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4남서부
하지만서울을찾는외국인관광객수는아시아유명도시중에서가장낮다고한다.그이유는무엇일까.여러원인이있겠지만,아마도가장큰이유는한강을제대로활용하지못했기때문일것이다.한강과그주변이가장큰관광자원임에도일제강점기이후지금까지개발이라는미명아래한강을훼손하는데만몰두하지않았나하는반성을해본다.개발을향해불도저처럼밀어붙이는것만능사가아니다.넓고깨끗했던한강백사장,민가10여채가정겹게자리하던밤섬,한강의가장큰모래섬여의도,아름다운언덕이었던선유봉을비롯해한강주변의경관을잘보존하였다면‘아시아유명도시중관광객꼴찌’라는치욕을당하지는않았을것이다.
서울시가진정으로지금의한강을‘즐겨찾는한강,가까운한강,살아숨쉬는한강,내일을여는한강’으로가꾸고자한다면,이제라도콘크리트중심의개발에서벗어나한강의생태환경을회복하는게우선이다.단언컨대,한강이예전모습의일부라도되찾는다면분명서울의명예를회복할수있을것이다.
그살벌하던시대로돌아가보자.1453년(단종1)단종의숙부인수양대군이계유정난을일으켜단종을몰아내자,1456년집현전학자들을중심으로단종복위를꾸몄다.하지만같은동지이며집현전출신인김질등은뒷일이두려워세조에게이사실을밀고하였고세조는연루자를모두잡아들여스스로이들을문초했다.
당시성삼문은시뻘겋게달군쇠로다리를꿰고팔을잘라내는잔학한고문에도굴하지않았을뿐아니라,세조를‘전하’라하지않고대군을칭하는‘나리’라불러왕으로대우하지않았다는이야기는유명하다.성삼문·박팽년·김문기·이개는작형(단근질)으로처형당하였고,하위지는칼로목을베어죽이는참형을당하였으며,유성원은자기집에서아내와함께자살하였다.
이때목숨을잃은이는사육신을비롯해모두70여명에이른다.이중에서6명을흔히사육신(死六臣)이라하는데,이말은생육신의한사람인남효온이쓴추강집(秋江集)에처음나타난다.이책의육신전에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순서로기록하고있는것을근거로삼은것이다.
그런데,김문기도사육신의1명이라는의견이있자,1977년국사편찬위원회에서사육신문제를밝히기위해특별위원회를구성하여논의한끝에‘김문기를사육신의한사람으로현창하는것이마땅하다’는결의를만장일치로채택하여김문기의가묘도함께만들었다.단종복위운동당시공조판서겸3군도진무에있었던그는모의가발각되자고문에굴복하지않다가이개등과함께처형된인물.하여실제로는사칠신(死七臣)인셈이지만,숫자를떠나사육신이란단어는우리민족에겐목숨까지초월한영원한의리의상징으로쓰이고있다.
원래조선시대엔이곳에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4분의묘만있었다.그러다서울시에서1977년묘역정화공사를할때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가묘도함께만들었다.또묘역뒤쪽언덕엔문인석이반쯤땅에묻힌채돌아앉아있는폐묘가있는데,이는성삼문의아버지로서복위운동에적극가담했던성승의묘로추정하고있다.
당시주동자의가족중여자들은세조편에섰던정인지·한명회·신숙주등64명에이르는공신들의노비로끌려갔다.동지들을밀고한김질도옛동지들의가족을노비로하사받았다.조선왕조실록에실린관련기록을들추다보면가슴이서늘해진다.
“의금부에일러난신에연좌된부녀를대신들에게나누어주게하였다.의금부에전지하기를,난신에연좌된부녀중에…박팽년의아내옥금,김승규의아내내은비·딸내은금·첩의딸한금은영의정정인지에게주고…최면의누이선비,조완규의아내소사·딸요문은병조판서신숙주에게주고…유성원의아내미치·딸백대,이명민의아내맹비는좌승지한명회에게주고…민보흥의아내석비,이윤원의아내대비는판군기감사김질에게주고…”
사육신묘에서나와조금떨어진동작구상도동의양녕대군묘를찾아잘가꿔진묘역을둘러보다문득사육신과관련해양녕대군에게서운하다는생각을갖는다.왕실종친의수장격인양녕대군은계유정난당시수양대군편에섰고,나중에금성대군이단종복위운동을일으키다발각되자그를처벌하는데도동의했기때문이다.
기존의교통로외에서울~시흥~안양을거치는시흥로는단지정조자신의원행뿐만이아니라화성신도시를중심으로삼남지방과보다수월하게연결하려는의도였다.그래서정조는이시흥로를닦는일이백성들을이롭게하는일이라생각했지만우여곡절을겪는다.당시경기관찰사였던서용보가한강일대7읍의백성들에게관청곡식을시가의두배에가까운비용으로팔면서“임금님이화성으로내려가는시흥로를만드는데사용하기위해서”라고거짓말을했기때문이다.백성들의원망이높아지자경기암행어사로파견된정약용이이문제를수습했다.지금뚫린왕복10차선시흥대로의시작이었고,대한민국1번국도도이길로이어져있다.
우리나라산업화의명암을간직하고있는구로공단을둘러본뒤,한때오염과악취의대명사였으나최근몇년간부단한노력으로깨끗함을되찾아가고있는안양천을건너면양천구와강서구가손짓한다.
이렇게논과건물사이를오락가락하다올림픽대로를타고한강따라흘러내려가다보면한인물을만나게된다.바로동양의학을집대성한동의보감의저자허준(許浚·1539-1615)이다.허준은지금의강서구등촌동능안마을에서태어났는데,이지역은대대로양천허씨의세거지였다.
영등포공고정문앞에있는공암(孔岩)이라는바위는양천허씨의시조인허선문이태어났다는설화가전해허가바위라고도한다.이바위엔가로6m,세로2m,길이5m로서성인10명이상이들어갈수있는동굴이뚫려있다.겸재정선의‘공암층탑’이란그림으로옛모습을살펴볼수있는공암은한강의모래밭에있어돋보였으나역시주변에건물들이들어서면서옛모습을잃고말았다.
양천의진산인궁산(宮山·75.8m)은정선이그림소재를위해즐겨찾았던곳이다.산이라하기엔낮은봉우리에불과하지만강가에솟은덕에조망은으뜸이다.서울시에남아있는유일한향교인양천향교에서정선의흔적을살펴보고10분쯤오르면소악루가반긴다.궁산정상은서울시가우수조망명소로지정할만큼풍치가뛰어나다.이누각에서는유장히흐르는한강가에선유도가보이고,그너머로안산·인왕산·남산·관악산,그리고삼각산등이한눈에들어온다.곳곳엔겸재정선의그림사본도걸려있으니옛풍치와지금의풍치도비교할수있다.
늦봄이니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웅어회라.
복사꽃가득떠내려오면
어망을행호밖에서잃겠구나.
당시의풍광이눈앞에선하다.하지만이젠이런풍광을볼수없게되었으니이는어쩌면우리가한강개발이란이름아래잃어버린현주소가아닐까.
검붉은바위로이루어진관악산은그꼭대기가마치큰바위기둥을세워놓은것같아갓모습의산이란뜻의순우리말로‘갓뫼’라하고,한자로는‘관악(冠岳)’이라고했다.이는주위산들중에서으뜸간다는뜻도담겨있다.주봉은연주대(戀主臺)다.
전통풍수에서는관악산을불의기운인화산(火山)으로보고있다.그래서이산이정면으로보이는서울에화재가잘난다고믿어그불을누른다는상징적의미로산꼭대기에못을파고경복궁의정문인광화문옆양쪽에불을막는다는상상의동물인해태를만들어놓기도했다고한다.철쭉꽃이피는4~5월에관악산철쭉제도열린다.
관악산은서울시민들의당일치기산행코스로사랑받고있기때문에늘많은인파가몰려코스가다양하게나있다.관악산횡단코스인서울대정문옆만남의광장에서제4야영장을거쳐연주대에올라선다음과천향교로내려서는코스는가장기본적이면서도최고의인기를누리고있다.이외에도대중교통의접근성에따라신림동기점,과천기점,시흥동기점,안양유원지기점등으로나눌수있다.
○관악산횡단코스=만남의광장→제4야영장갈림길→연주암→연주대→연주암→과천향교<3시간30분소요>
○서울대원점회귀코스=만남의광장→무너미고개→연주대→깔닥고개→제4야영장→만남의광장<3시간30분소요>
○서울대~사당동코스=만남의광장→제4야영장갈림길→연주암→연주대→관음사→사당전철역<4시간30분소요>
○과천원점회귀코스=과천향교→계곡길→연주암→연주대→능선길→과천향교<3시간소요>
○남북능선종주코스=사당전철역→관음사→북릉→559m봉→연주대→남릉→불성사→안양시관양동<5시간30분소요>
○관악산~삼성산연결종주코스=관음사→북릉→연주대→서릉→무너미고개→삼막사→국기봉→만남의광장<6~7시간소요><지도=특별부록지도참조>
동작구동작동에위치한국립서울현충원은국가와민족을위해순국한호국영령들이잠들어있는민족의성역이다.국군을창설한이래전사자들을서울장충단공원내에있는장충사에서모셔왔는데,6·25전쟁후전사자수가증가하자1955년국군묘지로창설해전사또는순직군인과군무원및종군자의영현을안장했다.
동작구상도동에있는지덕사부묘소(시유형문화재제11호)는조선태종의장남인양녕대군(1394-1462)의사당과묘다.양녕대군의사당인지덕사(至德祠)는원래서울역앞남묘부근에있었는데,일제강점기인1912년에관악산줄기의국사봉밑에있는대군의묘소앞으로옮겨왔다.이곳에는사당,서고,제기고등3동의건물이있고,사당후면에묘소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