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탐방 [8]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3남동부[1]

상천벽해강남에어린백제의향기

한강을건넌다.천호대교.길손이사는노원의불암산자락에서서울의남동부로가려면이다리를건너는게가장무난하다.물론조선시대라면광나루에서나룻배를이용했을테지만,지금은다리를이용하지않고한강을건널수있는방법은없다.


▲백제전기에쌓은것으로알려진몽촌토성.강남지역의개발광풍에도불구하고다행히높다란빌딩들로부터침입을받지않았다.
지도를놓고세어보니현재서울주변한강물줄기엔모두27개다리가놓여있다.한강최초의다리는1900년에세워진한강철교(용산~노량진)다.이후여기저기다리가들어섰는데,한강하류부터살펴보면가장최근인2008년1월개통된일산대교를비롯해김포대교·행주대교·방화대교·가양대교·성산대교·양화대교·당산철교·서강대교·마포대교·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잠수교·반포대교·한남대교·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청담대교·잠실대교·잠실철교·올림픽대교·천호대교·광진교·강동대교가있다.이외에도현재올림픽대교와암사대교도건설중에있으니한강은100여년만에전혀다른얼굴이되어버린셈이다.

접근하는방법에따라다르겠지만,아무래도서울남동부지역여정은한강상류에서하류쪽으로물길따라내려가며강동구~송파구~강남구~서초구순서로훑어보는게무난하지않을까싶다.이렇게하면선사시대에서백제와조선을거쳐현대에이르는역사적흐름을무난히따라갈수있다는이점도있다.

서울남동부첫방문지는강동구의대표유적지인암사동선사유적지다.이제세월이많이흘러80여년전인1925년여름에있었던을축년대홍수를기억하는노인들은거의없다.그러나수많은기록들엔서울한강유역을덮쳤던대홍수의흔적이생생하게남아있다.그당시서울전역에서피해를입지않은곳이거의없었다.강변물가의적지않은마을들이흔적도없이사라지거나침수피해를입었고,강변의정자나문화유산도떠내려갔다.

▲몽촌토성에서산책을즐기는시민들.
조선시대한강뱃길의기착지였던암사동일대도큰피해를입었다.암사동선사주거지는이대홍수때언덕이허물어지면서발견되었다.이후몇차례발굴한결과,맨아래의제1층에서는신석기시대유물,중간의제2층에서는청동기시대의유물,맨위의제3층에서는백제의토기조각등이나왔다.

결국이곳은기원전4,000년무렵에신석기시대사람들이살았던유적지로서지금까지확인된우리나라신석기시대유적중최대의마을단위유적으로서가치가있다.입장료(500원)보다주차료(2,000원)가4배나비싼곳이지만한두시간둘러보며해설사의설명을듣다보면본전을뽑고도남는다.

선사유적지를나와남쪽으로뻗은큰길선사로를타면천호동을지난다.인가수천호가살만한지역이라는강동구의천호동은예전엔광주군구천면곡교리의일부로서,광나루로인해형성되기시작한도진(나루터)촌락이다.광나루는서울에서광주로통했으며,한강뱃길로는멀리충주를거쳐영남대로를따라동래또는원주를지나동해안으로가는요충지였다.1936년에광진교가놓이면서천호동과서울연결이육로로바뀌었고,서울도심쪽의도시화물결이광진교를손쉽게건너서천호동쪽으로흘러들기시작했다.

▲강동구에있는암사동선사주거지.기원전4,000년무렵인신석기시대의대표적유적지다.
천호동을벗어나면백제가손짓한다.제일먼저풍납토성이반긴다.한강유역을최초로장악한고대국가는백제였다.그런데백제의기원은설이다양하다.백제의시조가온조1명이라는설,비류·온조2명이라는설,비류·온조·구태3명이라는설등이다.이외에도비류가세운나라가본래의백제이고,고이왕때온조백제로교체되었다는비류백제설,비류·온조의어머니인소서노가시조라고도하는서소노백제설등다양한의견이있다.

현재역사학계에서인정받고있는내용에따르면졸본부여사람인비류와동생온조는주몽의원자인유리가아버지를찾아와태자가되자남쪽으로함께내려온뒤부아악(북한산)에올라도읍을정할지세를살폈다.형인비류는바닷가쪽에도읍을정하려했다.그러자부하들이말렸다.

▲암사동선사주거지움집안엔신석기시대사람들의생활상을알수있도록꾸며놓았다./암사동선사주거지에서의빗살무늬토기만들기체험.아이들에게큰인기가있다.
“이하남의땅은북쪽으로는한수를끼고동쪽으로는높은멧부리에의지하고남쪽으로는기름진들이펼쳐져있고,서쪽으로는큰바다로막혀있어그천연으로이룩된요새의이로움으로보아얻기가어려운지세이온데,이곳에서도읍을일으키는것이역시마땅하지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비류는이들의의견을무시하고서쪽으로가서미추홀(지금의인천)에도읍을정했고,온조는하남위례성에나라를세우게된다.그러나미추홀의땅이습하고짜서사람살기적당치않자비류는부끄러워후회하다죽었고,그백성들이하남위례성으로돌아와온조의백성들과합치게된다.이후백제는고이왕(?-286)때국가체제를정비하고왕권을강화하게된다.이후475년고구려의침입을받고웅진(지금의공주)으로천도하기전까지하남위례성에도읍을두고있었던500여년간(BC18-AD475)을흔히한성백제라고한다.

그렇다면한성백제의도읍이었던하남위례성의위치는어디일까.여기에대해서는아직의견이분분하다.백제가475년고구려에밀려금강쪽으로내려간뒤위례성이철저히파괴된데다남아있던고분도세월이흐르며거의도굴되었기때문일것이다.하지만학자들은대체적으로지금의송파구일대를하남위례성으로여기고있다.이곳엔풍납토성,몽촌토성을비롯해백제초기에세워진적석총,고분등한성백제의흔적이곳곳에남아있기때문이다.그래서송파구에널려있는백제그림자밟기는공주나부여답사와는또다른빛깔의감상에젖어들게한다.

지상5층이상건물을신축할수없는탓에고만고만한3~4층짜리건물들사이로길게이어진풍납토성은백제초기에흙으로쌓은성이다.원래둘레가4km나되었으나1925년대홍수로남서쪽일부가잘려나가현재는2.7km정도만남아있다.예전엔토성위를거닐수있었으나지금은성벽아래에산책로를조성해놓았다.

▲제대로관리하고있는덕에인근송파·강동구주민들의산책코스로사랑받고있는몽촌토성.

그런데,1990년대말에부분적인발굴작업이이루어지면서유물과건물지등이대량으로나오자학자들은이곳을한성백제시대왕이머물던위례성이거나여러위례성중하나라여기고있다.그러던중2000년재개발조합주민들이발굴유적을임의로파괴하자정부는이곳을사적으로지정해건물신축을제한해왔다.

▲몽촌토성을둘러싸고있는물길은성벽방어용으로설치한해자다.이곳에서는이외에도목책흔적이발굴되었다./한성백제의도읍인하남위례성으로여겨지는풍납토성.하지만이렇게주변으로건물이들어차있어발굴에애를먹고있다.

올림픽공원에포함시켜보호하고있는몽촌토성은둘레가약2.7km되는데,풍납토성과달리민가나건물들로부터큰침입을받지않고있다.자연암반층을급경사로깎아만들기도하였으며,성을둘러싼물길인해자도확인되었다.또문터와집자리,저장용구덩이가확인되었고,동전무늬가찍힌자기조각과여러종류의토기류,철제무기류등도나왔다.이성역시도읍지인위례성이라는견해와위례성을지키던방어용성이라는견해가엇갈리고있다.

▲한성백제시대중에서도4~5세기무렵의것으로알려진방이동백제고분군.

건물들이바싹붙어둘러싸고있는풍납토성은성벽여러군데가도로로단절되어있어걷기불편한반면,몽촌토성은제대로관리하고있는덕에인근송파·강동구주민들의산책코스로사랑받고있다.비록한때는피흘리던격전지였으나도심한가운데에심신을달래줄이런유적이있다는게얼마나큰행복인지.풍납토성도주민전체를이주하고발굴한뒤이처럼복원하면좋겠다는생각도해보지만,그보상비용만해도무려수조원이든다니정부로서도막막할따름이다.


석촌동의백제초기적석총에선고구려의냄새를맡는다.적석총이란고구려초기부터나타난고구려계통의무덤으로서돌무지무덤이라고도한다.따라서이무덤은고구려계통의사람들이남으로내려와한강유역에정착하면서세운백제초기어느왕의무덤이라는증거가되는것이다.

▲송파구의백제초기적석총.고구려계통의사람들이남으로내려와한강유역에정착하면서세운백제초기어느왕의무덤이라는증거가된다./석촌호수.원래는한강본류였으나1971년잠실도를육지로붙이는공사를할때호수가되었다.

그런데여러개의무덤가운데3호무덤의규모는동서49.6m,남북43.7m,높이4m로매우크다.이는옛고구려지역인만주통구에있는장군총,즉고구려광개토왕의무덤으로알려져있는것보다큰것이라한다.그렇다면이무덤의주인은백제시조인온조일까?아니면백제의국가기반을확립한고이왕?그도아니면누구일까?적석총공원을거닐다보면,칼바람부는한겨울에도이런상상속으로빠져드니상상력풍부한이가따스한봄볕아래서거닌다면머릿속에역사소설한편뚝딱만들어내지않을까.

이렇게백제의그림자를밟으며송파구석구석을돌아다니다보면원하건원치않건쓰라린역사의흔적도만나게된다.삼전도비.1639년(인조17)인조가청태조에게항복을했던한강변삼밭나루터에세운비석으로정식명칭은대청황제공덕비다.

부끄러운역사의상징인만큼사연도많다.원래한강의본류였던석촌호주변에세워진것으로추정되나그치욕적인의미때문에청일전쟁후묻어버렸고,1895년에일본인들이다시세워놓았다.그리고1956년국치의기록이라해서땅속에묻었다가다시지금의위치에옮겨세우는등우여곡절을겪었다.서울시는후세들에게패배와치욕의역사를보여교훈이되도록소공원을조성해놓았는데,주민들에따르면이따금누군가에의해훼손되기도한다고한다.

▲1서초구우면산북쪽기슭에자리잡은예술의전당.고층빌딩의수직선과오페라하우스의곡선이절묘한조화를이룬다.2압구정동로데오거리의밤풍경.1990년대초이른바‘오렌지족’이라는신조어를탄생시킨거리로유명하다.3지하철2호선이지나는강남역사거리.강남지역젊은이들에게사랑받는약속의장소다.

상전벽해라는말도있지만,송파에서도잠실만큼큰변화를겪은곳이또있을까.잠실은조선세종때왕명으로뽕나무를심고동잠실이라불리던곳이다.잠실은조선후기까지만해도한강에떠있는하중도(河中島)였다.그런데이섬은한강북쪽강변,즉지금의광진구자양동에더가까이있었다.대동여지도나옛지도를보면상림(桑林)이라기록된잠실섬이한강북안에거의붙어있는것을자세히확인할수있다.그런데,세월이흐르면서홍수때마다남서쪽으로흘러내리던물줄기가약간씩북서쪽으로흐르면서잠실섬이남쪽으로이동하게된것이다.

잠실섬은1930년대까지만해도온섬에뽕나무가무성했으나1945년광복이후뽕나무를베어낸뒤땅콩·우엉·참외등을심는채소밭으로쓰다가1971년잠실섬을하안남쪽에붙이는물막이공사를해육지로바꿔버렸다.이름하여‘잠실하중도물막이공사’.공사중잠실섬남쪽으로흐르던물줄기를폐쇄할때그일부를호수로남겨두었으니바로지금의석촌호수다.

현재송파대로가지나는석촌호수동호와서호사이는조선시대의송파진이다.이곳은고려와조선왕조에이르는천년동안한성·충청도·경상도로이어지는중요한나루터였다.당연히상업도발달해상설시장이던송파장은전국각지방의산물이집산되는중심지로서조선15대장터중하나로성장했다.그러나1925년대홍수때송파진과송파장터가유실되면서모래벌과강줄기로변해버리고말았다.그러나송파장의이런전통은전국각지의산물이모여드는가락동농수산물시장으로이어지고있다.

▲리나라최초의국악전문박물관인국악박물관.인근에자리한종합예술학교,국립국악원,예술의전당등과함께복합문화예술센터를이루고있다./도심의높다란빌딩사이에자리잡은봉은사.도심속의수행처로사랑받고있다.

송파구에서서쪽의탄천을넘으면강남구다.서울최고의부유층들이모여사는강남·서초·송파구이른바‘강남3구’엔부를상징하는아이콘이많다.압구정동로데오거리,강남역,청담동패션거리,테헤란밸리,대치동학원가,예술의전당….이곳엔교육·생활·문화등에서최고의인프라가구축되어있다.이런사실을증명하듯도로는어디나왕복8차선이고,거리도휴지한장보이지않을정도로깨끗하다.도로곳곳에설치되어있는차량감시용CCTV는이방인을주눅들게한다.거기에길가의건물은높을뿐만아니라세련되기까지하다.

강남에대해이야기하려면압구정동을빼놓을수없다.과거로돌아가보자.조선시대한강에서가장인기높았던정자는바로한명회가지은압구정(狎鷗亭)이다.압구는한명회의호로서‘세상일다버리고강가에서살며갈매기와친하게지낸다’는의미가있다.

한명회는일찍이부모를여의고젊어서는매우불우했지만,1453년세조의계유정난에협력한이후에는출세가도를달렸다.세번이나재상의자리에올랐고,네차례나일등공신이되면서많은토지와노비등을상으로받았다.또두딸을각각예종비장순왕후와성종비공혜왕후로만들어부귀영화를함께누린인물이다.

이런한명회는소박함을표방한압구정으로선비들을불러시연(詩宴)을베풀곤하면서정치적인끈을놓지않았다.나중에이정자의명성은중국사신들에게까지알려져조선에오는사신들은압구정에와서놀기를원했다고한다.그는중국사신을접대하면서궁중에서만쓸수있는용봉차일(龍鳳遮日)을설치하려고했다가사간원의탄핵을받기도하였으니어찌세상일을잊은것이라할수있겠는가.

한명회가세상을떠난뒤세월이흐르면서압구정의주인이여러번바뀌었고,마지막소유자는박영효(1861-1939)라한다.철종의딸인영혜공주와결혼하여금릉위가된그에게하사되었던것이다.그러나1884년(고종21)김옥균등과함께갑신정변을일으켰다가역적으로몰려몰수당했고,고종말년에다시돌려받게된다.이후일제강점기를거치면서압구정은점차쇠락했고,어느때인지허물어져지금은흔적조차찾을수없다.

1990년대초에이른바‘오렌지족’이라는신조어가압구정에서등장했을때이런사연을아는사람들은모두고개를끄덕였다.실제로부귀영화를한몸에누렸던한명회의그림자가어른거리는압구정,그리고현재대한민국을대표하는부유층의만남은어딘가절묘한게있다.

신조어사전엔오렌지족을‘부모의부를바탕으로유학을경험하고서울강남일대에서퇴폐적인소비문화를즐기는젊은이들을일컫는용어’라고표현하고있다.이들은부유층이라는특혜에도불구하고개인주의·향락적소비문화에빠져상류층에요구되는도덕적의무인노블리스오블리주가없어비판의대상이되기도했다.

압구정동로데오거리는사치·향락의상징이던오렌지족이즐겨찾던거리로서1990년대초패션의중심가로자리잡고당시부유층젊은이들의해방구역할을했다.1970년대중반압구정동일대에대규모아파트단지가조성될때터를잡은고소득층2세들이1990년대초반성인으로성장하면서이곳에상가가형성되기시작한것이다.

▲조선3대왕태종과원경왕후민씨의쌍봉릉인헌릉.왼쪽이태종의능이다./남태령정상표석.글씨는추사김정희의글씨를집자해새긴것이다./호젓한남태령옛길과왕복8차선의새길.남태령은조선시대삼남대로의큰고개였기때문에수많은사연이전한다.

상가사람들말을들어보면강남·서초·송파구일대의부유한40~50대여성들은청담동명품거리를자주찾고,20대여성들은압구정로데오거리에서주로시간을보낸다고한다.그러나이도벌써옛날이야기가되었는지가게를꾸리는사람들사이에선압구정로데오거리의상권이수그러들기시작했다는한숨이흘러나온다.압구정로데오거리에실망한강남의젊은이들가운데압구정마니아를빼놓고는대부분강남역이나코엑스로향한다는것이다.

그래서찾은강남역.강북에명동이있다면,강남엔강남역이있다.‘강남’이란명칭의상징성도있거니와지하철2호선과수도권을잇는20여개의버스노선이이곳을지나교통도아주편리하다.무엇보다젊은이들이만나즐길수있는인프라가잘갖춰져있다.따라서어느덧강남역은젊은이들의다양한가치와감정이교차하고,소비문화의상징으로자리를잡게된것이다.

얼마전KBS다큐멘터리‘젊음은왜강남역에열광하나’편은강남역에서도인구이동이가장많은7번출구에서카메라를들었다.우연히보게된이프로는서울이란도시에서소비문화의상징이던강남역을비교적따스한시선으로바라보고있었다.이카메라에잡힌강남역은단지이미지를소비만하는곳이아니라,젊은이들이꿈을키우는공간이기도하고,여러문화가살아숨쉬는공간이기도했다.

잠시분위기를바꿔보자.1970년대개발되기이전엔허허벌판일뿐이었다는강남이라지만어찌전통의향기가득한문화유산이없겠는가.흔히선릉·삼릉등으로불리는선정릉,조선불교의중흥에앞장섰던봉은사가대표적이다.먼저선정릉으로강남이야기를풀어보자.

강남의고층빌딩숲속에자리하고있는선정릉은강남의허파로서공기청정기역할을한다.숨막힐듯한빌딩숲속에서도테헤란로가건강성을유지하고있을수있는까닭은바로이선정릉때문일것이다.1시간을꼬박걸어야전체를둘러볼수있는이곳은규모로보나조경으로보나결코허투루여길수있는단순공원이아니다.능뒤쪽으로는굽은노송들사이로있는산책로를거닐다가깊은숨을들이켜도전혀부담스럽지않다.강남한복판의빌딩숲과고풍스런왕릉은어쩌면부자연스럽고,어떻게보면과거와현재의절묘한조화라고볼수도있다.

선정릉은조선9대왕성종과계비정현왕후를모신선릉(宣陵),그리고그아들인11대왕중종홀로잠들어있는정릉(靖陵)을한번에부르는명칭이다.성종은세종·세조의치적을기반으로문화정책을펴고,20여년에걸쳐조선최고의법전인경국대전을비롯해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오례의·악학궤범등을편찬·간행해조선전기의문물제도를완성한왕이다.정치적으로는훈구파와사림파의두세력의균형을잘맞춰태평성대를이루었다.

하지만사적으로는폐비윤씨사건을겪었고,조선최대의섹스스캔들인어우동과의관계설등여성편력으로도유명했다.그리고아들인연산군폐위등의사건과얽혀현재도사극의단골소재가되고있다.어쨌거나성종은조선의기반을닦은왕이지만사후는전혀편치않았다.

현재성종의능엔유해가없다.임진왜란때왜병들은선릉과정릉의무덤을도굴하고관마저불태우는만행을저질렀는데,나중에성종의시신은찾지못하고중종의시신만겨우찾을수있었다.그래서할수없이선릉엔부장품으로넣었던옷을태워남은재를다시관에담아안장했던것이다.또선릉은홍살문과능상에여러차례화재가발생하기도했고,지금은초현대식건물들한가운데에서공해와힘들게싸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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