌틸먼과의기투합해오른아프리카케냐의마운트케냐(5,199m).둘은이후열살이라는나이차이에도불구하고세기의자일파트너로서명성을쌓아간다.

에릭십튼이1935년롱부크빙하의피크21정상에서에베레스트북면을바라보고있다.

한곳에정착하지못하고끊임없이떠돌아다니는사람을가리켜흔히들‘역마살이끼었다’라는표현을쓴다.역마살이낀사람들의공통된특징은그들이사회혹은조직과불화를일으킨다는것이다.떼를지어떠돌아다니는사람은없다.얼핏생각해보면집시나히피들이이부류에속할듯하지만속내를들여다보면꼭그렇지만도않다.

이들은심지어여러사람들과함께있을때에도외로움을느끼는타입이다.역설적인표현이되겠지만이들은홀로있을때그나마가장덜외롭다.20세기전반부를대표하는영국의산악인겸탐험가에릭십튼(1907~1977)의삶을들여다보면그의거침없는자유와놀라운용기그리고천형같은외로움이절절이느껴진다.

에릭은자신의의지와는무관하게유년시절부터방랑자의삶을살아왔다.그는1907년스리랑카에서태어났다.당시그곳에서차재배농장을경영하던그의아버지는에릭이세살이되던해에세상을떠났다.이후그는누나와함께어머니를따라인도와유럽전역을떠돌아다녔다.

그렇게현대판집시같은생활을하다보니제대로된교육을받아봤을리없다.어느덧아홉살이되자더는정규교육을미룰수없다고생각한어머니는그를런던에있는학교에보냈다.하지만런던의초등학교교사들은에릭에게‘실독증세’가있다는판단을내린다.

실독증이란/문자를보고서도발음을연상할수가없는일종의문맹상태를뜻한다.결국그는영국국적을가지고있으면서도외국인학교에서수업을받아야하는‘왕따’의처지가된다.사회로부터의일탈혹은사회와의불화는이미그때부터시작된것이다.

내이미지속의에릭은지구가좁다면서온세상을쏘다닌통큰남자였다.하지만에릭의전기작가들은하나같이그가‘제대로된교육을받지못했다’는것을평생동안콤플렉스로가지고있었다고전한다.산악인혹은탐험가에게학력을따진다는일자체가우습기도하다.

하지만등반사를들여다보면그들의이런지적에근거가없는것도아니다.19세기말부터20세기초에걸쳐이루어진등반과탐험의역사를들여다보면,그주역들은대부분부유한가정에서태어나최고의학벌을갖추고있는‘영국신사’들이었다.그런뜻에서에릭은결코‘영국신사’가될수없었다.

그는케임브리지대학에진학하기위하여수차례시험을치렀으나번번히낙방하고만다.에릭의본격적인등반인생은열아홉살때알프스에서시작된다.그는암벽과빙설벽에두루능한산악인이었다.하지만재력이뒷받침되어주지않는한생업을도외시하고등반만을일삼을수는없다.

마땅히내세울만한학력을갖추지못한가난한영국청년에게선뜻일자리를내줄만한회사를찾기란쉽지않다.에릭은결국식민지인아프리카를선택한다.아프리카케냐의커피농장에서일하기로결심한것이다.하지만이곳에서도계급질서는엄격하다.

당시정착해있던농장주인들은대부분부유한집안의2세들이었던것이다.변방의식민지에서조차외톨이가되었던에릭에게유일한즐거움이란아프리카의산들이었다.그는마운트케냐에오르고우간다의국경을탐험하면서자신만의삶을살아간다.

당시아프리카에는‘고상한영국신사들의사회’에숨막혀하던산악인겸탐험가가한명더있었다.에릭십튼보다10년연상이었던빌틸먼이다.두사람은곧장의기투합하여아프리카의모든험산들을오르내린다.킬리만자로와마운트케냐그리고루웬조리가이들의발아래로떨어진다.

훗날‘세계최고의자일파트너’로손꼽히는‘십튼-틸먼’콤비가탄생하는순간이다.이들이‘알파인저널’과‘지오그래틱저널’에실은아프리카등반기는당시세계산악계의총본산이라할수있는‘알파인클럽’(영국산악회)으로부터격찬을받고,덕분에이들은이제막새로운문을열어젖힌히말라야등반의주역으로간택받게된다.

1933년,에릭은불과스물여섯의어린나이로영국에베레스트원정대원이된다.변방의왕따가세계산악계의젊은기대주로떠오른것이다.이후에릭십튼의일거수일투족은그자체로서세계등반사의주요항목이된다.그는인도의카메트,가르왈히말라야의난다데비,카라코람의트랑고산군,타클라마칸사막,에베레스트의노스콜,파타고니아의피츠로이등당시까지‘지도의공백지대’로남겨져있던모든극지와오지들을종횡무진쏘다닌다.

전설속의히말라야설인예티의발자국을처음으로촬영한것도,에베레스트8,300m지점에서조지리맬러리의피켈을발견한것도,저웅장한화강암암탑의극치트랑고타워를세상에알린것도모두그였다.하지만불세출의산악인으로서명성을얻었다고하여사회와의불화마저종식된것은아니다.그는언제나주류산악계와논쟁을벌였고그결과심각한불이익조치를당한적도많다.“나는나의삶을살아왔을뿐입니다.”만년의자서전에서에릭은고백했다.

“내삶에대한평가는‘그들’이내리는것이아닙니다.나는후회없는삶을살아왔다고자부합니다.”오직‘영국신사’들만이오를수있는명예의전당에들었으되가난한방랑자의삶을포기하지않았던이고집불통의사나이는결국1965년알파인클럽의회장으로피선된다.전립선암으로세상을떠나기1년전인1976년,부탄트레킹을다녀온직후그는이렇게말했다.“아직도지구위에는미답의땅들이많이남아있습니다.그런곳들을떠올리면언제나가슴이뜁니다.”



에베레스트새루트개척업적에도군대식대규모원정대못견뎌불화

에베레스트의초등자들은에릭십튼에게많은빚을지고있다.그만큼에릭은에베레스트에수없이도전했고그곳에오르는길을닦았다.1933년의원정에서그는8,300m까지올라맬러리의피켈을발견했다.1935년에는정찰등반대장으로활약했고,1936년에는원정대원으로참가했다.1951년네팔이개방되자남측으로부터의등반이가능해졌는데,이때정찰대장이었던에릭이선발한대원이바로훗날초등자가된에드문드힐러리였다.

최초로고락셉에베이스캠프를설치하고,칼라파타르에올랐으며,웨스트쿰부에서등반가능한루트를찾아낸것도에릭이었다.1952년에릭은에베레스트대비훈련차초오유등반대를맡는다.하지만그들은6,900m지점에서더이상올라가지못했으며대원들간의불화가발생했다.영국에베레스트위원회는이것을빌미삼아에릭의리더십에의문을표시한다.아마도보다본질적인문제는군대식조직생활을선천적으로못견뎌하는그의개인주의적기질때문이었을것이다.

에릭은본국으로부터의문제제기에도불구하고곧장귀국하지않고대원들일부를이끌고에베레스트동부지역을탐사한다.본국의‘영국신사’들이불같이화를내었음은당연한결과다.1953년의원정대장은본래에릭십튼이맡기로되어있었다.하지만영국에베레스트위원회는갑자기새로운카드를들이민다.충직한군인으로서보병연대장으로근무하던존헌트를공동대장으로내세운것이다.

세부조항으로들어가면더욱치욕스럽다.“베이스캠프까지는공동대장,그이후의등반은존헌트가대장”이라는것이다.애당초존헌트를부대장정도로도여기지않았던에릭이어떤반응을보였을지는불문가지다.그는미련없이원정대장직을자진사퇴하며뼈아픈한마디를남겼다.“군대식의대규모원정대는등반의본질을왜곡시킬뿐이다.”

[심산의산그리고사람]<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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