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산악다큐 제작자 줄리 튤리스 *-

최고의산악다큐제작자줄리튤리스


휼륭한주부이자뛰아난등반가는불가능?
불구된남편돌보며생계책임지며…

30대후반부터세계명산섭렵,최고의산악다큐제작자로활약한줄리튤리스

줄리튤리스가1986년정상을정복한뒤내려오다유명을달리한히말라야K2의웅장한모습.그는아내로서,어머니로서,사회구성원으로서모범적인모습을보이면서도최고의산악활동을한위대한여성산악인이다.

산악인들은대체로이기적이다.산에미쳐가장으로서의역할을등한시하고언제나삶과죽음을가르는벼랑끝위를걸어가니주변사람들로부터,특히가족들로부터좋은소리를듣기힘들다.남성들의경우도그러할진대하물며가사노동의하중을더크게짊어질수밖에없는여성들의경우는오죽하겠는가?

그들은때때로산과가정중에하나를택해야하는잔혹한기로에서게되고,어쩔수없이전자를택한결과가정을등지게되는경우가대부분이다.내주변에도이처럼본원적인갈등에부딪혀괴로워하는여성산악인들이많다.그들이괴로움을토로해올때내가언제나상기시켜주는사람이바로줄리튤리스(1939~1986)다.

도대체한사람의여성이훌륭한아내이자자애로운어머니이고,사회의구성원으로서다른이들의모범이되는동시에,등반을중심으로한산악활동에서도세계적인수준에올라선다는것이가능한일인가?이성적으로판단해보자면불가능하다.하지만줄리는그일을해냈다.

그야말로혼신의힘을다쏟아부은전력투구에덧붙여가슴속에서한없이용솟음쳐오르는사랑이없었더라면언감생심꿈도못꿀일이다.그래서그녀는‘모성’과‘여성성’을마음껏펼치면서도최고의산악활동을보여준위대한여성산악인으로추앙받는다.

영국에서태어난줄리가아마추어클라이머였던언니를따라다니며암벽등반의세계로빠져든것은17세의소녀시절이었다고한다.여린감수성과빼어난미모를갖춘소녀클라이머는곧사랑에빠져든다.영국의주요암장에서마치약속이라도한듯자주마주치게되던청년클라이머테리가그녀의첫사랑이었다.

줄리는첫사랑테리와20세때백년가약을맺고성실한생활인이된다.두명의아이를낳고,식료품점과등산장비점을경영하며,청소년들을위한암벽등반교실을열어강사로활동하는소박한삶이었다.“비록가난하고힘겨웠지만행복한시절이었어요.”20대의줄리는사랑에빠진신부이자행복한어머니였다.

적어도남편인테리가교통사고를당해왼쪽다리에심각한장애가생기기전까지는말이다.“처음엔물론절망했지요.하지만그것도잠깐일뿐,이내평정심을되찾았어요.어찌되었건삶을꾸려나가야했고,그는여전히내가사랑하는남편이었으니까요.”불구가된남편을위한줄리의헌신은참으로감동적이다.

그녀는남편의재활치료에도움이될수있을까하여유도나가라테같은동양전통무예를익혀스스로남편을가르쳤고,신체의구조와기의흐름을꿰뚫어볼수있는아주좋은훈련이었다고자평했다.그녀는거의구멍가게수준이었던식료품점과등산장비점을열심히경영해두아이를모두번듯하게키워냈다.

더나아가남편과함께살고있던자그마한지역사회를위해자신이펼수있는최선의자선활동을했다.“당시남편과함께가장열심히했던활동은불량청소년을선도하고장애청소년들에게암벽등반을가르치는것이었어요.그런활동은그들을순화시켰을뿐만아니라저희자신에게도커다란용기를줬지요.”

줄리의30대는그렇게지나갔다.참다운용기와헌신적인사랑이없었다면불가능한일이다.하지만이때까지그녀는무명의등산애호가에불과했다.그녀가가정이라는좁은둥지를벗어나세계산악계로날아오른것은놀랍게도30대후반에이르러서였다.“아이들이성장했으니까요.고맙게도모두들번듯한어른으로자라나주었어요.그들이제앞가림을할만한나이가되었을때저는비로소보다넓은세상으로눈길을돌릴수있었죠.”

1977년이되자그녀는여전히불구이기는하나웬만한동작들은해낼수있게된남편과함께안데스등반에나선다.페루의피스코와와스카란이그녀의발밑에떨어진다.1980년은그녀의삶에서하나의분기점이된다.남편과아이들을모두영국에남겨둔채그녀홀로6주간의미국여행에나선것이다.목적지는물론캘리포니아의요세미티.그녀는이때40세에가까운나이에도불구하고고전적인거벽루트46개를완등하며기염을토한다.

모두다이전20여년간하루도빠짐없이연마했던암벽등반솜씨덕분이었다.줄리가세계산악계에본격적으로데뷔한것은1982년의프랑스낭가파르바트원정대를통해서였다.당시그녀가맡은직책은등반대원이아니라촬영대원이었다.본의아니게가장노릇을떠맡아야했던가정주부시절,남편의취미활동을돕기위해배워두었던사진과촬영솜씨가빛을발하게된것이다.그는이원정을통해이후자신의가장믿음직한등반파트너가되어줄오스트리아의산악인쿠르트디엠베르거를만나게된다.

줄리와쿠르트는이때촬영한산악다큐멘터리영화‘디아미르’로스페인국제산악영화제에서최우수작품상을수상하고그여세를몰아프랑스와이태리에서도수상의영광을안았다.이름없던가정주부가세계최고의산악영화제작자로우뚝서게된것이다.이후그녀는히말라야고산등반과산악영화제작분야에서참으로눈부신활약을보였다.1983년이탈리아K2북릉원정대,1984년스위스K2원정대,1985년영국에베레스트원정대와오스트리아낭가파르바트원정대,1986년의국제K2원정대의등반모습이모두그녀의카메라에담겼다.

1984년에는브로드피크정상에올랐고,1986년에는K2정상에도올랐다.하지만거기까지였다.그녀는1986년K2에서내려오지못했다.히말라야에들어선지고작5년만에유명을달리한것이다.줄리가자신의모든꿈을다펼치기에는너무나짧았던기간이다.하지만죽음의순간에후회했을것같지는않다.그녀는언제나이렇게말했다.“인생은너무도수많은꿈들로이루어져있다.그렇지않다면살만한가치가없는것이다.”산악문학작가

●줄리와히말라야-위대한예술이라던K2와영원히

"히말라야에서는나자신이예술작품의일부가된다"히말라야를탐미적영상에담은최고의여성산악인겸영화인이다.1983년이탈리아K2북릉원정대에참가했을때의일이다.그녀는이탈리아의한방송국에서의뢰한산악다큐멘터리영화의제작을위해이원정대에참여했다.이탈리아원정대가고소캠프를건설하고있는동안그녀는쿠르트와함께K2일원을샅샅이탐험했다.

영국의산악인겸탐험가영허즈번드,에릭십튼,빌틸먼의발자취를따라거대한빙탑사이를헤매고6,000m급무명산에처음오르기도하는멋진탐험이었다.이탈리아원정대가북릉을통해정상에오르자그녀와쿠르트는노멀루트를통해정상으로향했다.줄리는당시7,900m부근에서야영을하던중수천개의봉우리가붉은석양속에서황금빛으로빛나는광경을목도했을때의감격을영원히잊을수없다고말했다."그것은위대한예술작품이었어요.

나자신역시그예술작품속의일부가되어버린것같아정말황홀했지요."탐미적예술가줄리의모습을잘드러내주는대목이다.만약이때K2정상에까지올라섰더라면줄리의삶은다르게전개되었을지도모른다.하지만그녀와쿠르트는8,000m부근에서20시간동안폭풍설에갇히는바람에정상등정을포기했다.이후K2는줄리에게’꼭오르고싶은산’이되어버린것같다.

1984년에다시한번실패한이후1986년에는기어코정상에올랐지만,그곳은’돌아올수없는산’이되어버렸다.줄리는자신의표현그대로’거대한예술작품의일부’로영원히그곳에남게된것이다.


[산그리고사람]<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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