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스에서 온 편지] 발페레 계곡 *-

[알프스에서온편지]발페레계곡

평생을다녀도부족할산행
알파인계곡을트레킹하며<리카르도캐신,알피니즘50년>을읽다.

6월중순에접어든알프스의2,000m대트레킹코스에는군데군데잔설이덮여있다.설사면사이의양지바른풀밭에는크로커스등몇몇봄꽃들이한창피어있다.그래도각종야생화들이만발하려면2~3주는더있어야할듯.이처럼알프스의봄은더디기만하다.샤모니에서몽블랑터널을지나40분걸려이탈리아의쿠르마예(Courmayeur)에닿는다.11.6km의터널하나만지났는데공기부터다르게느껴진다.그만큼몽블랑산군이크기때문이리라.

▲캐신이워커릉을초등하고자신의조국이탈리아로내려온그랑조라스남면이펼쳐져있다.

이번산행은몽블랑산군의남측,즉쿠르마예주변을트레킹하며리카르도캐신(RiccardoCassin·1908-)을만나보기위해서다.물론캐신이등반활동을시작해평생살고있는곳은이곳에서멀리떨어진이탈리아북부의산악도시레코(Lecco)지만,그는이몽블랑산군에서도여러루트를개척했다.이지역에서행한그의대표적인등반은그랑조라스북벽의워커스퍼로,알프스3대북벽중맨나중에등반된,가장우아한루트다.

우선쿠르마예시내를한바퀴돌아본다.몇백년이상살아온옛가옥들이줄지어선골목길에접어든다.대대로살아오며개보수를한알프스산골마을의정취가느껴지는골목이다.붉은벽돌이깔린골목을한참들어가니오래도록수많은이들의안녕을기원했을낡은교회가우뚝솟아있다.수백년은됐음직한교회의종탑뒤로캐신일행이그랑조라스북벽을등반하기위해넘은국경고개가보인다.

교회옆으로난골목을빠져나와강을건너신시가지에들어선다.구시가지에비해활기찬골목을돌아산악문화회관과가이드사무실앞에온다.에밀레이(EmileRey)등이지역을대표하는산악인동상들앞을지나본격적인산행에접어든다.동행한이는같은산악회후배나현숙이다.이곳이처음인후배는연신주변을두리번거리며풍경을즐긴다.후배말대로돌집이많다.

특히지붕은온통넓은돌로얹었다.마침두노인네가지붕위의굴뚝옆에서한담을나누고있다.작업화대신가죽비브람을신은차림이정답다.그들뒤의배경이빙하이기에더어울리는산골마을의정취다.

▲리카르도캐신의자서전과<위험의저편에>.

인물에겐뛰어난스승있게마련


마을을벗어나고부터숲속의오솔길이다.키큰침엽수림사이로난길을계속해서오른다.2시간쯤오르자트레커둘이인사하며지나간다.곧이어숲길을벗어난다.베르토네(Bertone)산장아래다.이제부터전망이트인다.뒤따르는후배너머로몽블랑남동사면의웅장함이한눈에건너다보인다.

샤모니쪽북면과는달리수직의직벽들이펼쳐져있다.10여년전후배둘과저벽들을오르며길을잃고서정상부의크레바스속에서혹독한밤을보낸추억이새삼스럽다.이런저런생각을하며발걸음을딛는다.마침산장이다.보수공사중이라문이닫혀있다.비가내려처마에서잠시쉰후,다시걷는다.

산장뒤의작은호수를둘러보고언덕을오른다.발페레(ValFerret)계곡으로곧장내려가는길과알파인초원인라삭스(LaSaxe)로오르는갈림길에이정표가있다.둥근구리원판에는알프스의주요봉우리와유럽대도시까지의거리와방향을표시해두었다.갈림길에서우리는알파인초원으로오른다.간간이비가뿌리지만덥지않아좋다.양지바른사면에는봄꽃들이한창이다.

이윽고언덕위에이른다.하얀야생화가흩뿌려져있다.꽃밭을지나멀지않은곳부터눈밭이다.마침비가내린다.하여이곳서하룻밤묵기로한다.텐트를칠마땅한장소가없어작은꽃밭에자리를잡는다.꽃들에겐미안하지만어쩔수없다.해가지려면이른시간이지만주변에이보다나은곳이없기때문이다.물론배낭에지고온리카르도캐신의책을뒤적이기위해서이기도하다.

▲베르토네산장위,갈림길에있는구리원판에는알프스의주요봉우리를표시해뒀다.

책을,특히산악서적을구입할때면필자는날짜와이름을적어두곤한다.이책<RiccardoCassin,50YearsofAlpinism>을처음만난날은1991년3월23일이었다.한동안그저책속의수많은사진들만즐겨보며캐신의영웅적인활약상을상상했었다.그러고나서야사전을들춰가며읽은기억이있다.20대후반이던당시영문판원서를읽기위해많은노력이필요했지만,어릴적부터익히들어온산악영웅캐신을만나는기쁨에비하면아무것도아니었다.선배들이나산악잡지에서캐신이위대한산악인이라고는했지만도대체어느정도인지알고싶었던것이다.

텐트안에기대어손때가묻은캐신의책을펼친다.18세때부터산의세계에빠져든그는타고난체질을바탕으로친구들과레코나그리냐(Grigna)주변암장에서젊은혈기를발산하며등반에빠져든다.선수급의권투도포기하고서다.뛰어난인물에겐영향을끼친스승이있게마련.천둥벌거숭이처럼아무런체계없이등반하던그에게돌로미테의전설적인등반가에밀리오코미치가그리냐에나타난다.그로부터암벽등반의진수를새롭게익혀노력에노력을거듭한캐신은돌로미테로진출해수많은초등반을행하며일급등반가로성장한다.

그런후,바딜레북동벽을초등하고서부알프스로눈길을돌려그랑조라스북벽의워커릉을초등해일약세계적인산악인이된그였다.그리고알래스카의매킨리로가서남벽에캐신루트라는걸출한등반선을긋기도했으며,안데스산맥까지그의초등기록을남겼다.한편월터보나티나라인홀드메스너같은이시대최고의산악인후배들을이끌고가셔브룸4봉을초등하기도했으며,로체남벽도시도했다.물론로체남벽원정은자신의인생에서최초의실패를안겨준등반이었다.

▲알프스의고산화원너머로그랑조라스남면이펼쳐져있다.

최초의실패를안겨준로체남벽


이렇듯캐신처럼많은이들에게영향을끼친산악인도드물것이다.그리고1940년대후반부터자신의이름을딴등반장비브랜드캐신으로우리에게더친숙한그가아니던가.<RiccardoCassin,50YearsofAlpinism>에첨부된수많은캐신의등반사진들만뒤적여도충분히그의활약상을확인할수있다.

이미오래전에읽어본거라처음부터페이지를넘기고픈생각은없다.우선그랑조라스북벽에대한이야기를펼친다.필자또한대학4학년때인1990년에올라본곳이라각페이지의대목들이눈에선하게와닿는다.쿠르마예산악인들의냉대에도불구하고초행길에워커릉을찾아가열악한등반장비로초등한그가대단하게여겨질뿐이다.

한분야의뛰어난인물에겐남들이가지지못한능력이있기마련.당시그는서부알프스출신의기라성같은산악인들이갖추지못한,돌로미테에서연마한암벽등반기술을발휘해초등에성공한것이다.이처럼알피니스트는등반기술적인면에서만보더라도암,빙,설어느것이든등한시할수없다.

텐트바깥에는구름이짙게깔려있다.몽블랑뿐아니라바로건너편의그랑조라스쪽도온통구름에덮여있다.그래도카메라를들고나와주변풍경을몇컷담는다.눈밭이시작되는동쪽언덕까지갔다온다.이렇게주변을한바퀴돌며저녁풍경을즐긴다.물론캐신을생각하지않을수없다.그랑조라스의거대한남면이바로건너다보인다.1938년캐신이워커릉을초등하고서자신의조국이탈리아땅으로내려온하산길이었다.악천후에도불구하고세번이나비박하며이룬알프스최고의성과였다.

텐트로돌아오니후배가저녁을지어놓았다.맛있게저녁을먹는다.차한잔을마시며밖을내다보니이미주변은어두워져있다.다시캐신의책을펼친다.관심있는부분은단연필자와관련있는대목이다.50대중반의나이에아들같은후배들을이끌고그는매킨리남벽에서가장멋진등반선을긋는다.바로캐신리지다.10여년전필자또한캐신리지오른편의한루트를오른바있기에캐신의등반기는한층실감이난다.당시의열악한장비로혹독한추위에맞서오르는이들의모습이눈에선하다.

지친동료들을모두안전하게하산시키는그의헌신적인리더십도엿볼수있다.이제후배들과더자주등반하게되는필자에겐더없이좋은본보기지만쉽지는않을듯.그래도노력은해야지하는상념에잠기며책을덮는다.

새소리에눈을뜬다.밖을살피니하늘엔온통구름이다.그래도카메라를들고살며시텐트를빠져나온다.구름사이로빠져나온아침햇살의줄기가그랑조라스남면에살짝비추더니이내사라져버린다.기대한아침풍경이아니지만한적한알파인초원을두가슴으로느끼는자체가좋다.이러한목가적인풍경이푸근하다.상쾌한아침공기를들이키며텐트로돌아온다.급히침낭속으로들어가몸을녹이며커피한잔마신다.

▲(좌)쿠르마예구시가지골목에있는교회탑너머로캐신이워커릉을등반하기위해넘은제앙고개가보인다.(우)꽃들에게미안해하며텐트를친다.뒤로몽블랑산군의남면이펼쳐져있다.

한여름이면이곳알파인초원곳곳에소들이노닐고있을텐데아직풀이없어조용하다.간단히아침을챙겨먹고길을떠난다.스산한아침바람을받으며동쪽으로난길을걷는다.설사면사이사이의풀밭에선몇몇야생화들이피어있다.갑자기그사이에서마모트한마리가고개를내민다.녀석도하루를시작하나보다.구릉지대를얼마가지않아나무울타리에닿는다.실은울타리가아니라여름철에소들이악천후에대피하는장소다.

차츰고도를높이자눈밭이많아진다.산양두마리가우리를보더니줄행랑을친다.좀더가자아직날지못하는꿩새끼두마리가아장아장설사면에도장을찍으며달려간다.새소리까지들려이모든광경이봄의행진곡을연출한다.이윽고2,584m의트론체(TetedelaTronche)에오른다.흩어지는구름사이로쿠르마예계곡뿐아니라그랑조라스와몽블랑남동면이건너다보인다.

잠시쉬고사핀고개(ColSapin·2,435m)로내려간다.마침트레커둘이올라오고있다.그들은우리가말라트라(Malatra)계곡으로간다니고개를흔든다.눈이깊어자기들처럼스패츠를하지않고서는힘들지않겠냐며걱정해준다.배낭에피켈까지지참한그들의호의에고마움을표하고사핀고개에내려선우리는계속해서눈밭을걸어내린다.

▲(좌)여름철악천후가닥치면소들이모여드는고산목장의대피소.(우)말라트라계곡을내려가는가운데저멀리레쇼가보인다.캐신은그북벽도초등했다.

올해한국나이로100세인풍운아캐신

스패츠를차지않아신발에눈이가득찰정도로눈밭에서허우적대며아르미나(Arminaz)계곡에내려선다.온통눈뿐인계곡아래에돌로지은막사가한채있다.잠시쉰후,듀섹스고개(Cold’EntreDeuxSex·2,521m)로오른다.숨을헐떡이며가능한한설사면을피해오른다.

1시간만에고개를넘어이윽고말라트라계곡이다.계곡상단을병풍처럼둘러싸고있는봉우리들북면에서쏟아진눈사태가계곡바닥을가득메우고있다.6월인데도저런거대한눈사태가발생하다니.최대한그지역을빨리벗어나기위해눈밭을열심히걸어내린다.아래로내려올수록계곡은넓어져빙하가녹은급류의세기가세졌다.몇번급류를건너며마침내눈밭을빠져나와풀밭에닿는다.여름철이면사용하는고원목장의막사옆풀밭에텐트를치고하루산행을마감한다.

마침한줄기소낙비가내리더니이내햇살이든다.오후의따뜻한햇볕에텐트를말리며느긋한시간을즐긴다.이번에집어든책은후배가지고온<위험의저편에>다.캐신등10여명의세계적인산악인들을니콜라스오코넬이인터뷰형식으로소개한책이다.10여년전에필자가젊은혈기로무책임하게만든번역서다.책을펼쳐캐신을다룬부분을읽는다.

이책의저자가인터뷰했을당시인85세의나이에도캐신은여전히등반을즐긴다고했다.아침마다턱걸이나다리운동을30분이상한다는그는위험에직면함을즐기지만오직계산된위험들만감수한다며남들보다뛰어난등반기술을익히고피나는노력을하면위험을극복할여지가충분하다고했다.숱한극한등반에서살아돌아온백전노장의일침이다.

곧밤이오고하늘에어둠이짙어졌다.산정의적막을깨는눈사태소리가계곡건너편에서간간이들려오는가운데밤은깊어졌다.잠시후배와함께텐트밖풍경을지켜보고서추위에몸을움츠리며침낭속에든다.랜턴을켜<위험의저편에>에서캐신을마저읽는다.캐신은자신또한암벽등반을좋아했지만예전에행했던형식과요즘의스포츠클라이밍과는다른면이있다며과거에비해등반장비와기술의획기적인발전에도불구하고오히려요즘은모험적인요소가부족하다고했다.새로운모험에의추구를강조한것이다.

▲말라트라계곡중단부의드넓은눈밭.7월이면야생화로뒤덮인다.

한편등산은다른스포츠들과는달리육체적인능력이떨어져도자신의능력에맞게얼마든즐길수있다며75세때자신이1937년에초등했던바딜레북동벽을오른예를들었다.이제막중년의나이에접어든필자에게많은것을생각하게한다.책을덮고평생을다녀도부족할산행들을꿈꾸며눈을감는다.

아침이밝았다.아직비수기라샤모니로돌아가는버스편이오후3시한대뿐이기에그시간에맞추기위해서두른다.스산한아침바람을받으며길을걷는다.1시간쯤내려가보나티산장에닿을즈음어제만난바로그두트레커가올라오고있다.그들은산장에묵으며주변을트레킹한다고한다.이윽고산장이다.또다른위대한산악인보나티를기리기위해그의친구들이지은산장이다.

여기선그랑조라스가전위봉에가려보이지않지만바로산장건너편에캐신이초등한레쇼가솟아있다.그가1940년에북벽을초등한봉우리다.이렇듯캐신또한몽블랑산군에그의흔적을많이남겼다.이제발길은발페레계곡으로내려간다.차츰고도를낮춰침엽수림에접어든다.나무들사이로치솟은침봉들을보며캐신을생각한다.

의학의발달로인간수명이길어졌다고는하나올해우리나이로100세인캐신은풍운아임이분명하다.숱한극한등반을해온산악인치고예외적이지않을수없다.그러한장수는그자신뿐아니라우리에게도행운이다.

처음등반을시작했던1920년대부터숱한초등반들을행한캐신은2차세계대전전유럽전역의알피니즘을주도했을뿐아니라전전과전후세대를연결한이탈리아등산계의대부다.그후에도그는첨예한등반들을행하면서현재까지거의한세기에이르는동안알피니즘의변천사를몸소실천하고지켜본산증인이다.그의책<RiccardoCassin,50YearsofAlpinism>이‘알피니즘50년’이아니라‘알피니즘100년’이란부제가붙은책도곧발간되길기대해본다.

-허긍열한국산악회대구지부회원/월간산[465호]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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