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릉도 & 독도 [1]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울릉도&독도

대한민국동쪽끄트머리를지키는화산섬형제
새벽4시,묵호항.하늘엔별이총총하다.풍랑주의보는해제되었다.바람이수그러들긴했어도파도는여전히높다.어제는풍랑주의보때문에울릉도행오전10시한겨레호가뜨지않았다.발이묶인것이다.2시간뒤?3시간뒤?풍랑주의보가언제해제될지모르는상황.여객선터미널근처에서멀리떠나지못하고가까운추암해변등을얼쩡거리다그렇게하루를꼬박보내고,어두컴컴한새벽에배를타러묵호항에나온것이다.아무리그렇지만,군사훈련도아닌데,새벽4시출항이라니!

▲망향봉에서내려다본울릉도풍광.동해한가운데에서독도와함께대한민국동쪽을지키는울릉도는250만년전화산폭발로생겨난화산섬이다.
섬여행은기상상태가좌우한다.안개와파도는배를부두에묶어놓는심술쟁이형제다.특히파도는고약한녀석이다.이녀석이몸부림치면출항은연기되고,혹부두를떠났다해도배안에서내내뱃멀미로고통을받아야한다.섬에도착해서도울렁증과어지럼증으로숙소에반나절은누워있어야정신을차릴수있다.특히울릉도와독도는동해의먼바다에외롭게떠있기때문에모든게기상상태에달려있다고해도지나치지않다.

묵호에서울릉도까지는161km.동국여지승람등옛기록을보면예전엔순풍에돛을달고울릉도까지이틀이걸린거리다.1970년대까지만해도포항에서7~8시간이걸렸다.오늘길손이겨우잡아탄한겨레호는시속41노트(1kn=1,852m)로달리니2시간20분뒤면울릉도에도착할수있다.거기에배흔들림을잡아주는멀미방지장치가돼있다고하니,“세월참좋아졌다”는소리가나올법하다.

▲울릉도행남등대에서저동항으로이어지는해안산책로.가파른해벽을따라가며해안절경을즐기는재미가쏠쏠하다.(왼쪽)/도동항에서행남등대로이어지는해안산책로의해식동굴.이구간에선이런해식동굴을여러개지난다.(오른쪽)
하지만이렇게파도가심한날엔멀미방지장치도그다지소용이없는가보다.승객들은대부분비닐봉지에머리를박고기도를한다.길손도마찬가지.한겨레호는예정대로오전6시20분에울릉도도동항에도착했다.그러나그렇게뱃멀미에시달렸는데,비록양귀비가눈앞에서있다해도어찌손을내밀수있겠는가.도동약수공원에서톡쏘는탄산수를벌컥벌컥마시고나니그제야울릉도의아름다운풍광이길손의눈에들어오기시작한다.

독도와더불어대한민국동쪽을지키는든든한수문장인울릉도는동해의거센파도와바닷바람이빚은화산섬이다.역사를간단히짚어보면,지구는46억년전태양계의수많은미행성들이충돌해뭉치면서탄생했고,불덩어리였던원시지구가점점식으면서44억년쯤전엔육지가형성되기시작했다.

29억년전한반도가태어났고,오늘날처럼자리가잡힌것은1억5천만년쯤전이다.당시일본열도는한반도에붙어있었다.그러다2천5백만년쯤전일본열도가떨어져나가면서동해가열렸다.그리고드디어450만년전부터250만년전사이에바다속화산이폭발해독도가탄생했고,250만년전엔역시화산폭발로울릉도가생겨났다.울릉도·독도형제중나이로보면독도가형님인셈이다.
▲망향봉에설치되어있는독도전망대.날이맑으면독도가육안으로도보인다.우리조상은예로부터독도를울릉도에속한섬으로여겨왔다.
그렇다면현재울릉도에서가장오래된생명체는무엇일까.그건바로도동항가파른바위벼랑에서뱃멀미에지친길손을내려다보던향나무다.높이4m,둘레2m에이르는이향나무의수령은2,000~2,500년으로짐작하고있다.어떤학자들은5,000~6,000년정도로내다보기도한다.어쨌든울릉도의상징처럼여겨지는이향나무는울릉도에사람이살기이전부터척박한암벽에뿌리를내리고오가는이들을묵묵히지켜보고있다.

사람들은언제부터울릉도에살기시작했을까.학자들은청동기시대나철기시대초기부터울릉도에사람들이살았던것으로추측하고있다.현포·남서·저동등에서고인돌·무문토기·갈돌·갈판등이발견되었는데,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조사하고1997년출간한‘울릉도지표조사보고서’를보면울릉도에서발견된무문토기·신라토기·적갈색토기3가지가운데,무문토기는기원전3세기경의것이고,신라토기는6세기중엽으로추정하고있다.
그렇다면지금으로부터최소2,300년이전부터울릉도에사람이살고있었다는얘기가된다.역사적인기록은512년(신라지증왕13)강릉의군주이사부가우산국(울릉도)을정복하여신라에복속시키면서부터등장한다.삼국유사나삼국사기에적혀있는기록을정리해보면대략다음과같다.
▲톡쏘는맛이일품인도동약수.옛날왜군과싸우던장군의갑옷에서흘러내린쇳물이라는전설이전한다.(왼쪽)/도동약수공원에세워져있는안용복장군의기념비.동래출신인안용복장군은조선시대울릉도와독도를드나들던일본인들을쫓아낸분이다.(오른쪽)
‘강릉동쪽바다에순풍으로이틀걸리는곳에울릉도가있다.이섬은둘레2만6,730보다.이섬에사는오랑캐들은바닷물이깊은것을믿고몹시교만하여조공을바치지않았다.이에왕은이사부장군에게명하여군사를거느리고가서치게했다.이때이사부는나무로사자를만들어큰배에싣고위협했다.“너희가만일항복하지않으면이짐승을놓아버리겠다.”이에오랑캐들은두려워하여항복했다.’

예전에일본인들은이사부기록을허구라고몰아세웠으나이건분명히역사적사실이다.지금까지연구한성과를보면,한반도해안지방에서건너간사람들이세운것으로추정되는우산국은울릉도와독도,그리고그주변을둘러싼동해바다를기반으로살아가던소규모의해양왕국이다.우산국의도읍지는울릉도북동쪽,지금의북면현포였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동국여지승람에의하면이곳에촌락과7개의석불과석탑등이있었고,19세기말개척때만해도석실고분이무려40여기가있었다.지금도10여기의고분이남아있다.

우산국은본토에서전해진무문토기와철기문화를발전시키고해양왕국답게발전된항해술로동해안일대를장악하고있었던것으로보고있다.물론독도는울릉도에서육안으로보이는위치에있기때문에울릉도와독도는모두우산국의영역이었음은당연한일이다.

▲(1)저동항풍경.도동항이관광지냄새가물씬풍기는항구라면고깃배드나드는저동항은울릉도어민들의삶을엿볼수있는속살같은항구다./(2)항구작은덕장에내걸린오징어.본격오징어철이되면울릉도해안은어디를가나새하얀오징어로뒤덮인다./(3)오징어조형물과뾰족솟구친송곳산이돋보이는추산마을풍경.
이렇듯사서에등장한전투는지금의서면소재지해안가에있는사자바위와투구바위전설로남아지나는이들의눈길을끈다.이렇게신라가우산국을정벌한이후울릉도와독도를포함한주변도서는통일신라,고려,조선을거치면서대한민국까지줄곧우리의영토로이어져오고있다.

그런데,여말선초에왜구의침략이심해지자위정자들은공도정책(空島政策),말그대로섬을비우는정책을쓰게된다.왜구의노략질로부터백성을지키기위한소극적인방편이었다.조선건국후에도한동안이정책은유지되었다.그러다큰섬들은성종(재위1469-1494)대를전후하여다시주민이거주하기시작하였지만,작고외딴섬들은16~17세기에야사람이들어가살수있었다.울릉도공도정책도이런흐름의하나였다.

▲울릉도는평균경사도가25°나되기때문에가파른밭에서경작하는광경을쉽게목격할수있다.가파른더덕밭너머로펼쳐진바다가더욱평평해보인다.
1416년(태종16)조정은울릉도에사람이살지못하도록하는공도정책을발표하게된다.당시울릉도엔고려말부패와정권의불안정으로가혹한세금을피해온사람들수백명이살고있었다.조정에선이들을본토로불러들였다.

그러나당시기록을보면울릉도사람들은송환에순순히응하지않았던것같다.1417년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임명된김인우는울릉도에서15가구86명의주민들이있음을발견했으나단3명만설득할수있었다는기록이보인다.또1425년(세종7)에역시김인우를다시파견해주민들을불러들였다.이어1438년(세종20)에도66명을송환했다.뿐만아니라1441년엔울릉도를수색해다시70여명을송환했다.

이과정에주모자는교수형에처하고나머지는노복으로삼을정도로울릉도공도정책은강경했다.이후송환이어느정도마무리되자정기적으로배를띄워울릉도주변을감시했다.이와더불어삼봉도(독도)에도백성들이숨어산다는소문이돌자그곳을탐색했다는기록도보인다.울릉도서쪽끄트머리에자리한태하엔성하신당(聖霞神堂)이라는해신당이있는데,여기엔공도정책시기에탄생한한편의슬픈전설이전한다.
▲(1)울릉읍도동리에있는봉래폭포.원시림사이로떨어지는이폭포의하루유량은3,000톤이넘어울릉읍주민들의귀중한상수원으로쓰이고있다./(2)울릉도개척민들의목숨을이어줬다는명이(산마늘).예전엔산기슭에서흔히볼수있었으나요즘엔높고깊은산속에들어가야만날수있다./(3)태하동성하신당에모셔져있는동남동녀상.조선초기공도정책을쓸때희생당한소년소녀의전설이서려있다.
조선태종때김인우는안무사를명받아울릉도에살고있는주민들을육지로이주시키기위해병선2척을이끌고이곳태하에도착했다.안무사는울릉도를수색해주민들을찾아냈다.이윽고울릉도를떠나기전날밤,잠을자는데안무사의꿈에해신이나타나말했다.

“너의일행중에동남동녀2명을두고떠나거라.”

그러나안무사는개의치않고이튿날아침출항명령을내렸다.그러자갑자기거센풍랑이일었다.풍랑은이튿날도계속되었고,날이갈수록점점심해졌다.안무사는문득며칠전꿈이떠올랐다.주민들이모여있는곳으로가보니예쁘장한소년소녀가눈에띄었다.안무사는머뭇거리다말했다.

“너희들은지금이길로내가머물던숙소로올라가필묵을가져오너라.”

▲노인봉이굽어보고있는현포앞바다.울릉도바다는이렇듯어디를가나투명한옥빛이다.
영문을모르는아이들은마을로달려올라갔다.그러자그순간신기하게도풍랑이잦아들며순풍이불었다.안무사는그틈을타닻을올린뒤태하를떠났다.무사히육지에도착한안무사는두고두고그때의일이마음에걸렸다.몇년이지난뒤다시안무사가되어울릉도를찾은김인우는태하주변을수색했는데,그때자신이유숙하던곳에동남동녀가꼭껴안은형상으로백골이되어있었다.안무사는이들의고혼을달래기위해참회의뜻으로그자리에사당을지어제사지내고돌아갔다.성하신당의유래다.

이런슬픈사연까지잉태한울릉도공도정책.일본인들은그빈틈을파고들었다.물론공도정책을쓰는중에도우리조정에선군사를보내정기적으로울릉도·독도부근을순찰했지만,감시가소홀해질때마다일본인들은울릉도에서벌목하든지독도주변에서어로행위를자행하곤했다.예로부터바다로나가끊임없이주변국을노략질하던나라가아니던가.

우리도가만히있지않았다.1614년(광해군6)대마도주에게울릉도에일본인들의왕래를금지하는금약을준수하라는서계를보낸일,1693년(숙종19)과1696년에동래어부안용복이울릉도근해에서일본인들의어로행위를발견하고직접일본으로건너가울릉도와독도가조선의소유임을확인받은일등등이그것이다.그러다안용복이2차도일담판후철종때까지일본은비교적잠잠해졌다.

1881년(고종18).드디어울릉도에새로운시대가찾아오게된다.조정에서울릉도공도정책을폐기하고개척령을반포한것이다.당시현지조사를위해파견된울릉도검찰사(檢察使)이규원(李圭遠·1833-?)이쓴<울릉도검찰일기>는지금도소중한기록으로남아있다.

▲성인봉의칼데라화구가함몰하여형성된나리분지전경.울릉도전체에서유일한평지라개척민들수백명이이곳에터를잡고살았다.
배3척에102명의수행원을이끌고울릉도를찾은검찰사일행의탐방기간은1882년4월29일부터5월13일에이르기까지만14일간이었고,울릉도에상륙해조사한기간은5월1일부터10일간이다.검찰사일행은험한산길과해변을탐험하듯다니며샅샅이조사하면서울릉도의실태를꼼꼼히파악했다.

그내용을간추려보면,수백년간의공도정책에도불구하고울릉도엔전라도·경상도등내륙각지에서건너온여러계층의백성들이살고있었음을알수있다.숫자는벌목인91명,약초꾼9명등모두116명이나되었다.더불어울릉도에서벌목중인일본인들도무려70~80명이나되어일본정부가약속한울릉도금령이지켜지지않고있음을알고육지로돌아온후일본외무대신에항의문을발송하기도했다.이외에농사가가능한장소,마을을이룰수있는장소,식수가있는수원지,배를댈수있는포구등을꼼꼼히조사하였다.

▲미역취로묵나물을만드는울릉도주민.이과정을거친뒤바닷가에널어놓고말린다.(왼쪽)/노인봉과송곳산이굽어보고있는현포항전경.학자들은삼국시대우산국의도읍지가바로이곳이었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오른쪽)
검찰사가돌아가보고한지4~5일만에임오군란이일어나는등국정이매우어수선했지만,개척령의기본방침은바뀌지않아정부는울릉도개척에적극나서게된다.당시검찰사의성실한답사보고서가기초가되었음은물론이다.

개척당시울릉도행정의중심은성하신당이있는태하였다.이규원검찰사일행도태하의학포마을에처음도착했다.개척령이내려진그이듬해16가구54명이정부주도하에공식적으로첫이주를하게되는데,이들역시태하의학포마을로입항했다.이후태하는울릉도의관문으로서울릉도군청까지자리잡았으나1914년일제가군청을도동으로이전하면서지금의한적한고을로물러앉게되었다.

초기에울릉도를찾은개척민들이가장큰집단을이루고살던곳은바로성인봉북쪽의나리분지였다.평균경사도가25°나되는울릉도에서성인봉의칼데라화구가함몰하여형성된나리분지는사람이살기에아주적합했다.개척당시나리분지거주민은93가구500여명에이르렀다고한다.이들은울릉도에흔한나무를베어집을짓고억새로이엉을엮어지붕에얹었다.

▲나리분지에남아있는너와집.백두대간산골에서볼수있는강원도너와집과구조가아주비슷하다.(왼쪽)/너와분지에서더덕을캐는너와동주민들.(오른쪽)
우리전통가옥에서통나무를‘우물정(井)’자형으로네귀를맞추어쌓아만든집을귀틀집이라하는데,울릉도에서는이를투막집이라고부른다.전체적인구조는강원도산골의귀틀집과거의비슷하지만,울릉도전통민가인투막집의특징은우데기다.이는눈이나비바람을막기위해집바깥쪽에기둥을세우고,억새·옥수숫대등으로엮은이엉을설치한바깥벽을말한다.
보통부엌·화장실·장독대등이모두우데기로둘러싸여있어내부에활동공간이생기게된다.바람이많이불고,겨울엔눈이3m까지내리는울릉도기후에아주알맞은시설인셈이다.현재나리분지엔지붕을너와로이은너와집1개소,섬에서많이나는솔송나무와너도밤나무를우물정자형으로쌓고틈은흙으로메워만든투막집4개소를도지정문화재로보호하고있다.

하지만개척민들의고생은말이아니었다.특히먹을거리가마땅치않았다.다행히도울릉도는나물천국이었다.섬초롱,전호나물,취나물,부지깽이,참나물,명이….숲엔먹을수있는나물이지천이었다.문제는이른봄이었다.긴겨울을지나고나면식량이모두떨어져개척민들은굶주림에시달리곤했다.이때잔설을뚫고솟아나는명이는반가운생명줄이되었다.당시개척민들이산에올라눈을헤치며캐온이나물를삶아먹고‘명(命)’을이었다해서‘명이’라는이름을얻었다고전한다.

▲하늘나라선녀가변했다는전설이전하는일선암.고깃배한대와멋진구도를이루고있다.
명이의학명은산마늘로,울릉도를비롯해육지의강원도등고지대에서자란다.울릉도사람들은이명이로김치도담그고,절임도한다.그냥뜯어다쌈싸먹기도한다.무엇보다고기특유의잡내를없애주기때문에요즘엔울릉도상차림에빠지지않는최고의효자나물로대접받는다.이렇듯명이는단백질공급원이었던깍새(슴새)와더불어개척민들의허기를달래준양대생명줄이었다.또울릉도는호박하나가20kg에이를정도로아주잘자랐는데,지금은울릉도호박엿이별식이지만,호박역시개척당시엔식량대용이었다.

먹는얘기가나온김에하나만더꺼내자면,요즘유명호텔에서유명세를떨치고있는‘울릉약소’의시초는1883년4월개척농민(6가구54명)들과함께들어온소암수1쌍이다.이어1892년주민들은콩50석을주고울진에서송아지5마리(암3,수2마리)를들여와울릉도남동쪽의사동지역에서기르게되는데,1920년대엔매년수십마리씩육지로내다팔수있었고,1960년대엔매년100~200마리씩육지로출하했다.육지산소보다도고가였으나당시포항엔울릉도약소를구입하기위해온상인들로붐볐다고한다.지금울릉도전역에서자라고있는소는700여마리에이른다고한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12239’); /SummerG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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