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는사림파의기반이었던향약보급과현량과실시등새로운정책을실시하며도학정치에바탕을둔개혁정치를펼쳤으나무리한개혁정책은1419년실시한‘정국공신위훈삭제’로갈등의골은비극을향해치닫는다.결국중종은조광조에등을돌리게되고,그결과기묘사화가일어나수많은사림이목숨을잃는다.
중종은원래장경왕후의희릉(禧陵)과함께고양에있었으나중종과묻히고싶어했던셋째부인문정왕후가봉은사주지보우와의논해현재의자리로억지로옮기게된다.하지만,옮겨놓고보니길지가아니었다.지대가낮아서매년여름홍수때마다강물이능앞에까지들어오고재실(齋室)도침수되는일이잦았다.여러차례큰돈을들여흙을쌓았으나침수는계속되었다.문정왕후는결국현재의태릉(泰陵)에홀로잠들수밖에없었다.‘조선의측천무후’로서무소불위의권력을휘두르던그녀도안되는것이있었던것이다.
봉은사(奉恩寺)는서울지역의대표적사찰로서당시선·교종의중심적위치에있었다.문정왕후의후원을받았던보우(?-1565)는연산군과중종대를거치면서존폐의위기에놓여있던조선불교를되살려낸종교운동가이자서산·사명대사로계승되는호국불교의명맥을연봉은사의선승이다.하지만보우에대한평가는극단적으로엇갈린다.불교계에서는선교양종을부활시킨순교승으로추앙하지만,조선왕조실록은요승으로규정짓고있다.
1960년대초까지만해도강북쪽에서봉은사로가려면뚝섬나루에서나룻배를타야만했다.조선시대엔봉은사때문에뚝섬나루는천객만래(千客萬來)한다해서천만진(千萬津)이라는이름으로도불릴만큼붐볐다.이렇게한강을건너와갈매기한가롭게날갯짓하는강변을뒤로하고허허벌판을5리쯤걸으면봉은사에닿았다.
지금은그길을따라왕복8차선의영동대로가나있고,봉은사주변으로는우리나라최고의부촌들이둘러싸고있다.북쪽언덕엔명문으로이름높은경기고등학교가,남쪽엔한국종합무역센터가우뚝버티고있으며,주위로는한국에서가장비싼아파트중하나인삼성동아이파크를비롯해아셈타워,인터콘티넨탈호텔등이자리하고있다.
봉은사는이렇듯전통과현대가극적으로어우러지는도심속의수행처이지만,여기서조금속물근성을보이자면,아마우리나라에서땅값이가장비싼곳에자리잡은절집이아닐까싶다.
사건은강남개발이시작된1970년대에발생했다.당시조계종은총무원건물을세우기위해돈이아쉬웠고,정부는강북도심에있는공기업들을강남으로불러들이기위한땅이필요했다.주지승의극렬한반대에도불구하고정부와조계종사이엔거래가이루어졌고,삼성동널따란벌판12만평이팔렸다.평당6,200원.그리고그자리에한국전력본사가들어섰다.30여년의세월이흘렀고,2005년정부의공기업지방이전정책이발표되면서한국전력본사가광주광역시로옮겨가게되었다.
이렇게강남의마지막노른자위땅이매물로나올조짐을보이자대기업·금융회사·부동산개발업체등이눈독을들였다.부동산전문가들은현재공시지가보다2~3배나되는평당1억원을호가할것으로보고있다.결국평당6,200원이었던땅이35년만에무려1만배가넘는가격의매물로나온것이다.그게12만평이었으니….수조원의가치를깨닫지못한이거래는불교계최악의부동산거래로꼽히고있다고한다.
하지만오늘도봉은사법당의부처님은너그러운미소를짓고계실뿐말씀이없다.
서울남동부의마지막여정인남태령(南泰嶺·183m)을향해삼남대로를달린다.지금의동작대로다.따라서걷거나나귀를타는것도아니요,시속80km로왕복8차선도로를승용차로간다.조선시대에한성에서경상·충청·호남의삼남지방으로갈때이용하던가장큰길은숭례문~동작진(동재기나루터)~삼남대로(동작대로)~남태령~과천~수원을지났다.대동여지도엔이구간을‘과천로’라고적고있다.
남태령의옛이름은여우고개,한자로는호현(狐峴)이라적었다.지금의남태령이란이름은정조로부터유래했다.정조는부친인사도세자의생일때마다수원화산에있는능으로참배를갔다.11회의참배중처음5회는과천로를,나중엔시흥로를이용했다.
어느날과천로를이용해이고개를넘을때였다.가마가고갯마루에서잠시멈추자정조는물었다.“이고개이름이무엇인고?”그러나수행한신하들은‘여우고개’라는말을입에올리지못해머뭇거리고있었다.그때과천의현리인변이방이불쑥아뢰었다.“예,남태령이라하옵니다.”모두들긴장했다.이에다른이가“이고개이름은본래여우고개인데어찌거짓을고하느냐?”하고힐책했다.
정조가변이방에게다시물었다.“그래?그런데,왜너는남태령이라하였느냐?”“예,고개이름은본래여우고개이지만,신하로서임금께그와같은상스러운말을여쭐수가없어,서울에서남쪽으로맨처음큰고개이기에남태령이라했습니다.”“그래,그이름한번참좋구나!”이후이고개이름이호현에서남태령으로바뀌게되었다고한다.
조선시대에경상·충청·전라도로통하는삼남대로남태령으로얼마나많은사연들이넘나들었을까.그렇지.과거에급제하고암행어사가된이몽룡이남원으로내려갈때이고개를넘었지.그리고중종때개혁을꿈꾸다화순의능주로유배를떠난조광조도이고개에서쉬어갔고,임진왜란때나라를구한영웅이순신장군도1597년누명을쓰고모진고문을당한끝에출옥한후용산에서한강을건너노량진을거쳐남태령을넘으셨구나.또북청유배지에서돌아온추사김정희는선친이마련한과천의과지초당에서4년간의말년을보냈으니누구보다도남태령을잘알았을것이다.하긴그래서남태령정상에표지석을세울때추사의글씨를집자하지않았던가.
또누가있을까.그래.가난한선비,이름없는민초,장사꾼들도나름대로사연을안고이고개를넘나들었을것이다.물론그들은이고개를넘으려면호랑이·도적으로부터보호해준다는명목으로걷던월치전,즉‘고개넘잇돈’을준비해야만했을것이다.얼마였을까?두푼?세푼?남태령옛길에서펼치는상상은끝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