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탐방 [4]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2북동부[1]

삼족오깃발휘날리던고구려의기개를느껴라!
▲불암산에서바라본야경.북한산에서도봉산으로이어진우람한연봉에강북구·도봉구·노원구일대가포근하게안겨있다.
이번서울편은도성에서뻗어나가는길로부터이야기를풀어본다.그렇게하려면조선시대한성의범위를잠깐되짚어보는게좋겠다.한성은크게도성(都城)과성저(城底)로구성되어있었다.도성은성안의지역으로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등이자리잡았고,성저는성벽으로부터사방10리에이르렀다.

▲강북지역웬만한곳에선어디서나볼수있는북한산.노원구의한아파트단지에서찍었다.
옛지도와현재지도를나란히놓고가만히들여다보면이번에둘러볼서울북동부지역에서조선시대성저지역은북한산에서흘러내린우이천물줄기와중랑천물줄기를이은선이대체적인경계다.그러니까우이천~중랑천안쪽의강북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는한성부의성저지역이었고,바깥쪽의도봉구·노원구·중랑구·광진구는경기도양주에속했음을알수있다.

먼저서울중심에서바깥으로빠져나가는길목을살펴보자.조선시대도성에서동쪽으로가는큰길은모두흥인문(동대문)에서시작했다.북동쪽은흥인문~동묘~보제원~안암동천~제기현~고암~수유현~양주누원을거쳐한반도북동쪽끝인함경도서수라까지연결된제2로가있었고,동쪽은흥인문~안락현~중량포~양주~망우리를거쳐동해안평해까지연결된제3로가이어졌다.제2로와제3로는흥인문을벗어나동묘에이른뒤보제원(普濟院)에서둘로갈라졌다.지금이곳엔경동시장이있다.

경동시장은6·25전쟁이후경기도북부일원과강원도일대에서들여오는농산물과채소및임산물들이옛성동역(현미도파백화점자리)과청량리역,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을통하여몰려들면서형성된재래시장이다.특히공무여행자의숙식을제공하면서동시에의료사업도벌였던옛보제원터를중심으로자리잡은경동약령시장(서울약령시)은교통이편리한점을이용해전국각지에서생산된한약재를취급하는상인들이모여들면서자연스레생겨났다.

▲서울성곽에서내려다본성북동전경.1960년대재개발사업으로삶의터전을잃은달동네주민들의애환을노래한김광섭시인의‘성북동비둘기’가탄생한곳이다.
1960년대초20여개남짓했던점포수는1천여개규모로성장해지금은350년전통의대구약령시를앞질렀다.현재경동약령시장은전국거래량의70%를차지하면서우리나라의대표적인한약거래의중심지가되었다.보제원의전통과20세기의교통상황이딱맞아떨어진것이다.

흥인문에서보제원터가있는경동시장을지나는망우로는조선시대엔큰길이었지만,혜화문(동소문)에서성북구를관통하는옛길은소로였던듯하다.물론현재는동소문로가뻥뚫려있고,지하철4호선으로서울도심과성북구·강북구·도봉구·노원구등서울북동부지역을이어주는주요길목이지만말이다.

▲전국한의약거래량의70%를차지하는경동약령시장.350년전통의대구약령시장규모를훨씬앞질렀다.
혜화동로터리에서동소문로를따라고갯길을넘어서면제일먼저성북구다.성북동과보문동일대는전통가옥이많고,서울도시개발의초창기인1960년대도시재개발사업으로중상류층의단독주택지구가형성되어있다.학창시절에배웠던시한편들어보자.

‘성북동산에번지가새로생기면서/본래살던성북동비둘기만이번지가없어졌다./새벽부터돌깨는산울림에떨다가/가슴에금이갔다./그래도성북동비둘기는/하느님의광장같은새파란아침하늘에/성북동주민에게축복의메시지나전하듯/성북동하늘을한바퀴휘돈다.’<김광섭시인의‘성북동비둘기’중에서>

김광섭시인의시‘성북동비둘기’는재개발사업이한창이던1960년대후반의작품이다.이시는1960년대성북동지역의택지재개발사업으로달동네주민들이삶의터전을잃고쫓겨난사실을바탕으로하고있다.

▲동대문구한의약박물관에있는보제원모형.보제원은공무여행자에게숙식을제공하면서동시에가난한환자들을보살피는의료사업도벌였다./경동약령시장한의약거리에있는보제원유지비.
시의무대가된성북동은돈암장·선잠단·간송미술관·이태준고택·심우장·성락원·길상
사등서울의어느곳보다도옛사람의흔적과문화의향기가가득해고샅길을누비다보면옛정취에흠뻑빠져들수있다.바로옆에붙어있는서울성곽과연계하면가히서울으뜸산책길이라할수있을것이다.

아무리바빠도성북동에서빼놓고싶지않은곳이있다.그렇다.‘시민문화유산제1호’라는별칭을얻은최순우선생옛집에선<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기대서서>의정갈한문체를그려본뒤,일제강점기때10만석에달하는사재를털어훈민정음·혜원화첩등우리문화재를지키고찾아낸전형필선생의소장품을전시한간송미술관에선노블리스오블리주를실천한문화독립운동가의고고한체취를맡아보고싶다.비록매년봄·가을에만정기전을열어요즘같은겨울엔감상할수없지만말이다.

▲세종대왕기념관야외에있는구영릉의석물들.여주로이장되면서남은것들이다.
또소설가상허이태준고택도사랑스럽다.후손이운영하는찻집으로바뀐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상허가글을썼다는사랑방에앉아한잔들며그의수필집<무서록>을뒤적이거나,학창시절<문장강화>를읽으며글쓰기의엄격함에전율하던때를떠올리기도한다.심우장(尋牛莊)은또어떤가.‘님의침묵’을읊조리기좋은백담사계곡은아니더라도,만해의성정처럼늘푸른아름드리소나무아래에선만해가굳이북향으로집을지은까닭을되짚어보게된다.그런데,심우장은만해가마지막으로등을기댄집이기때문일까.심우장에서떠올리는‘님’은어찌하여자꾸만해가되는지정말이상하다.
▲홍릉수목원내에있는홍릉터.명성황후민씨는이곳에묻혀있다가1919년에경기도남양주시금곡으로이장하였다.

성북구엔유서깊은고개가둘이다.아주큰고개는아니었지만,모두도성에서북동쪽으로가는데중요한역할을하는고개였다.바로아리랑고개와미아리고개다.아리랑고개는정릉으로가는길목에있다하여예전엔정릉고개로불렸으나,1926년나운규가이곳에서한국영화예술에새이정표를세운영화‘아리랑’을촬영하면서부터지금의이름으로바뀌었다.



미아리고개는할말이아주많다.
조선시대백성들이같은한성부라해도사대문안쪽만한양으로느꼈듯이일제강점기와1960~70년대까지는바로이미아리고개를심리적인경계로느꼈던것같다.일제강점기때서울에서어린시절을보낸토박이어르신들말씀을들어보면,광복전엔전차종점인돈암동까지가서울이었고,미아리고개너머는서울로치지않았다한다.

▲불암산남쪽조망.저멀리왼쪽으로아차산~용마산~망우산으로이어지는능선이보인다.

그런데,미아리고개라고말하면무엇이떠오를까.사람마다다르겠지만아마도대부분은점집·달동네·공동묘지,그리고텍사스촌을떠올릴것이다.여기서잠시미아리고개의지명유래를살펴보자.예전엔현재의미아리고개를되너미고개로불렀다.18세기중엽으로여겨지는사산금표도에는호유현(胡踰峴)이라씌어있다.또겸재정선이그린도성대지도,고산자김정호가그린수선전도등대부분의지도엔적유현(狄逾峴)이라고기록되어있다.또돈암현(敦岩峴)도있다.모두되너미가한자로바뀐것이다.

‘되너미’엔무슨뜻이있을까.가장많이알려져있는유래는병자호란때되놈(胡人)들이이고개를넘어침입해왔다고하여고개이름이유래했다는설이다.그리고,한성을벗어날때이고개를넘으면당분간큰고개가없으므로마지막고개라는뜻으로되너미고개라고했다고도한다.또경사가심해고갯마루에오르면다시요기를해야된다는뜻,즉밥을되(다시)먹는고개라는말이변하였다고도한다.

▲농사의신인신농씨와후직씨를제사지내던선농단터.

모두나름대로그럴듯하고재미있다.하지만이길손의생각은조금다르다.‘되너미’에서접두어‘되’는‘일이힘에벅차다’는뜻을지닌순우리말형용사‘되다’에서온것이아닌가하는생각이든다.그렇게하면되너미고개는경사가심해서되게넘는고개,즉넘기힘든고개라는뜻이된다.

어쨌거나미아리고개는조선시대북방의여진족이혜화문으로도성을출입할때이고개를넘어왕래하기는했지만,우마차가통행하기어려운험한고개였다.그러니1세기전까지는그다지역할이크지않았다.그러나6·25전쟁당시엔이고개를넘는북한인민군탱크부대를막지못했고,인민군이이고개로패퇴할땐북으로끌려가던가족을눈물로배웅할수밖에없었던처절한사연도있다.전쟁의아픔을노래한가요‘단장의미아리고개’는그렇게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명문장가로이름을날린상허이태준고택.지금은후손이수연산방이란찻집을열고있다./만해한용운시인이1933년에짓고만년을보낸심우장.만해는총독부와마주보기싫다하여일부러북향으로집을지었다고한다./누에치기를처음했다는중국고대의서릉씨를모시고제사를지내던선잠단지.지금도뽕나무가심어져있다.

그러다휴전후근대화가진행되고,도시가팽창하면서북동부시민들이도심으로왕래할때거리가가까운미아리고개를많이이용했고,강북구·도봉구·노원구의도시규모가커지면서통행량은급증했다.그무렵서울시는미아로확장공사를벌이며경사를완만하게만들기위해흙을파내고길주변에옹벽을세웠다.

요즘미아리고개에서가장많이눈에띄는것은점집이다.

서울시청자료를찾아보니미아리에점집이들어선것은1966년.시각장애역술인이도병씨가이곳에자리잡으면서부터다.원래서울엔남산기슭인중구양동판잣집에맹인역술인들이모여살았는데,이동네가재개발되자그곳에살던이도병씨는집값이싸고전차종점이가까워교통이편리한미아리굴다리밑에자리를잡고점을쳤다.개업2년만에이씨는가게를얻었고,10년만에집한칸을마련했다.

이일이점차입소문이나면서동료역술인들도하나둘정착하기시작해1980년대중반에는100여곳에이를정도로번창했다.현재는70여곳의점집이있다고한다.정확한주소로는성북구동선동4가279번지이다.이렇게미아리고개를넘어서면최근시행된성매매특별법으로썰렁해진‘미아리텍사스촌’이오른쪽으로보인다.여기서잠시서울매춘업의역사를짚어보자.각종자료엔매춘을업으로하는유곽(遊廓)이공식적으로등장한해를1904년으로기록하고있다.

▲1960년4·19혁명당시유명을달리한민주열사를모신수유동의4·19국립묘지./육당최남선이1941년부터1950년까지집필활동을하였던고택인소원(素園)터.친일활동장소라는이유로철거된뒤연립주택이들어섰다./1506년중종반정으로강화에유배되었다가병사한조선10대왕연산군의묘.바로앞으로방학동아파트단지가들어섰다.

1961년성을팔고사는사람모두를무겁게처벌하는윤락행위방지법이제정되었으나유명무실했다.그러던1968년,당시전국에서규모가가장커서윤락지대의대명사로불렸던‘종삼’이이른바‘나비작전’으로철거되었다.1945년부터종로3가뒷골목을중심으로형성되었던종삼집창촌은6·25전쟁후엔종로3·4가와낙원동·봉익동·훈정동·인의동·와룡동·묘동·권농동·원남동에광범위하게퍼져있었다.

그러나‘나비작전’도성공하지못했다.종삼에서쫓겨난이들중일부가미아리와강남으로집단이주하면서지금의‘미아리텍사스촌’과‘강남룸싸롱촌’이형성된것이다.최근엔서울최대규모인‘미아리텍사스촌’을비롯해동대문구전농동의‘청량리
588’,용산역부근,강동구‘천호동텍사스촌’,영등포역부근등에집창촌이형성되어있다.

그런데,강북구미아동주민들은‘미아리텍사스촌’이란말을매우싫어한다.오죽하면몇년전엔‘미아리텍사스촌’란말을언론등에서관습적으로쓰지말것을호소하기위해10만명이넘는구민들이서명을했겠는가.‘미아리텍사스촌’의정확한행정명은‘하월곡동88번지집창촌’이다.

위와같은서명사건에서보듯적지않은미아동주민들은‘미아리콤플렉스’를갖고있다.선을보거나미팅을했는데집이미아동이라는이유로퇴짜를맞거나,직장동료들에게‘집이미아리라좋겠네~’하는농담을들었을때는정말당장이라도이사를가고싶은심정이란다.또용한점쟁이를소개해달라고할때도그렇고,나이든사람들이공동묘지·달동네같은이미지를떠올릴때도힘겹다고한다.그래서이들은미아동에산다고말하는대신에정릉이나삼양시장근처등에산다고돌려서이야기하는경우도있다고.물론현재의강북구미아동은지금까지이야기한미아리의이미지와직접적인상관이없는데도말이다.

미아동을품고있는강북구는1973년성북구에서갈린도봉구에포함되었다가1995년도봉구에서분리되었다.여기서또하나.많은사람들이의아해하는점이있다.강북구?명색이강북구인데왜강이없냐고.한강의북쪽에있기때문에강북이라했다는데,그렇다면강북에있는14개의도가모두강북이아닌가.설령그렇더라도서울에서한강을뜻하는‘강’자가들어간구는강남구·강동구·강서구·강북구인데,유독이강북구만한강에접해있지않다.그것도북한산안쪽으로한참들어가있다.

그래서서울의각구의명칭을살펴보았다.그결과서울의25개구가운데가장성의없는작명이라는결론을얻었다.하긴얼핏생각하면북한산·삼각산·인수봉등등대표하는명소가많기때문에작명이수월했을듯하지만,그봉우리들정상의주소가거의경기도고양시에속하니전문가들도고민이많기는했을것이다.그렇다해도‘북한구’가이상하면‘북한산구’,‘삼각구’가이상하면‘삼각산구’,그리고‘백운구·인수구·우이구’등등부르다보면정들좋은이름을마다하고하필이면한강과전혀상관없는데도강북구라니.

길손은이중에상징과위치등등부족할게없는‘삼각산구’라는명칭이가장맘에든다.삼각산은북한산의옛이름이기도하면서현재강북구청에서삼각산옛이름찾기운동을활발히벌이고있으니더욱인연이깊지않은가.북한산이삼각산이란이름을되찾는날,과연강북구의명칭도바뀔수있을까.대관령으로유명한평창군도암면이2006년에대관령면으로바뀐것처럼말이다.

삼각산운운에눈치를챘겠지만,누구든지강북구에들어섰다면아마도거대한암봉들을마주하게될것이다.최고봉백운대를중심으로북쪽의인수봉,남쪽의만경대가삼각뿔을이룬다하여삼각산이라불리던북한산은금강산·지리산·묘향산·백두산과함께우리나라오악으로꼽혔던명산이다.

백제시대들어북한산은역사의무대에등장한다.정약용이지은<위례고>엔‘위례성은백제시조가처음도읍하였던곳으로옛자리가지금한양성동북쪽에있다.하북위례성의옛자리는지금경성의동북쪽10리되는곳삼각산동쪽에있는데,주민들이그곳을잘못불러한양고현이라하였다’고나와있다.하북위례성의위치가지금의북한산동쪽어디쯤이었음을짐작케한다.전문가들은범위를좁혀지금의미아동주변을온조가처음으로자리잡은하북위례성자리로추정하기도한다.

▲아차산정상에서감상하는여명.도도히흐르는한강너머로옛백제위례성이서서히밝고있다.

북한산기슭의수유동은독립의열망과민주화의소망을위해목숨을바친순국선열과민주화영령들이잠들어있는곳이다.가장북쪽엔4·19혁명의희생자281명의민주영령이잠들어있는4·19국립묘지가있다.그주변으론독립협회조직항일투쟁,헤이그밀사로나갔던이준열사,3.1독립운동민족대표손병희등24명의열사묘소가흩어져있다.

강북구에선이곳을탐방코스(6.7km)로잘꾸며놓고매년가을강북구민한마음걷기대회를열고있고,강북구공무원으로발령이나면반드시이곳에들러묵념하고국가를위해일하는각오를다진다고한다.참좋은일이다.화계사는조선어학회주관으로최현배등국문학자9명이모여한글맞춤법통일안을만들어공포한곳이기도하다.

▲아차산입구골목길의고구려벽화.아차산성엔고구려가70여년간한강유역을지배했던흔적이곳곳에남아있다.

북한산의대표들머리인우이동등산로입구에서얼마쯤오르면봉황각이반긴다.손병희선생등이일제에빼앗긴국권을되찾기위해젊은이들을합숙훈련시키던곳이다.3·1운동의민족대표33명가운데15명이이곳에서배출됐다.차로오를수있는큰길끝에있는도선사는신라말기인862년에도선국사가창건한절집.‘천년후불법과국운을일으킬곳’이라는말이전해오기때문에일제가절에불을질렀다.도선국사가손가락으로조성했다고전해지는높이20m암벽에새겨진관세음석불에눈맞춘뒤,본격적으로산행할작정이아니라면북한산자락을벗어나야한다.

▲아차산에서바라본광진구쪽의조망.아차산은사방으로의조망이빼어나다.

잠깐,북한산과헤어지기전에꼭들러볼곳이있다.바로육당최남선의옛집소원(素園)이있던자리다.1939년건설된이집에서육당은1941년부터1952년까지거주했는데,일제말기친일파로변절하면서강연과신문논설을통해조선청년들에게참전을적극독려한곳이다.고택보존을놓고찬성이냐반대냐수많은논란이있었으나결국지난2003년에철거하고말았다.

이력들추기를껄끄러워하는후손들이적극적으로철거를원하기도했으나말년에친일을한집이란이유가가장컸다.소원은단층목조기와집으로남쪽으로는정원이있고집주위엔향나무·전나무등이들어서있었는데,지금은거기에5층짜리연립주택이들어섰다.

우이동에서고개를넘어방학동으로건너가연산군묘와은행나무를보면북한산자락은거칠게나마둘러본게된다.이쯤에서북한산과헤어지고도봉산기슭으로넘어간다.도봉산동쪽,지금의지하철1호선도봉산역근처엔누원(樓院)이있었다.조선시대도그랬고지금도서울의가장변두리인이지역이조선시대엔독특한상권으로제법호황을누렸다.

누원은한성에서원산을거쳐경흥의서수라까지연결될뿐만아니라가까이는연천·적성·포천·영평으로도이어지는자리였다.즉당시한성에서북동쪽으로통하는큰길목이었기때문에함경도원산만일대에서나는어물과길주·북청·종성·회령등지에서생산된포목등을도중에거둬들일수있었다.이곳은도성시전의금난전권밖에있으면서도비교적도성에서가까워성안의독점적도매상인인사상도고들과연결이쉬웠다.

게다가성안의영세상인들까지도직접이곳에서물건을구입할수있었기때문에제법번창했다.그렇게도성의시전상인들애를먹였던큰장이섰던누원이건만현재는도봉동의누원초등학교,누원고등학교등에서만겨우명맥을유지하고있다.도봉서원·천축사등을둘러본뒤도봉산기슭에서벗어나려면중랑천(中浪川)을건너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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