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탐방 [2]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1중심부[2]
세계최고의명당에자리잡은대한민국수도

▲서대문구현저동에있는독립문.조선시대청나라사신을영접하던영은문을헐고1897년에독립협회가세운석문이다.
임진왜란당시이곳엔시체가즐비했다고한다.또1886년엔도성에콜레라가돌아많은사람이목숨을잃었는데,광희문밖에는내다버린시체와죽어가는환자들로생지옥을이루었다.1898년엔동학혁명을일으켰던해월최시형도사형당한후이곳으로실려나갔다.

1907년엔일제가조선의구식군대를해산시키자이에불응하다가목숨을잃은120여명의시신을광희문밖에모아두었다.당시성문주변은병사의생사를확인하기위해가족들이몰려들어울음바다를이루었다고한다.

시신이나가는길목엔죽은자의명복을비는무당집이즐비했는데,광희문바깥쪽을무당골,신당골(神堂谷)이라부른것이지금의신당동(新堂洞)지명의유래다.광희문밖의고개도‘한번가면다시돌아올수없다’고해서아리랑고개라고불렀다.그래서조선시대엔‘서울가거든시구문돌가루긁어오라’는말이있을정도였다고한다.조선시대수백년동안수많은죽음을지켜본광희문이었기에‘수구문돌가루’가주술적인만병통치약으로통했던것이다.

북소문인창의문(彰義門)은조선시대에이일대의계곡을자하동이라고하였으므로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한다.사소문가운데유일하게원형의형태를간직하고있는이문은북대문역할을대신했다.숙정문이항상닫혀있었기때문이다.창의문은1623년인조반정때는홍제원(弘濟院)에집결했던이괄·이귀·김류등이세검정에서칼을씻고,창의문을통해궁으로들어가반정에성공한유서깊은곳이기도하다.지금창의문엔인조반정당시공신들의이름을새겨놓은현판이걸려있다.

조선시대한양의도시형태는경복궁정문인광화문앞으로이어지는널찍한육조거리좌우로나랏일을살피는중앙관아들이늘어서있었다.도성의8개문을여닫는시각을알려주는큰종을매달았던종루(鐘樓)가있었고,종루를가운데두고동서로뻗은운종가(雲從街)는조선최고의번화가였다.지금의종로네거리를중심으로자리했던운종가길양쪽으론시전행랑이죽늘어서있었다.

대한민국의수도인서울에서도그중심은단연종로거리다.서울종로는상징성이가장크다.국회의원선거때면흔히듣게되는‘정치1번지’라는수식의유래도육조거리,운종가등이지금의종로구에속하기때문이다.

한편,조선시대백성들은높은관리를만나면절을해야하는번거로움을피하기위해운종가뒤로난좁은골목길로몰려들었다.바로‘말을피해다니던길(避馬)’이라는뜻을지닌지금의피맛골이다.백성들이이용하다보니이골목엔선술집·국밥집·색주가등술집과음식점이번창하였고,그전통은지금까지이어져낙지볶음·생선구이·해장국등을파는식당과술집·찻집등이즐비하다.

서울서직장생활하는사람치고이곳서밥이나술한번안먹어본사람이없을정도인데,지금은종로1가교보문고뒤쪽에서종로3가사이에일부만남아겨우명맥을유지하고있다.그러나이길은오늘도여전히서울의밤을즐기려는술꾼들에게인기가있다.


한편,도성안의민가는운종가를기준으로북촌과남촌으로불렸다.북촌에서도경치좋은백악산아래엔내로라하는권문세가들의주거공간이형성되기도하였다.세종의형인효령대군,세종때의이름난학자인성삼문,선조때의재상이항복도북촌에살았다.반면,하급관리와세력없는선비들이나무인들은남산기슭에모여살아남촌을이루었다.가난한선비를놀릴때쓰는‘남산골딸깍발이’란말도당시남촌에살던선비들은너무가난하여맑은날에도나막신을신고다닌데서유래한다.그러나남촌에도조선중기의시인윤선도,임진왜란때나라를구한이순신장군등이름난사람들도많이살았다.

▲일제강점기때애국인사와항일투사들이투옥되어곤욕을치른서대문형무소자리에조성한서대문독립공원./동묘입구에서청계천까지펼쳐져있는동묘벼룩시장.휴일이면인파로북적거린다.
이제도성안의시장을둘러보자.‘이현(梨峴)과종루(鐘樓),그리고칠패(七牌)는온갖공장(工匠)과상인들이모이는데,도성에서도유명한3대시장이라많고많은물화를따라수레가줄을이었네.’조선후기의실학자박제가의한양성시전도가에나오는구절이다.이렇듯조선시대도성의3대시장은이현시장(배오개시장),종루앞의시전상가,남대문밖의칠패시장을꼽았다.

1876년개항이되고외국문물이밀려들자기존의재래시장들은일대위기를맞았다.특히일본상인들의진출이가장큰타격이었다.이러한위기를극복하고자1905년배오개시장과종로상가의상인들이모여광장주식회사를설립하고,종로5가쪽과청계천쪽양편에상가를세웠다.사람들은이를광장시장이라고불렀다.전차정거장이광장시장입구인지금의종로5가지하철역부근에있었기때문에광장시장은당대최고의시장으로거듭났다.8·15광복이후에도광장시장은서울의대표적시장이었으며,6·25전쟁을겪으면서더욱명성을높여갔다.

1959년광장시장동쪽에새로운시장이들어섰다.광장시장과구별하기위해이를동대문시장이라고했다.1960년대는동대문시장의전성기였다.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등이주로거래된동대문시장의1만여점포엔하루평균20여만명의고객이몰렸다.밤에도불야성을이뤄야시장으로도이름났다.파는물건의종류도매우풍부하여“동대문시장에선돈만주면고양이뿔도판다”는우스갯소리도생겨났다고한다.

그러나1970년대에들어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등전문화된시장이곳곳에생겨났고,또대형백화점들이하나둘문을열자동대문시장은조금씩위축되기시작하였다.이에1970년동대문서남쪽에있던전차차고부지에6층건물로새로이시장을세우고이를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하였다.현재동대문시장이라하면,넓은의미로는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등을모두포함하지만,좁은의미로는광장시장만을뜻한다.

▲몇년전까지만해도서울로들어오는가장큰관문이었던서울역구역사.수많은사연을간직한곳이다./동대문시장의원조라할수있는광장시장의먹자골목풍경.
숭례문동쪽에있는남대문시장은동대문시장과쌍벽을이루는시장이다.우리나라최고·최대의전통재래시장으로명성높은남대문시장은예전엔‘남문안장’또는‘신창(新倉)안장’이라고도불렀다.흔히1911년친일파송병준이조선농업주식회사를설립하면서시작되었다고하지만,이미조선초기인1414년(태종14)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이이곳에있었으니무려600년가까운역사를지니고있는셈이다.

남대문시장은근래에들어와6·25전쟁과몇번의화재로큰타격을입었으나동대문시장에뒤지지않는명성을여전히유지하고있다.지방출신인이길손은동대문시장보다남대문시장을먼저알았다.등산장비도동대문시장이아니라남대문시장에서구입하곤했다.다른분들도사정은비슷할것인데,이는아마도남대문시장이서울의대표적출입구인서울역가까이에있어서일것이다.

하지만1990년대들어서동대문시장에대형쇼핑몰이들어서면서남대문시장을찾던손님들을그쪽으로많이빼앗겼다.특히20~30대젊은이들은대부분동대문시장으로발길을돌렸다.젊은이들취향인쇼핑중편히쉴공간이부족하기때문이었다.

요즘남대문시장의주요고객은중장년층의여성들이다.또외국인들도남대문시장쇼핑을필수코스로꼽고있다.외국인들은한국에서남대문시장을가보지않으면한국쇼핑의최대명소를보지못한것이나다름없다고말한다.남대문시장은동대문시장·인사동과또다른매력이있다는것이다.이들이말한남대문시장의매력은대한민국고유의재래시장에서풍기는정겹고도활기찬분위기와다양한물건을저렴한가격에살수있다는점이었다.길손도이에동의한다.

길손은예전에남대문시장을돌아다니다가길을잃은적이한두번이아니었다.요즘도한번에빠져나올자신은없는데,이는상점과건물들이넓은지역에걸쳐마치미로처럼얽혀있기때문이다.이는계획적으로형성되지않고시간이흐르면서자연스럽게형성된전통재래시장의특징이다.바로남대문시장만의색깔인것이다.

길손은예전엔남대문시장도동대문시장처럼계속변화를꾀하며외연을확장하면서현대적으로변해야살아남을것이라생각했다.하지만요즘은생각이바뀌었다.남대문시장은무질서한듯이보이면서도철철넘치는정과생동감,그게바로가장큰생명력이었던것이다.그런데,이번에도길손은외국인들과어깨를부딪치며남대문시장을이곳저곳기웃거리다또길을잃고말았다.허허,언제쯤남대문시장에서자유를얻을수있을까.

서울,어떤곳인가?

한반도의서쪽중앙부에위치한서울은대한민국의수도로서대한민국의정치·경제·문화·교통의중심지다.동쪽은경기도남양주·구리·하남시,서쪽은고양·김포·부천시,남쪽은성남·과천·안양·광명시,북쪽은의정부·양주시에접해있다.위도로는동경126˚34’,북위37˚34’에자리잡고있다.서울과같은위도에있는도시로는리스본(포루투갈),아테네(그리스),샌프란시스코·워싱턴(미국)등이다.

한강은서울을강남과강북으로구분한다.강북은한반도의등뼈라고할수있는백두대간에서갈라져나온한북정맥의영향을받아곳곳에구릉이발달하고주변이산으로에워싸인넓고평평한분지를이루고있다.강남은한남정맥의영향으로충적지와낮은구릉지가잘발달되어있다.

삼한시대에마한(馬韓)에속하였고,BC18년경부터는백제세력이이지역에서성장하기
시작했는데,백제의발상지는하북위례성(지금의도봉구미아동)이다.고구려는소수림왕,광개토왕,장수왕을거치면서세력이커지자남쪽으로진출하였는데,장수왕이한강유역을차지하면서서울지방은77년간고구려의지배를받는다.이후백제와신라가연합하면서신라땅이되었고,신라는서울을삼국통일의중심지로삼았다.

통일신라때한양군이되었고,고려시대인940년에양주로바뀌었다.문종이후충렬왕때까지는남경,충선왕이후고려말까지는한양으로불렸다.조선을세운태조이성계는1394년(태조3)한양으로천도했고,이듬해한양부를한성부(漢城府)로개칭하고,한성부를5부52방으로구획해점차도읍시설을마련하여수도의면모를갖추어나갔다.

1592년임진왜란과1636년병자호란때크게파괴되었고,근대에이르러1876년강화도조약,1882년임오군란,1884년갑신정변,1894년청일전쟁,동학농민전쟁,갑오개혁등을겪으면서한성부에는새로운근대적시설인철도·전차·전신전화등이설치되고,서양식학교·병원등이운용되어외형적으로는근대화의모습을나타냈다.

그러나1905년을사늑약과1906년일제의통감부가설치됨에따라한성부는조선왕조의수도기능을상실하고일제의식민지지배를받게되었으며1910년에는한일병합이되었다.일본은한성부를경기도에속한경성부라고이름을바꾸었다.1943년구제를실시하여종로구,중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가설치되었다.

현재총면적605.39㎢에종로·중·용산·성동·동대문·중랑·성북·도봉·노원·은평·서대문·마포·양천·강서·구로·영등포·동작·관악·서초·강남·송파·강동·광진·금천·강북이렇게25개구522개동에서인구10,344,440명(2006.6.30)이거주하고있는세계적인대도시다.

경복궁

종로구세종로에있는경복궁(景福宮·사적제117호)은조선시대의정궐(正闕)로1395년(태조4)완공했다.궁내에세워진전각은총390여칸이었다.임진왜란때불타폐허로남아있었는데,조선말기에흥선대원군에의해중건되었다.현재경회루·근정전등과국립민속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등이있다.일반(18~64세)3,000원,청소년(7~18세)1,500원.한장의관람권으로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국립고궁박물관을모두관람할수있다.지하철3호선경복궁역.02-732-1932www.royalpalace.go.kr

창덕궁

종로구와룡동에있는창덕궁(사적제122호)은조선시대의궁궐이다.1405년(태종5)에별궁으로지어졌으나,임진왜란때경복궁이소실되어조선말기에복구될때까지약300년간본궁의구실을하였다.현재창덕궁안에는국보인돈화문·인정전,보물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구선원전등의문화재가있다.금원(비원)을비롯하여다른부속건물이원형으로남아있어가장중요한고궁으로꼽힌다.1997년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등록되었다.대인(19~64세)3,000원,소인(7~18세)1,500원.지하철1,3,5호선종로3가역6번출구.3호선안국역3번출구.전화02-762-8261www.cdg.go.kr

창경궁

종로구와룡동에있는조선시대궁궐인창경궁(사적제123호)은1484년(성종15)옛수강궁터에지었다.창건당시의전각은임진왜란때모두소실되고,1616년(광해군8)에재건했다.1624년(인조2)이괄의난으로대부분이화재로소실되었다가1633년중건했다.1907년순종이덕수궁에서창덕궁으로옮기자일제는이곳에동물원과식물원을꾸며오락장으로삼고이름을창경원(昌慶苑)으로고쳤으나1986년창경궁으로복귀하였다.요금대인(19~64세)1,000원,소인(7~18세)500원.지하철4호선혜화역4번출구.02-762-4868http://cgg.cha.go.kr

경희궁

종로구신문로2가에있는경희궁(사적제271호)은1617년(광해군9)창건되었으나인조반정으로광해군은왕위에서물러나궁에입거하지못했다.인조가즉위하였을때창덕궁과창경궁은인조반정과이괄의난으로모두소실되었기때문에이궁에서정사를보았다.경희궁은280여년동안웅장함을지켜오다가1910년국권피탈직전부터일본인들에의하여강제로철거되었다.정문인홍화문,후원의정자였던황학정등이있다.5호선서대문역4번출구,광화문역7번출구02-724-022102-3707-9433

덕수궁

중구정동에있는덕수궁(德壽宮·사적제124호)은원래성종의형인월산대군의집이었으나임진왜란때왕궁이불타면서1593년부터행궁으로사용했다.광해군은1608년이곳에서즉위한후왕궁으로사용하다가1615년에창덕궁으로옮겼다.이후270년동안별궁으로사용되었고,1897년고종황제가러시아공사관에있다가환궁하면서왕궁으로사용하면서경운궁이라불렀다.고종황제는1907년순종에게왕위를물려주고이곳에서거처하였다.이때고종황제의장수를비는뜻에서덕수궁이라부르게되었다.고종황제는1919년1월21일덕수궁함녕전에서세상을떴다.대인(18세이상)1,000원,소인(7~18세)500원.지하철1호선시청역2번출구,2호선12번출구.02-771-9951~2www.deoksugung.go.kr

운현궁

종로구운니동에있는운현궁(사적제257호)은조선후기흥선대원군의사가(私家)다.고종이이곳에서출생해12살까지성장하였다.현재남아있는건물은대부분1863∼1873년에지은것으로원래집의구조는담에네개의문을두고,그안에아재당을비롯하여고종이태어난안채인노락당,흥선대원군이사랑채로쓴노안당,별채인이로당,그리고은신군·남연군을모신사당등이있어궁궐에비할만큼웅장하였다.그러나일제강점기를거치면서변형되었다.일반(25~64세)700원,청소년(13~24세)300원.02-766-9090www.unhyungung.com

종묘

종로구훈정동에있는종묘(사적제125호)는조선시대역대왕과왕비및추존된왕과왕비의신주를모신유교사당으로1395년(태조4)9월완공되었다.현재정전19칸에19분의왕과30분의왕후를,영녕전16칸에15분의왕과17분의왕후등의신위를모시고있다.1995년12월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등록되었다.종묘제례와종묘제례악도유네스코‘인류구전및무형유산걸작’으로선정되었다.대인(19∼64세)1,000원,소인(7~18세)500원.지하철종로3가역(1호선11번출구,3호선8번출구,5호선8번출구)전화02-765-0195,jm.cha.go.kr

문묘

종로구명륜동3가성균관대학교안에있는문묘(보물제141호)는조선시대에공자를비롯한선현들에게제사지내고유학교육을담당하던곳이다.문묘는대성전을비롯한동무·서무등제사를위한공간인대성전구역,그리고명륜당을비롯한동재·서재등교육을위한공간인명륜당구역으로크게나뉘어있다.1398년(태조7)에처음세웠으나몇차례불에탔고,지금의건물들은임진왜란이후에다시지은것이다.지하철4호선혜화역4번출구.

사직단

종로구사직동인왕산남동쪽기슭에펼쳐져있는서울사직단(社稷壇·사적제121호)은임금이풍년을기원하기위해서사직신에게제사를올리던곳이다.동쪽에있는것이사(社)인토지신에게제사지내는곳이고,서쪽은직(稷)으로곡물신에제사지내는곳으로양단신좌는국가의대본으로중대한제사로삼았다.일제강점기에일본인들이사직단의격을낮추고공원으로삼으면서훼손되기시작했다.지하철3호선경복궁역1번출구.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경내에있는국립민속박물관은우리나라전통민속자료를소장한박물관이다.8·15광복후개관된남산민족박물관이1950년국립박물관으로흡수된후1966년경복궁수정전에1,600여점의민속자료를수집하여민속박물관을개관했다.현재16,000여점의유물이역사실·생활1실·생활2실에나누어전시되어있다.지하철3호선경복궁역.02-3704-3114www.nfm.go.kr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경내에있는국립고궁박물관은조선왕실의품격과예법,장엄하고화려한문화를만날수있는공간이다.제왕기록·국가의례·궁궐건축·과학문화·왕실생활실등5개주제이외에도왕실의탄생과교육·문예·궁중회화·음악·어가의장·대한제국·황실어차·자격루등다양한주제로조선왕조의제도와역사,그리고조선왕실의예술과문화등을아우르고있다.전시유물은국보제228호인‘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과보물등을포함해모두900여점이다.지하철3호선경복궁역.02-3701-7500www.gogung.go.kr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신문로2가경희궁내에있는서울역사박물관은서울과관련된사료를모아놓은전문박물관이다.1층에는기획전시실과기증유물전시실,뮤지엄샵등이있으며,3층에는옛서울과서울사람들의생활,문화,서울의발달등서울을4개주제로나눠구분전시한다.요금어른700원,청소년300원.5호선서대문역4번출구,광화문역7번출구.02-724-0114www.museum.seoul.kr

보신각


1985년까지종로보신각에달려있던서울보신각종(보물제2호)은조선시대의종이다.총높이3.18m,구경2.28m.1468년(세조13)에만들어신덕왕후정릉안에있는정릉사에있었으나,그절이없어지면서원각사로옮겨졌고,임진왜란이후종루에보관했다.1895년(고종32)종루에보신각이라는현판을걸게되면서보신각종이라고불렀다.1985년까지제야(除夜)의종으로사용되었다.현재국립중앙박물관에서보관하고있다.지하철1호선종각역4번출구.

조계사

종로구견지동에있는조계사(曹溪寺)는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직할의사찰로서중앙총무원·중앙종회등이있는한국불교의중심지다.1395년(태조4)창건된사찰로1910년각황사(覺皇寺)라했으며,1937년북한산성안에있는태고사(太古寺)를옮겨오면서태고사로변경하였다.1955년한국불교정화운동이후조계사로되었으며,대한불교조계종의행정중심사찰로명맥을이어왔다.경내에는국보제367호인용문산상원사동종과사리탑비,부처의진신사리1과가봉안되어있는7층석탑등이있다.지하철1호선종각역2번출구,3호선안국역6번출구,5호선광화문역2번출구.02-732-2183www.jogyesa.org

서울성곽

서울의주위를둘러싸고있는조선시대의도성(都城)이다.조선태조이성계는한양으로수도를옮기기위하여궁궐과종묘를먼저지은후,1395년(태조4)도성축조도감을설치하고한양을방위하기위해성곽을쌓았다.석성과토성으로쌓은성곽에는4대문과4소문을두었다.서울성곽은조선시대성쌓는기술의변화과정을살펴볼수있는좋은자료지만,일제시대와6·25전쟁을거치며많이파괴되었다.현재삼청동·장충동일대의성벽일부와남대문·동대문·동북문·홍예문만이남아있다.1963년부터서울성곽복원사업을진행해전체17.68km가운데10.12km를복원한상태다.서울시는문화재청의승인을받아2008년부터본격적인복원작업에들어갈계획이다.

숭례문


중구남대문로4가에있는숭례문(崇禮門·국보제1호)은서울사대문(四大門)의하나다.도성의남쪽정문이라서남대문(南大門)이라고불린다.1394년(태조4)창건되었다.이후임진왜란과병자호란등을거치면서도훼손되지않았으나1898년일제가전차길을깔면서숭례문주변의성벽은모두없어졌다.현판글씨는양녕대군이쓴것이라한다.차도에의해접근이차단되었던숭례문이최근시민들의역사·문화·휴식공간으로재탄생했다.지하철4호선회현역5번출구.서울시문화국관광과02-3707-9454

흥인지문

종로구종로6가에있는흥인지문(興仁之門·보물제1호)은한양성곽8개의문가운데동쪽에있는문으로흔히동대문이라고도부른다.도성을쌓을때같이짓기시작하여1398년(태조7)에완성하였다.지금있는문은1869년(고종6)에새로지은것이다.흥인지문은도성8개성문중유일하게옹성을갖추고있으며,조선후기건축양식을잘나타내고있는문화재다.지붕은앞면에서볼때사다리꼴모양을한우진각지붕이다.지하철1,4호선동대문역6번출구.

광희문

중구광희동에있는광희문(光熙門)은조선의사소문(四小門)중하나다.서소문(西小門)과함께시신을내보내던문으로시구문(屍軀門)·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하였다.1396년(태조5)도성을축조할때창건되었으며,1422년(세종4)개축된것으로추측된다.1719년문루를세워서광희문이라는현판을걸었다.1975년도성복원공사의일환으로석문을수리하고문루를재건하였다.지하철동대문운동장역2,4,5호선3번출구.

북한산국립공원


서울종로구·은평구·성북구·강북구와경기고양시사이에솟은북한산(836.5m)은서울근교에서가장높고산세가웅장한산이다.최고봉인백운대,동쪽의인수봉(810m),남쪽의만경대(800m)의세봉우리가뿔처럼불쑥솟아있어조선시대까지만해도삼각산(三角山)이라고했다.또삼봉산(三峰山),화산(華山),부아악(負兒岳)등으로도불렸다.조망도좋아최고봉인백운대에서는북악산·남산·관악산,그리고도봉산·수락산·불암산으로

둘러싸인서울시내와그바깥쪽의경기도일대가한눈에들어온다.맑은날에는강화도·영종도등서해의섬들도선명하게보인다.백운대·인수봉·만경대외에도노적봉·영봉·비봉·문수봉·보현봉등이름난봉우리만도40여개나된다.특히클라이머들에게암벽등반대상지로사랑받고있는인수봉은한국산악운동의발상지라할수있다.

1천만명이넘는서울인구가즐겨찾는산답게북한산의등산로는북한산성을기준으로거미줄처럼얽혀있다.하지만이중에서도등산인이많이몰리는산행코스는우이동·정릉·세검정·구파발·북한산성기점이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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