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탐방 [11]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4남서부[1]
“한강의역사는나루터에남아있네!”

‘여긴민족의얼이서린곳조국과함께영원히가는이들해와달이이언덕을보호하리라’동작동에있는국립서울현충원.이곳은국가와민족을위해애쓰시다가돌아가신호국영령들이잠들어있는민족의성역이다.추운겨울이물러난이른봄날,해뜰무렵에누구보다먼저현충탑에향사르고묵념을올리니마음은한없이경건해진다.

▲한강대교에서바라본여의도.이섬은원래넓은모래밭이었으나제방을막고흙을돋운뒤지금과같은현대적인수상도시로변모했다.
지금숲속의장끼는제목소리로까투리를부르고,노란꽃망울을터뜨린산수유도제빛깔을갖고있듯,우리가제나라말로제노래를부를수있는건모두여기에누워계신분들덕분이아니겠는가.한없이일어나는감사의마음.이번달서울남서쪽기행의첫대상지로동작동국립현충원을선택한건잘한일이라는생각이든다.

국립현충원이서울의하고많은자리중에하필한강이내려다보이는동작동언덕에자리잡는이유는여러가지가있겠지만,길손은아마도한강이서울의중심이요,대한민국의상징이기때문이아닐까짐작해본다.

한강의지명을살펴보면,한사군과삼국시대초기엔대수(帶水)라했다.한반도의중간허리부분을띠처럼둘렀다는뜻이다.고구려광개토대왕비엔아리수(阿利水),백제는한수(漢水)또는욱리하(郁利河),신라는상류를이하(泥河),하류를왕봉하(王逢河)라고했다.한편,삼국사기신라편지리지엔한강을한산하(漢山河)또는북독(北瀆)이라고도했다.고려는큰물줄기가맑고밝게뻗어내리는긴강이란뜻으로열수(列水)라고불렀다.또모래가많은일부지역을사평도(沙平渡),또는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했다.

조선시대엔도읍을적시는물줄기라해서경강(京江)이라고도지칭하기도했으나나중에여러이름들은사라지고한수또는한강(漢江)이라는이름이힘을얻기시작했다.한편,한강은순우리말지명으로서‘한가람’에서비롯된말이라한다.‘한’은‘크다·넓다·길다’는뜻이요,‘가람’은강의옛말이니한강은곧‘크고넓은강’이란뜻이된다.

서울의역사는한강의역사요,한강의역사는나루터에기록되어있다.전국의각종물품과사람들은한강의나루터로모여들었고,그들이가꾼문화는다시전국으로퍼져나갔다.한강의나루터는이렇듯사람의왕래를위한교통로였을뿐만아니라,물자의운반을위한수송로역할에국가의안녕과질서를위한초소로서의기능도갖추고있었다.그래서나라에서는따로관리를파견해한강의나루터를지키게했다.

▲국립서울현충원전경.이곳은국가와민족을위해애쓰다순국한호국영령들이잠들어있는민족의성역이다.
조선시대엔현재한강의서울지역에속하는구간에10여개의나루터가있었다.상류부터광나루·삼밭나루·뚝섬나루·두모포·입석포·한강나루·서빙고나루·동작나루·흑석진·노량진(노들나루)·용산진·마포나루(삼개진)·서강나루·양화나루·공암나루등이다.이중에서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량진·양화나루는한강의5대나루로꼽혔고,2대나루터라하면광나루와노량진을일컬었다.

길은연속성이있다.그래서나루터의전통은지금의한강에걸린다리로도이어졌다.광나루엔광진교·천호대교,삼밭나루엔잠실대교,뚝섬나루엔영동대교,두모포엔동호대교,입석포엔성수대교,한강나루엔한남대교,서빙고나루엔반포대교,동작나루엔동작대교,흑석진엔한강대교,노량진엔한강철교,용산진엔원효대교,마포나루엔마포대교,서강나루엔서강대교,양화나루엔양화대교·성산대교,공암나루엔행주대교가각각세워져있다.

서울남서부대표나루터인노량진(鷺梁津)은일명노도(路渡·露渡),노량도(鷺梁渡)라불리던노들나루다.백로들이많이날아와‘노들’이라고했다는데,민요‘노들강변’에도나오듯이노량진에서부터양화진까지는버드나무가무척많았다고한다.

지금의노량진수원지가자리잡고있는곳이바로노량진나루터가있던지점이다.고산자김정호가1861년에그린서울지도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보물제850호)를보면한강유역까지자세히나와있어당시의사정을짐작할수있다.노량진엔별감이배치되어도성을출입하는사람들을살피게하였고,노량진남쪽언덕엔노량원(鷺梁院)이란여관도있어공무로도성을오가는관리들이쉬어갔다.연산군때엔한강의모든나루터를봉쇄하고이노량진으로만통행하도록하기도했다.

정조가화성으로행차할때처음닦은시흥로(始興路)는조선시대도성에서한강을건넌뒤노량진·시흥·수원을거쳐충청도·전라도로통하는주요간선도로로서그중요성을인정받았다.이곳이한강의대표적인나루터가된까닭은우선숭례문에서가까울뿐만아니라유속도느리고,강폭도좁고,강변양쪽이높아배다리를놓기엔최적의장소였기때문이다.

정조는배로다리를연결한배다리,즉주교(舟橋)로한강을건넜다.1795년정조가배다리를건너는모습을그린‘정조대왕능행도’가운데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僑渡涉圖)를보면한강을건널때정조가쉬어가던노량진행궁도보인다.현재이곳엔1791년에세운용양봉저정이남아있다.정자의이름은‘용이뛰놀고봉이높이난다’는뜻이니왕과관련있음을미루어짐작할수있다.

▲(1)이번서울남서부기행은이른아침에국립서울현충원의현충탑에서묵념을드리는일로시작했다./(2)국립서울현충원에안장된박정희전대통령내외의묘소.현재이곳엔국가원수2위를비롯해임시정부요인,애국지사,국가유공자,무명용사등이안장되어있다./(3)현충탑오른쪽에조성되어있는호국영웅상.

정조는이전엔용선(龍船)이나부교(浮橋)를이용하여강을건넜는데,이것도번거롭기때문에주교를가설하였던것이다.정조는주교에도일가견이있었다.비변사에서올린주교운영방안이미흡하자정조는1790년(정조14)직접설치장소의상황부터강폭,배선정,배의수와높이등기술적인면을비롯해배를동원하는데필요한행정적인방법도제시할정도였다.‘주교지남(舟橋指南)’은바로정조가주교의운영방안에대해저술한책이다.


어쨌든정조이후노량진은한강의으뜸나루터로거듭났다.남부지방과서울을오가는대부분의물류는거의이곳을지나갔다.즉노량진을지나야비로소서울을벗어난것이요,노량진을건너야지비로소서울에들어선것이다.1899년에한국최초의철도인경인선이이곳노량진에서제물포(지금의인천)까지개통된것도그런까닭일것이다.당시노량진은도진취락의기능이한층강화되었으나,1900년한강철교가세워지고1917년에한강인도교가건설되면서점차그명성을잃고말았다.

나루터와한강의느낌을조금이나마이해하려면한강대교를건너야하는데,승용차가아니라반드시걸어야한다.6·25전쟁때후퇴하는국군이폭파하는바람에수백명의사상자를냈고,서민들‘자살다리’로도오명을갖고있는한강대교.이길손이지방에서올라와서울에자리잡고살면서제일먼저걸어서건넜던다리도이한강대교였다.

▲6·25전쟁때후퇴하는국군이폭파하는바람에수백명의사상자를냈고,‘자살다리’라는오명도갖고있는한강대교.

이한강대교가걸려있는노들섬(중지도)은하중도(河中島)다.강가운데떠있는섬하중도는상류로부터떠내려온토사가쌓여서이루어지기도하고,물길이바뀌면서섬이되는경우도있다.과거한강엔팔당하류만해도양수리하중도,당정·미사하중도,토평·석도하중도,잠실하중도,뚝섬,신사·반포하중도,여의도,난지도,능곡하중도,신평·노고하중도등수많은하중도가있었다.

노들섬이모래밭에서섬으로바뀐것은일제강점기에들어서였다.1917년일제는한강북단의이촌동과남단노량진을잇는한강인도교를건설하면서다리가지나는모래밭에흙을돋워다리높이로쌓아올리고중지도라고이름붙였다.1930년대엔노들섬까지전찻길이놓여한강인도교역도생겼다.그래도1950~60년대까지만해도사람들은섬동쪽의고운모래밭을‘한강백사장’이라부르며여름엔피서지로,겨울엔스케이트장으로이용하며즐겼다.

▲한강을한바퀴둘러볼수있는한강유람선.하지만어찌조선시대의황포돛배의흥취에비기겠는가.

하지만,1968년시작된한강개발계획으로이노들섬은아름다움을상실하게된다.한강북단이촌동연안을따라한강제방도로,즉지금의강변북로를건설할때한강을따라나있던경원선바깥쪽에새로운둑을쌓으면서한강백사장에서퍼온모래를사용한것이다.동부이촌동과서부이촌동의땅일부도이때한강백사장에서퍼온모래를메워얻은것이다.그러다1973년노들섬확장매립공사를할때한강백사장모래를사용하면서한강백사장은완전히사라졌고,그자리로강물이흘러가면서지금의노들섬이태어난것이다.

결국고운모래가넓게펼쳐졌던모래밭이었던노들섬은한강의상처를안고탄생한섬임을알수있는데,최근서울시에서는여기에오페라하우스를지을예정이라밝혔다.그다지나쁜생각같지는않지만,이왕이면그옛날인파가한강백사장을메웠듯이모래밭복원등을통해한강을본래의자연형하천과가깝게만든뒤좀더다양하고많은사람들이즐길수있는공간으로만들면어떨까.

이왕에하중도이야기가나왔으니한강물줄기를따라가며하중도에대해살펴보자.한강하중도가운데맏형인여의도는잉화도(仍火島)·나의주(羅衣洲)·나의도(羅衣島)등다른이름도많았다.조선시대엔이곳에목장이있어관원을파견해목축을감독하였으며,궁중이나나라제사에필요한제물도제공하였다.김정호의경조오부도엔특별히‘백사주이십리(白沙周二十里)’라씌어있으니여의도엔고운모래가얼마나많았을까.그러나갈매기한가롭게노닐던모래밭은일제강점기인1916년비행장이만들어지면서아름다움을조금씩잃기시작했다.

▲서울에서거래되는전체수산물중에서약50%를차지하고있는노량진수산시장.(왼쪽)/노량진수산시장의한상인이손님을기다리며수산물을손질하고있다.이곳에선새벽엔경매구경을하고,저녁엔싱싱한회를맛볼수있다.(오른쪽)

그래도여의도비행장은당시한강인도교와마찬가지로서울의명물이었던가보다.1920년이탈리아비행기가동경으로가던길에여의도에착륙함으로써당시시민들의커다란구경거리가되었고,1922년엔우리나라최초의비행사안창남이고국방문비행으로여의도비행장에서시범비행을보이자인산인해를이룬시민들이환호했다고한다.여의도비행장은1958년김포공항으로국제공항이이전하자공군기지로사용되다가1971년폐쇄되었다.

여의도가지금처럼변화하게된가장큰원인은역시1968년의한강개발계획이다.이때여의도둘레에높이16m,폭21m,연장7km의제방,즉윤중제를쌓으면서옛모습을완전히잃고말았다.개발의어두운그림자인가.아니면안목이없는천박한개발만능주의인가.한강의하중도중에아름답기로이름높았던밤섬(栗島)도이때훼손되었다.윤중제를쌓은뒤땅을돋우는데필요한돌과흙을구하기위해이섬을폭파했기때문이다.이후여의도엔국회의사당을비롯하여언론기관·금융기관·증권거래소·사무실용빌딩등이잇달아건설되어서울의새로운중심지로자리잡았다.지금은현대적인수상도시로이름이높다.

▲한강대교가걸려있는노들섬은원래넓은모래밭이었으나1917년한강인도교건설당시흙을돋우면서섬이되었다.(왼쪽)/한강남쪽언덕을따라이어진올림픽대로.서울동서의교통을편리하게해주었지만사람과강을단절시켰다는지적도받고있다.(오른쪽)

하지만밤섬을파괴한일은정말아쉽다.<서울명소고적>엔‘맑은모래가연달아펼쳐져한강과묘하게서로어울려풍치가빼어났다’고밤섬의아름다움을기록하고있다.밤섬상류쪽으로넓게펼쳐진흰모래밭은율도명사(栗島明沙)라하여일찍이마포팔경의하나에속했다.김홍도와함께조선중기의대표적인화가인심사정(沈師正·1707-1769)이그린밤섬이란산수화로나마그아름다움을짐작해본다.

밤섬의작고나지막한언덕엔민가10여채가옹기종기모여있었고,주변으로는널찍한모래밭이펼쳐져있었다.물론곳곳에버드나무가그늘을드리워제법풍치가좋았다.조선시대엔이곳에뽕나무와약초따위를심었고,양이나염소를놓아기르기도했다.주민들은주로고기잡이나나룻배운영으로생활하였다.바다도아닌강이만든섬에사람들이사는모습은한폭의그림이었을것이다.

▲(1)동작구노량진로에있는사육신묘.예로부터알려진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외에1977년김문기의가묘도추봉하면서모두7명이되었다./(2)사육신묘비는관직명이나호를새기지않고모두성씨지묘,하씨지묘,성씨지묘등성만나타내는간단한형식으로되어있다./(3)사육신묘뒤쪽언덕에있는폐묘.민간에선성삼문의아버지로서복위운동에적극가담했던성승의묘로추정하고있다.

이런풍경은광복후에도이어져여름철백사장엔피서인파가넘쳤고,봄가을엔강물에배를띄우거나언덕위에올라강변풍치를즐겼다.그러나1968년윤중제공사당시이곳주민들을창천동으로이주시키고폭파하면서돌이킬수없는지경이된것이다.지금은서강대교가밤섬위를지나는데,섬의뿌리는남아있었는지다행스럽게도이후이곳에다시모래섬이형성되기시작했고,최근엔식생이복원되어각종철새들이찾아들고있다.하지만한번잃어버린풍광은어찌되찾을수있을까.

여의도하류쪽에있는선유도(仙遊島)역시비슷한풍파를겪었다.이섬은지금은하중도이지만이역시조선시대까지만해도한강변에솟은선유봉(仙遊峯)이란아름다운언덕이었다.조선시대진경산수화의대가겸재정선(鄭敾·1676-1759)이그린양천팔경첩중‘선유봉’을보면과연신선이노니는곳이라는이름이헛되지않을정도의절경이다.하지만이선유봉역시일제강점기때홍수를막고길을포장하기위해암석을채취하면서깎여나갔다.선유봉은폭파되었고,고운모래도파헤쳐져지금처럼보잘것없는평평한섬이되어버렸다.

이후선유도는1978년부터2000년까지서울남서부지역에수돗물을공급하는정수장으로사용되었다.2000년폐쇄된뒤다행스럽게도정수장을재활용해물을테마로한생태공원으로만들어지금은서울시민들에게사랑받는도심의생태테마공원으로탈바꿈했다.하지만이역시어찌옛선유봉의아름다움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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