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역사는나루터에남아있네!”
‘여긴민족의얼이서린곳조국과함께영원히가는이들해와달이이언덕을보호하리라’동작동에있는국립서울현충원.이곳은국가와민족을위해애쓰시다가돌아가신호국영령들이잠들어있는민족의성역이다.추운겨울이물러난이른봄날,해뜰무렵에누구보다먼저현충탑에향사르고묵념을올리니마음은한없이경건해진다.
국립현충원이서울의하고많은자리중에하필한강이내려다보이는동작동언덕에자리잡는이유는여러가지가있겠지만,길손은아마도한강이서울의중심이요,대한민국의상징이기때문이아닐까짐작해본다.
한강의지명을살펴보면,한사군과삼국시대초기엔대수(帶水)라했다.한반도의중간허리부분을띠처럼둘렀다는뜻이다.고구려광개토대왕비엔아리수(阿利水),백제는한수(漢水)또는욱리하(郁利河),신라는상류를이하(泥河),하류를왕봉하(王逢河)라고했다.한편,삼국사기신라편지리지엔한강을한산하(漢山河)또는북독(北瀆)이라고도했다.고려는큰물줄기가맑고밝게뻗어내리는긴강이란뜻으로열수(列水)라고불렀다.또모래가많은일부지역을사평도(沙平渡),또는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했다.
조선시대엔도읍을적시는물줄기라해서경강(京江)이라고도지칭하기도했으나나중에여러이름들은사라지고한수또는한강(漢江)이라는이름이힘을얻기시작했다.한편,한강은순우리말지명으로서‘한가람’에서비롯된말이라한다.‘한’은‘크다·넓다·길다’는뜻이요,‘가람’은강의옛말이니한강은곧‘크고넓은강’이란뜻이된다.
길은연속성이있다.그래서나루터의전통은지금의한강에걸린다리로도이어졌다.광나루엔광진교·천호대교,삼밭나루엔잠실대교,뚝섬나루엔영동대교,두모포엔동호대교,입석포엔성수대교,한강나루엔한남대교,서빙고나루엔반포대교,동작나루엔동작대교,흑석진엔한강대교,노량진엔한강철교,용산진엔원효대교,마포나루엔마포대교,서강나루엔서강대교,양화나루엔양화대교·성산대교,공암나루엔행주대교가각각세워져있다.
서울남서부대표나루터인노량진(鷺梁津)은일명노도(路渡·露渡),노량도(鷺梁渡)라불리던노들나루다.백로들이많이날아와‘노들’이라고했다는데,민요‘노들강변’에도나오듯이노량진에서부터양화진까지는버드나무가무척많았다고한다.
지금의노량진수원지가자리잡고있는곳이바로노량진나루터가있던지점이다.고산자김정호가1861년에그린서울지도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보물제850호)를보면한강유역까지자세히나와있어당시의사정을짐작할수있다.노량진엔별감이배치되어도성을출입하는사람들을살피게하였고,노량진남쪽언덕엔노량원(鷺梁院)이란여관도있어공무로도성을오가는관리들이쉬어갔다.연산군때엔한강의모든나루터를봉쇄하고이노량진으로만통행하도록하기도했다.
정조는배로다리를연결한배다리,즉주교(舟橋)로한강을건넜다.1795년정조가배다리를건너는모습을그린‘정조대왕능행도’가운데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僑渡涉圖)를보면한강을건널때정조가쉬어가던노량진행궁도보인다.현재이곳엔1791년에세운용양봉저정이남아있다.정자의이름은‘용이뛰놀고봉이높이난다’는뜻이니왕과관련있음을미루어짐작할수있다.
어쨌든정조이후노량진은한강의으뜸나루터로거듭났다.남부지방과서울을오가는대부분의물류는거의이곳을지나갔다.즉노량진을지나야비로소서울을벗어난것이요,노량진을건너야지비로소서울에들어선것이다.1899년에한국최초의철도인경인선이이곳노량진에서제물포(지금의인천)까지개통된것도그런까닭일것이다.당시노량진은도진취락의기능이한층강화되었으나,1900년한강철교가세워지고1917년에한강인도교가건설되면서점차그명성을잃고말았다.
나루터와한강의느낌을조금이나마이해하려면한강대교를건너야하는데,승용차가아니라반드시걸어야한다.6·25전쟁때후퇴하는국군이폭파하는바람에수백명의사상자를냈고,서민들‘자살다리’로도오명을갖고있는한강대교.이길손이지방에서올라와서울에자리잡고살면서제일먼저걸어서건넜던다리도이한강대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