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 *-

[한국의명가명택]경주최부잣집이야기


경주최부잣집9대진사12대만석꾼배출한재력가


과거를보되진사이상은하지말라.재산은만석이상은모으지말라.과객(過客)을후하게대접하라.사방백리안에굶어죽는사람이없게하라.경주최부잣집에내려오는200년전통의가훈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부자가3대를넘기기힘들다)란말이있다.최근들어우르르무너지는재벌들을보면서이말을다시한번생각해보게된다.100년은유지될줄알았던한국의재벌들이허망하게넘어지는광경을목격하면서부자가3대를넘긴다는것이결코쉬운일이아니라는세간사(世間事)의이치를절절히느끼는것이다.게다가요즘의부는이루는것도빠르지만망하는것도신속하다.‘졸부(猝富)는졸망(猝亡)’이라는말이허언은아닌듯싶다.


과연3000리를내려가는백두대간의유장한산줄기처럼3대를훌쩍뛰어넘어오래가는부자가한국에는없단말인가!수십,수백억원을삽시간에벌어당당한사업가행세를하던이들이어느날갑자기사기꾼으로전락하는것을보면서나는경주최(崔)부잣집을생각하게된다.최부잣집은유장한부자,즉졸부가아닌명부(名富)의면모를생생하게보여주는집안이다.9대동안진사를지내고12대동안연이어만석을한집으로조선팔도에그이름이널리알려진집이다.이기록은앞으로도좀처럼깨기어려운전무후무한기록일성싶다.


3대부자도어려운데어떻게12대를이어갈수있었을까.그렇게대를이어갈수있었다면반드시집안나름의경륜과철학이있었을것이다.그런의문을품고경주행기차에몸을실었다.늦은오후,경주교동(校洞)69번지에주소를둔최부잣집에도착했다.신라천년의수도였던경주에서도교동69번지는특별한장소다.원래이터는신라의요석공주가살던요석궁이자리하고있었다고전해진다.

집오른쪽옆으로는신라신문왕2년부터자리잡은계림향교(鷄林鄕校)가있고,뒤편으로는신라시조인박혁거세의탄생설화가어려있는계림(鷄林)이자리잡고있다.또왼쪽뒤편으로는내물왕무덤을비롯한5개의커다란봉분이작은동산처럼누워있고,거기서좀더왼쪽으로는김유신장군이살던재매정(財買井)이있다.이렇게최부잣집은주위가온통신라신화와역사의자취로둘러싸여있다.그래서집터자체가박물관분위기를풍기는듯하다.


최부잣집의가훈

최부잣집에서는대대로가훈처럼지켜내려온몇가지원칙이있다.첫째,과거를보되진사이상은하지말라.둘째,재산은만석이상모으지말라.셋째,과객(過客)을후하게대접하라.넷째,흉년에는남의논밭을매입하지말라.다섯째,최씨가문며느리들은시집온후3년동안무명옷을입어라.여섯째,사방백리안에굶어죽는사람이없게하라.이를차근차근곱씹어보면최부잣집의향기가배어있다.


‘첫째,진사(進士)이상은하지말라’는것은한마디로정쟁(政爭)에휘말리지않기위해서다.조선시대진사라는신분은초시(初試)합격자를가리키는데,벼슬이라기보다는양반신분을유지하기위한최소한의자격요건에해당한다.쉽게말하면‘양반신분증’이고나할까.

최씨집안은진사는유지해도그이상을넘어서는벼슬은꺼렸다.벼슬이높아질수록감옥이가까워진다는영국속담처럼,조선시대는벼슬이높아질수록자의반타의반으로당쟁에휩쓸리기쉬웠다.한번당쟁에걸려들어역적으로지목되면남자는사약을받거나아니면유배형을당했고,그집안여자들은졸지에남의집종신세로전락할수밖에없었다.이른바멸문지화(滅門之禍)를당하는것이다.아마도최씨집안에서는진사이상의벼슬을한다는것은멸문지화에접근하는모험으로여겼던것같다.


최부잣집의둘째원칙은‘만석이상을모으지말라’다.만석은쌀1만가마니에해당하는재산이다.돈이라는것은한번모이면가속도가붙는‘이상한’성질을지니고있다.그런데최부잣집은만석이상의재산불가원칙에따라나머지재산은사회에환원하였다.환원방식은소작료를낮추는방법이었다.당시의소작료는대체로수확량의7∼8할을받는것이관례였다.최부잣집은남들같이소작인들로부터7∼8할을받으면재산이만석을초과하는문제가발생하므로그소작료를낮추어야만했다.

예를들면5할이나그이하로도받았다.이정도면거의공짜나다름없는수준이다.그러니주변소작인들은앞을다투어최부잣집의논이늘어나기를원하는현상이발생하였다.최부잣집의논이늘어나면늘어날수록자기들은혜택을보게되니까말이다.저집이죽어야내집이사는것이아니라,저집이살아야내집도좋아진다는상생(相生)의현장이구현된것이다.사촌이논사면내배아프다는속담과는전혀다른,진정으로아름답고통쾌한풍경이라아니할수없다.


또둘째와같은맥락의가훈이넷째‘흉년에논사지말라’다.조선시대에는흉년이들어아사직전의위기상황에직면하면쌀한말에논한마지기를넘기기도하였다.우선먹어야목숨을부지할수있으니논값을제대로따질겨를이없었던것이다.심지어흰죽한끼얻어먹고논을내놓았다고해서‘흰죽논’이란말도있었다


과객을후하게대접하라


쌀을많이가지고있던부자들로서는이때야말로논을헐값으로사들여재산을늘릴수있는절호의기회였다.이는네가죽어야내가산다는상극(相剋)의방정식이다.그러나최부잣집은이것을금했다.이는양반이할처신이아니요,가진사람이해서는안될행동으로보았던것이다.뿐만아니라부자가흉년에논사면나중에원한을사게되는것은뻔한이치다.헐값에논을넘겨야만했던사람들의가슴에맺힌원한을어떻게감당할것인가.두수앞만내다보면그원한이부메랑이되어되돌아올것은불문가지다.최씨가문은도덕성과아울러고준한지혜를가졌던듯하다.


최씨집안의셋째원칙은‘과객(過客)을후하게대접하라’는것이다.조선시대는삼강오륜과예를강조하다보니사회분위기가자칫경직될수있었다.그경직성을부분적이나마해소해주는,융통성있는사회시스템이바로과객을대접하는풍습이아니었나싶다.요즘같이여관이나호텔이많지않았던사회에서는여행을하는나그네가전혀알지도못하는양반집이나부잣집의사랑채에서며칠씩또는몇달씩머물다가는일이흔했다.


이들과객들의성분은다양하였다.몰락한잔반(殘班)으로이고을저고을의사랑채를전전하며무위도식하는고급룸펜이있는가하면,학덕이높은선비나시를잘짓는풍류객이있고,무술에뛰어난협객도있었다.그런가하면풍수와역학에밝은술객들도있어서주인집사람들의사주와관상을보아주기도하고,‘정감록’이란참서로세상의변화를예측하기도하였을것이다.주인양반은온갖종류의과객을접촉하면서새로운정보를수집하고,다른지역의민심을파악했다.

교통이발달하지못해여행이어려웠던조선시대에이들과객집단은다른지역의정보를전해주는메신저노릇을하였으며여론을조성하기도하였다.최부잣집에서는이들과객을후하게대접하였다.어느정도였는가를보자.최부잣집의1년소작수입은쌀3천석정도.이가운데1천석은집안에서쓰고,1천석은과객을접대하는데사용하였고,나머지1천석은주변지역의어려운사람들을도와주는데썼다고한다.1년에1천석을과객접대용으로썼다고하니당시의경제규모로환산해보면엄청난액수가아닐수없다.


최부잣집에서는과객을접대하는데나름의규칙이있었다.과객중에상객(上客)이라고여겨지는사람에게는매끼‘과매기’1마리를제공하고,중객(中客)에게는반마리,하객(下客)에게는4분의1마리를제공하였다.과매기는전라도나충청도에는없는경상도특유의음식으로포항,울산지역에서나는마른청어를가리킨다.현재는마른청어대신에마른꽁치를과매기라고부르는데,주로날씨가추운겨울에제맛이난다.


최부잣집에과객이많이머무를때는그수가100명이넘었다고한다.100명까지는큰사랑채와작은사랑채에서수용할수있지만,그이상을넘어설때는최부잣집주변에있는초가집(노비들이사는집)으로과객들을분산수용하였다고한다.부득이노비집으로과객을분산해야할때에는,반드시그과객에게끼니를해결할수있도록과매기1마리와쌀을주어서보냈다.


과객이최부잣집에서쌀과과매기를가지고주변의노비집으로가면,그노비집에서는무조건밥을해주고잠자리를제공하도록룰이정해져있었다.과객들을접대하는대가로노비들은소작료를면제받았다.최부잣집에서50∼60리멀리떨어져사는노비들은소작료를제대로내야했지만,인근의노비들은과객대접한다는공로로혜택을받았던것이다.

100리안에굶는이없게하라


밤을지내고떠나는나그네는빈손으로보내지않았다.과매기한손(2마리)과하루분양식,그리고노자를몇푼쥐어보냈다.어떤과객에게는옷까지새로입혀서보낼정도였다고한다.최부잣집이과객대접에후하다는소문은시간이지나면서입소문을타고조선팔도로퍼졌다.강원도전라도는물론이북지역에까지최부잣집의명성이퍼졌다고한다.


이는결국최부잣집의덕망으로연결되었다.중국에3천식객을거느렸다고하는맹상군이있었다면,조선에는1년에1천석의쌀을과객에게대접하는최부자가있었던셈이다.최부잣집의덕망은여섯째원칙인‘사방100리안에굶어죽는사람이없게하라’는데서도나타난다.경주교동에서사방100리라고하면동으로는경주동해안일대에서서로는영천까지고,남쪽으로는울산까지,북으로는포항까지의영역이다.


주변이굶어죽고있는상황인데나혼자만석하는것은의미가없으며,부자양반의도리가아니라고생각했던것이다.소작수입가운데1천석을주변빈민구제에사용한것도이런차원이다.불교의‘유마경’에유마거사가병석에누워있으면서했다는유명한말이있다.

“중생이모두아픈데내가어찌안아플수있겠느냐!”


다섯째원칙은‘최씨가문며느리들은시집온후3년동안무명옷을입어라’다.조선시대창고의열쇠는남자가아니라안방마님이가지고있었다.재산관리의상당권한을여자가지니고있었음을뜻한다.그런만큼실제집안살림을담당하는여자들의절약정신이중요하다.보릿고개때는집안식구들도쌀밥을먹지못하게했고,숟가락도은수저는절대사용하지못하게하여백동숟가락의태극무늬부분에만은을박아썼다.과객대접에는후했지만집안살림에는후하지않았던것이다.


최씨집안의어느며느리는삼베치마를하도오래입어이곳저곳이누덕누덕기워져있었는데,서말의물이들어가는‘서말치솥’에빨래를하기위해이치마하나만집어넣으면솥이꽉찰정도였다고전해진다.너무많이기워입는바람에물에옷을집어넣으면옷이불어나서솥단지가꽉찼다는말이다.최부잣집여자들의절약정신을상징적으로드러내는일화다.이상여섯가지원칙이최부잣집의제가(齊家)하는철학이라면,육연(六然)이라고하는수신(修身)의가훈도있었다.육연은다음과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초연하게지내고▲대인애연(對人靄然):남에게는온화하게대하며▲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없을때는맑게지내며▲유사감연(有事敢然):유사시에는용감하게대처하고▲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얻었을때는담담하게행동하며▲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빠졌을때는태연하게행동하라.여기서‘연’의사전적의미는‘그러하다’‘그렇다고여기다’인만큼전체적으로관용,긍정,초연의뜻이담겨있다.


최부잣집의장손인최염씨(崔炎,68)는어렸을때부터매일아침조부방에문안을가면조부님이보는데서붓글씨로육연을반드시써야만했다고술회한다.어려서부터군자다운행동을하도록철저히교육받았던것이다.


노블리스오블리제


최부잣집의가훈을음미하면서나는로마천년의철학이생각난다.시오노나나미의‘로마인이야기’를보면,로마가천년을지탱하도록받쳐준철학이바로‘노블리스오블리제’였다는것이다.이를번역하면‘혜택받은자들의책임’또는‘특권계층의솔선수범’이다.로마의귀족들은전쟁이일어나면자기들이솔선수범하여최전선에나가피를흘리는가하면공중을위해금쪽같은자기재산을사회에환원하곤하였다.귀족은사회에책임을져야한다는생각이강했던것이다.여기서로마를이끌어가는리더십이나왔다.


시오노가‘로마인이야기’전체를통하여몇번이고강조한대목은바로노블리스오블리제다.이것은가진자가못가진자에게베풀어야한다는도덕적의무만뜻하는것은아니다.노블리스오블리제는그것을행하는사람자신을위한것이며,그들의삶의질을더높이고삶의의미를찾기위한것이라는게시오노의주장이다.여기서도덕적의무를통해자신들의삶의질을높였다는대목이중요하다.최부잣집의원칙들이내포하고있는의미는도덕적실천에서끝나는게아니라,그것을통해자신들이이세상에태어난의미와보람을증가시키는방법이었던것이다.삶의질은의미와보람에달려있는것아니던가.


한국사람들은이를‘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좋은일을많이한집에반드시경사가있다)’이라하였다.이는요즘의민법이나형법보다훨씬강력한윤리적기제였으며동시에사회를건강하고아름답게이끄는철학이었다.최부잣집의원칙들은바로한국적인노블리스오블리제인것이다.


어떻게보면최부잣집의고향인경주와로마는유사하다.사실세계역사에서1000년수명을유지한나라는신라와로마제국을빼면없다.물론그규모와영향력면에서신라와는비교대상이될수없을정도로로마가월등하지만,그유지된시간만놓고볼때는신라와로마는천년제국이라는점에서대등하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그런데역사가오래되었다는것이대체무슨의미가있는가하는물음을던질수있을것이다.이에대해나는철학과경륜은그세계의체험내지경험의두께에서나오는것이라고말하고싶다.경륜은책상위에서습득한건조한지식에서나오기보다는치열한실전체험에서나온다.체험이빈약하면철학도빈약하다.그래서두터운역사와전통은큰나무의깊은뿌리가된다.


그래서천년고도경주에서9대진사와12대만석꾼을낸명가(名家)가지켜온가훈이우연히나온것이아니고,천년제국로마에서노블리스오블리제가나온것도필연인것같다.육연(六然)만해도그렇다.프랑스에서오래살다돌아온홍세화씨가자주하는이야기중하나가‘톨레랑스(tolerance)’다.‘관용’또는‘용인’으로번역되는톨레랑스는프랑스정신이라고할만큼프랑스인들에게체질화되어있다고한다.톨레랑스는남의생각과행동이나와다를수있음을인정하는태도다.


19세기까지프랑스파리가세계의수도노릇을할수있었던배경에는온갖다양성을넉넉하게수용할줄아는톨레랑스정신이있었기때문이다.프랑스사회가언뜻볼때는혼란스러워보이지만난잡으로흐르지않고세련된문화를가꾸어나갈수있는원동력은톨레랑스라는것이다.나는톨레랑스를홍세화씨의책‘나는파리의택시운전사’에서배웠는데,최부잣집의액자에걸려있는육연을보면서조선선비의톨레랑스를느꼈다.


이를종합하면최부잣집의수신(修身)은프랑스의톨레랑스요,제가(齊家)는로마의노블리스오블리제였다는결론이나온다.재물과벼슬에대한끝없는욕망에사로잡혀사는것이인간일진대,보통인간이이욕망을제어하고절제하면서사는것은쉬운일이아니다.삶의본질에대한깊은통찰력이없으면거의불가능한일이다.삶에대한통찰력에서지혜가나오고이지혜를후손에게전승하기위한제도적장치가종교의계율로나타나는데,그계율가운데하나가바로최부잣집정신인것이다.


해동성자설총을낳은터


지금부터는본격적으로최부잣집의집터를살펴보기로하자.앞에서언급했듯이집터는요석공주가살던곳이었다.최부잣집이이곳에자리잡은시기는대략200년전.그러니까현재장손인최염씨의7대조가되는최언경(崔彦璥,1743~1804)대의일이다.그전에는경주시내남면의‘게무덤’이라불리는곳에서살았다고한다.이곳은형산강상류쪽인데양쪽에서물이흘러와서합수(合水)되는지점이라고한다.풍수가에서볼때양쪽에서물이흘러와만나는곳은돈이많이모이는터다.짐작건대‘게무덤’도그러한터였을것이다.


아무튼여기서최부잣집의파시조(派始祖)이자13대조인최진립(崔震立,1568~1636)이살았고,아들손자대로내려가면서점차재산이쌓였다.재산이늘어감에따라방문하는손님도늘어나자좁은집으로는감당하기어려웠다.그리하여최언경대에이르러여기저기터를물색하던중현재의요석궁터를택지(擇地)했던것이다.요석궁은원효대사와요석공주의로맨스가어린곳으로유명하다.그로맨스로인해요석궁에서신라의대문장가설총이태어났다.


그러니까최부잣집은원효대사의아들인설총의임신지(姙娠地)이자출생지(出生地)라고보아야한다.설총이누구인가.신라의대학자로서이두문자의창시자아니던가.이집터에서일차로설총이배출되었음을기억하자.


臨水는있으되背山이없다


집터의입지조건을보통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한다.그런데최부잣집을보면임수(臨水)는되어있는데,배산(背山)이잘돼있지않다.집앞에흐르는모내(汶川)는1300년전원효대사가다리에서미끄러져옷을적셨다는유서깊은냇물로임수에해당한다.동쪽인토함산에서발원하여남쪽의낭산과남산사이로흘러오다가반월성부근에서각도를꺾어,반월성의움푹들어간부분에서한번모였다가다시최부잣집앞을거쳐서쪽으로돌아흘러간다.최부잣집에서보면동출서류(東出西流)의수국을이루는데,집앞에물이흘러야돈이생긴다.


그런데집뒤의배산이제대로보이질않으니이상하다.대개명택들은뒤에서내려오는배산(背山,풍수용어로來龍)이튼튼한편인데이집은내룡이확실치않다.야트막한둔덕으로내려와서언뜻보면평지에가깝다.‘왜그럴까’하고지맥을조사하기위하여집뒤에있는밭을여기저기돌아다녀보았다.거기에는아름드리괴목(회화나무)이몇십그루들어서있었다.웬나무들인가?아마도이괴목들은집뒤가허하니까그허함을비보(秘報)하기위하여심어놓은나무가아닌가추측됐다.나중에장손인최염씨를만나집의내룡이약해서집뒤가허하다는이야기를했더니,그의답변이필자의추측과같았다.


최염씨의말에따르면형산강상류의원래집터인‘게무덤’자리도뒤의내룡이거의없었고,요석궁터인이집도내룡이야트막한둔덕이라서뒤가허하다는것이다.그점을보완하기위해서요석궁터를집터로일단잡아놓고,집을짓기수년전에미리집뒤에나무를심었다고한다.나무중에서도수명이오래가는수종인괴목을선택해서심었다.그러니지금아름드리괴목의고목들은약200년전에최언경이집터에대한비보책으로일부러심어놓은것들이다.

광복전에는괴목숲이빽빽하였으나일제말엽일본인들이괴목을공출해가기위해많이베어버렸고,광복이후에도많이훼손돼지금은듬성듬성한상태다.빽빽하게밀집된괴목숲이었다면뒤에서불어오는북풍을어느정도차단할성싶다.다른집에서는집뒤에대나무를심어놓은경우가많은데,이는내룡이험한바위산으로되어있을때바위산에서풍기는살기를차단하기위한방살용(防殺用)이다.괴목에비해대나무는관리가거의필요없고빨리자라기때문이다.이에비해괴목은성장하는데오래걸리므로장기적인투자와관리가필요하다.

그대신성장하기만하면대나무보다훨씬품격이있고,시간이흐를수록대나무보다키가크고두껍게자라방풍효과는크다.계림숲도모두괴목이다.한편최부잣집의터를자세히보면바로옆에위치한향교보다약간낮게자리잡고있다.200년전공터였던이곳에집을지으려고할때,향교의반대가심해향교보다터를낮게깎아내고지었다.현재주춧돌을살펴보면향교보다2계단정도낮다.안채뒤를보니실제로땅을깎아낸흔적이보인다.

3m정도는원래의자리에서흙을깎아내고집을지었음이발견된다.이는향교보다낮게짓기위해서이기도하겠지만,필자가보기에는내룡이편평하게내려와서뒤에떠받쳐주는맥이약하므로터를전체적으로깎아서바닥을낮추어자연히집뒤의둔덕을높이는풍수적효과를얻기위한장치로도해석된다.


그러나내룡이약하다고이집이맥(脈)도없는것은아니다.집앞의문천을건너앞산에올라가이집터의국세를전체적으로조망하면동쪽의반월성쪽에서부터용맥이구불텅구불텅한참을내려와계림을지나최부잣집근처에서멈추었음이확연히나타난다.내룡이야트막한둔덕으로내려와약하기는하지만맥이이어져서최부잣집에뭉쳐있음은확실하다.


재물이쌓이는도당산


형산강상류의게무덤자리에서경주교동으로이사온최언경부터현재의자손인최염까지계산하면7대다.12대만석중에앞의5대는게무덤에서하였고,나머지7대를요석궁터였던현재의교동집에서한것이다.교동집을풍수적인안목에서볼때최대강점은집앞의안대가아주좋다는점이다.이집의좌향은임좌(壬坐)로남향집에속한다.앞에서설명한바와같이경주에서남향집은남산을향하게되어있으므로최부잣집역시남산이안대다.

이집대문에서정면을바라보면‘도당산’이라는야트막한야산이바로앞에보이고그너머로남산의세봉우리끝부분이멀거니서있다.물론도당산과남산은실제상당거리떨어져있지만,이집에서쳐다볼때는거의이중으로겹쳐진것처럼보인다.나는최부잣집의이중안대를보고서야비로소‘안도감’비슷한느낌이들었다.이집이만석꾼이살던집이라면명당이틀림없을것이고,명당이틀림없다면과연어떤점이명당인가를해명해야한다는부담감이있었는데,안대를보는순간그부담감에서해방되었기때문이다.

아마도200년전에터를잡은최언경도앞산의이중안대에매혹되었을것이틀림없다는생각이들었다.실제로도당산생김새는재물과관련이있다.도당산은말발굽처럼디귿(ㄷ)자형태로생긴야산이다.마치곡식을쌓아놓은모양이라하여창고사(倉庫砂)로보는데,말발굽형창고사는그중최고로친다.그리고디귿(ㄷ)자의터진쪽이최씨집앞과일치돼있어서,최씨집에서보면재물이새나가지않고쌓이는형국이다.


그런가하면도당산너머로남산의세봉우리가넘어다보인다.세봉우리는둥그스름한금체(金體)에가깝다.금체에서는귀인이나온다고간주한다.아쉬운점은금체봉우리의모양이약간기울어져있다는점이다.금체봉이똑바로서있었으면귀(貴)가좀더높았을것이다.어찌됐든창고사위에금체가겹쳐서있는형국의안대는대단히희귀한안대임에틀림없다.재물과귀(貴)가겹쳐서시너지효과를내는안대가바로최부잣집안대인것이다.

행여나교과서적인이중안대(二重案帶)를보고싶거든최부잣집대문앞에서서무한정구경하시라!관람료도받지않으니몇시간씩보아도공짜다.최부잣집의내룡과안대를보면서양자의상관관계를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양택일경우에는안대가더중요하고,음택일경우에는내룡이더중요하다.최부잣집을보아도이등식은입증된다.내룡은땅속으로전달되는기이므로음기(陰氣)이고,안대는땅위의공기를통해공중으로전달되므로양기(陽氣)로간주한다.

죽어서누워있는사람은뼈만남아있으므로음기를주로받지만,활동하는산사람은양기를주로받는다고본다.물론음양기(陰陽氣)모두받을수있으면더욱좋지만말이다.그러므로양택을볼때는일단안대를먼저볼필요가있다.이번에는최부잣집마당을구경해보자.사랑채에놓인화강암주춧돌들을바라보니격조와품격이느껴진다.사랑채에올라가는계단과둥그스름한기둥의받침대가모두붉은색이약간감도는경주화강암이다.민가에이렇게원형의화강암주춧돌을사용한사례는처음본다.마치큰절터나궁터를보는듯한느낌이든다.


아흔아홉칸의민간궁궐


원래이집은아흔아홉칸이나되었고,부지2000여평에1만여평의후원도있었다.그집에살던노비만도100여명이나되었다고한다.최염씨의부인인강희숙여사(姜熙淑,63)가1961년에시집왔을당시에는방앗간외양간등이헐려마흔일곱칸으로줄어있었고,노비들도거의자유로운몸이되어살림을난상태였다고한다.지금은더줄어들었다.사랑채도화재로(1970)주춧돌만남아있고안채와문간채창고만남아있는상태다.


하지만사랑채터에남아있는화강암주춧돌은최부잣집전성기가얼마나화려했는지를말해주고있다.알고보면이화강암주춧돌들은200년전에반월성에있던것을집을지으면서옮겨놓은것이다.원래왕궁기둥을받치던돌들인것이다.여하튼이사랑채에는당대의기라성같은손님들이머물렀다.그면면을한번보자.구한말에는경북영덕출신의유명한의병장신돌석(申乭錫)장군이이집에피신하여집주인인최준(崔浚,1884∼1970)의보호를받고있었는데,그때요석궁(최부잣집의바로옆집으로종조부집이었다.

현재는한정식집이름)의대들보를혼자힘으로들어올려설치했다는일화가있다.구한말에면암(勉庵)최익현(崔益鉉,1833∼1906)도의병을일으킬때수백명의수행원을데리고이집을방문하여며칠을묵었다고한다.그때최부자로부터상당한거사자금을받아서돌아갔음은물론이다.면암은충청도기호학파라서노론이었고,최부잣집은남인이라서로당색이달랐지만,국난을당하자당색에관계없이도움을청하러왔던것이다.


강점기때스웨덴의구스타프국왕이왕세자시절에경주서봉총(瑞鳳塚)의금관을발굴하기위해경주를방문하였는데,이때최부잣집사랑채에머물렀다.서봉총이라는명칭도스웨덴의왕세자가발굴에참여했다고해서붙여진이름이다.이외에국내저명인사로는의친왕이강,손병희,최남선,정인보,안희제,여운형,김성수,장덕수,송진우,조병옥등이다녀갔다.의친왕이강공(李堈公)은사랑채에엿새동안묵으면서,이집주인에게‘문파(汶坡)’라는호를적어주었다.육당최남선과위당정인보두사람은이집에서1년이상머무르며‘동경지(東京誌)’를편찬하기도하였다.


천도교의손병희는집주인인최준이존경하던터여서자주와서묵었다.손병희와최준은보성학원이사로,동아일보발기인으로같이참여하기도하였다.최린도왔었다.최린은보성학교교장으로재직할때천도교도100명과보성학생100명을인솔하고수운선생묘소를참배온적이있었는데,이들의숙식을모두최부잣집에서해결하였다.최수운과최부잣집이같은집안이라는사실을알았기때문에아무런부담없이대인원을데리고와묵어갔던것같다.


인촌김성수도1년에꼭한번은들를정도로자주왔다.인촌집안과최부자집안은교류가빈번했다고한다.인촌집안은호남에서제일가는부자로당시10만석을하던집이었고,최부잣집은영남의제일가는부자로만석을하던집안이라영호남부자끼리통하는부분이있었을성싶다.그러한인연으로인하여최준은동아일보발기인으로참여하였고,인촌의영향을받아교육사업에전재산을기부하였던것이다.인촌은고려대를세웠고,최준은대구대와계림학숙을세웠는데,대구대와계림학숙은영남대의전신이다.


마지막최부자최준


문파(汶坡)최준은현재의장손최염의조부이며,마지막최부자로서나라가망한일제시대를넘긴인물이다.마치중국의식민지가된티베트의망명지도자달라이라마처럼,문파는일제식민지상황에서최부잣집의자존심을지키면서동시에재산도관리해야하는어려운상황을살았던사람이다.동학후활빈당이부자들을습격할때도최부잣집은그덕망으로인해어려움이없었지만일제식민지는그상황이근본적으로달랐다.그는조선의명부(名富)로서일본명사들의방문을받긴하였지만재산을지키기위하여자존심을죽인것으로보이지않는다.


그는항일대동청년당을조직힌독립투사백산(白山)안희제(安熙濟,1885∼1943)와의기투합하여백산상회(白山商會)를설립한다.물론그운영자금은대주주인최준이거의책임졌다.백산상회는말이상회지임시정부의김구선생에게독립자금을비밀리에제공하기위한방편으로세운회사였다.

상해에계속군자금을보내니백산상회는손해가나결국부도가날수밖에없었고,그빚을사장인문파가지게되었다.액수는당시돈으로벼3만석에해당하는거금130만원이었다.이로인해식산은행(殖産銀行)과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문파최준의모든재산을압류하였다.최준은만석꾼에서졸지에빚쟁이로전락한것이다.


그러나얼마후뜻밖에도식산은행의두취(頭取,총재)인아리가(有賀光豊)라는일본인이최준이섰던거액의빚보증을해제해주었다.거액의빚을탕감해준것이다.그리하여재산의반절정도를되찾을수있었다.하지만커다란의문은왜채권자인식산은행총재가빚을탕감해주었는가하는점이다.이부분은최부자의친일행위를가름하는중요한대목이다.탕감이유에세가지설이있다.첫째는일제의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때문이다.아리가는당시사이토총독의오른팔로서일본의호족출신이었다.아리가는조선에와서조선팔도곳곳을여행하였다고한다.아리가의취미는고건축답사와여행이었고겸사해조선의민심도파악하고있었다.


그런데아리가가방문하는곳마다사람들이경주최부잣집의인심이후하다는이야기를하더라는것이다.그래서아리가는최부잣집을주목하게되었는데,만약식산은행이최부잣집의재산을몰수하여거지로만들면일제의식민정책을많은사람들이의심할것이라고판단하였을가능성이있다.즉내선일체정책에좋지않은영향을끼친다고보았다는것이다.일본사람이들어와서경주최부잣집이망했다는소문이조선팔도에돌면일본에대한반감이더욱악화될것이아닌가.


여기에다가아리가의최부잣집에대한개인적인호감이작용했을수도있다.아리가는일본의명문가출신으로조선의명문가로소문난최부잣집에호감을가졌을가능성이높다.실제아리가는최부잣집에자주놀러오곤했으며,사랑채에머무르면서이집의가주(家酒)인법주(法酒)와김치를곧잘먹었다고전해진다.이러는과정에개인적인우정이싹텄을가능성이있다.식산은행탕감건으로해서나중에사이토총독은일본육군성으로부터경고장을받았다.

‘당신은이적행위를하고있다.그돈이상해독립운동자금으로갔는데왜결손처분을해주느냐?’는내용이었다.여기에는해군출신인사이토총독과역대총독을배출한육군출신간의알력도작용하였지만,이사건이내부적으로도상당한논란이있었음을암시하는대목이다.


한국에서가장큰뒤주


문파최준은말년에손자인최염에게나중에라도일본에가거들랑아리가의무덤을꼭한번찾아가라는말을남긴바있다.아리가의셋째아들(有賀敏彦·80)은현재한일문화교류협회일본측회장으로활동하고있다.선대의인연을아는그가최염에게편지를보내온적이있다.동의대최해진교수는나머지두이유를논문(‘경주최부자의경영사상형성배경과내용’)에서이렇게설명한다.백산무역에은행이대출해줄때마다문파에게일부러보증을서게하여빚을지게한다음이를미끼로총독부에협조하도록회유하려했다는설이두번째다.

세번째는부채탕감을해주는대신에최부자의고가를환수하여신라박물관을만들려고하였다.문파는당대에는불가하며사후에제공하겠다는약속하였다.그러나다행히광복이되어그나마남은재산이일본으로넘어가지않았다는것이다.한편상해임정에자금을송금한다는사실을탐지한일경은문파를평양경찰서에수감하고손톱을빼는고문을하였다.그러나그는끝내발설을하지않았다.문파가상해임시정부에비밀리에자금을제공하였다는사실은김구선생이증언한바있다.

광복후1946년2월에문파는김구선생을서울경교장에서대면하게된다.이때최준은62세였고김구는70세였다.백범은문파를향해“최선생그동안수고가많았습니다.가산을탕진하면서까지우리임시정부에자금을보내주신최선생의공로야말로3000만동포가모두우러러보게될것입니다”라면서,‘자금조달인명기록장’을보여주며위로하였다.사랑채말고최부잣집에서볼만한것은마당한켠에위치한창고다.

정확하게는가을추수가끝난후각지에서날라온쌀을저장하던뒤주다.정면5칸,측면2칸으로우리나라에서개인집뒤주로는가장큰규모인데,쌀이700∼800석은들어갈것이라고한다.이런뒤주가몇개더있었는데다없어지고남아있는것은이것한개뿐이다.그다음볼만한것은사랑채앞에놓인석조(石槽)다.석조형태가연꽃모양이어서특이하다.현재경주시전체에석조는도합20여개가있는데,연꽃모양의석조는유일하다고한다.

이석조는신라의유물로추정하고있는데,원래반월성안의정자에있던것이기때문이다.그정자를조선조때최부자의선조가구입하면서덤으로가져온것이다.인촌이사랑채에들를때마다이석조를보고는고려대에갖다놓자고여러번제의하였다는사연이있다.이집구조에서눈여겨볼만한것은안채로들어가는대문이다.안채대문에칸막이가설치되어있어서,곧장못들어가고옆으로돌아서들어가게되어있다.이는여자들의살림공간인안채내부를바깥에서정면으로볼수없게끔고려한장치다.일종의발을쳐놓은것과같다.


최부잣집의현장손은어떻게사나?


현재최부잣집은관리인이살고있을뿐집주인은이곳에없다.사랑채의팻말에는이집이최식(崔植)의집으로새겨져있지만이미1974년에사망했고,현재주인은최식의장남인최염으로서울방배동에살고있다.나는최염씨를만나기위해서울집에들렀다.그는현재60여평의빌라2층에살고있었다.보통사람에게60여평빌라면괜찮은집이겠지만,100여명의하인을두고살던12대만석꾼의장손집치고는작다는생각이들었다.


올해68세인최염씨는처음보는순간부드럽고정돈된성품임을느낄수있었다.목소리톤도높지않고자근자근이야기하는스타일이었다.가훈인육연(六然)이걸려있는응접실에서이야기를나누었다.제일궁금한것이현재에도만석의재산이유지되고있는가하는점이었다.

“유산은못받았습니다.만석은조부님(崔浚)대에끝났습니다.”

“그렇다면그재산은다어디로갔습니까?”

“영남대학재단에모두희사되었습니다.

조부님은인촌과친했습니다.인촌의영향을받아교육사업에뜻을두었고,광복이후좌·우익의대립과토지개혁을겪으면서많은토지를유지하는것이시대조류에맞지않다고판단한것같습니다.그래서대학설립에전재산을희사한것입니다.광복직후대구대학을설립하면서수백정보의부동산과집에있던장서8000권을모두희사했죠.6·25후에는경주집을포함한나머지재산을털어경주에계림학숙(鷄林學塾)을설립했습니다.대구대학은여유재산이들어갔고,계림학숙은남은재산이전부들어간셈입니다.

계림학숙초대학장을김범부선생이지냈죠.서울의유명한교수들이피란을내려왔기때문에계림학숙에는유명교수가많았습니다.그러나수복후에모두서울로올라가버려서부득이대구대와계림학숙을합쳤습니다.”“영남대학은박대통령이설립한것으로알고있는데요?”

“우여곡절이좀있습니다.조부께서대구대학(현재의대구대학이아님)을운영하고있다가,5·16후에운영이어려워졌고,마침이병철씨가학교를운영해보겠다는의사를표시해교동집사랑채에서조부님과대면하게되었죠.조부님은이병철씨에게학교를넘길때대가는일절받지않았습니다.

그것이마지막최부자인조부님의뜻이었습니다.그러다가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이후박대통령에게다시넘어가현재의영남대학이생긴것입니다.”결론적으로12대를내려온만석꾼의재산은대학설립으로그대미를장식하였던것이다.호남의부자인인촌이고려대를키웠다면,영남의부자최준은영남대학전신인대구대학을세운것이다.“만약대학설립에재산을희사하지않았다면그재산이계속유지될수있었을까요?”“못했을겁니다.

옛날에는장자가전재산을고스란히상속받을수있어서본인만노력하면재산을지킬수있었지만,지금은차남이나삼남그리고딸들도균등하게유산을받을수있도록법으로규정되어있습니다.재산이분산될수밖에없습니다.”경주교동집은현재영남대학재단소유이며,최염씨는다만그집에서거주는할수있다고한다.60년대초반부터서울에서사업을하며살았으며한달에한번정도경주에내려가집을둘러본다.현재는경주최씨중앙종친회명예회장이그의직함이다.

그는이런저런이야기끝에“제가서울에서사업할때최부잣집장손이라고밝히면처음보는사람들도저를무조건신뢰해주었습니다.조상들이누대에쌓아놓은음덕의혜택을본것이죠”라면서미소짓는다.나는조용히다과상을나르던최염씨의부인강희숙여사,그러니까최부잣집의맏며느리에게질문을던졌다.


‘치마양반’이란별명


“최부잣집의종부인셈인데친정은어딥니까?”

“저희집도경북봉화(춘양)에서는내로라하는부잣집이었습니다.당시봉화의강부자라면알만한사람은다알고있었으니까요.그런데막상시집을와서보니집이어찌나큰지처음에는길을못찾을정도였어요.수학여행온학생들이나외국관광객들도찾아와집구경을하고가곤했으니까요.”

강여사의친정도명문부택이었던것이다.최부잣집이비록진사이상의벼슬은하지않았지만,그혼반(婚班)은영남의일급명문가들이었다.

최염씨의6대조모가의성김씨이고,5대와4대조모는모두진성이씨였고,증조모는서애선생후손인하회유씨이고,조모는안동의풍산김씨이고,어머니는청주정씨(한강정구선생의후예)였다.그런가하면누님은동계정온선생집의종부로시집갔고,둘째누님도서애선생종부다.최씨집에시집온여자쪽의친정이모두기라성같은벼슬을지낸집안이라서,최씨집에대해서우스갯소리로붙인별명이‘치마양반’이었다고한다.


“경주법주가원래이집에서손님을접대하던가주를상품화한것이라고하는데,법주는어떻게만듭니까?”“우리집안에는‘교촌법주’라는특유의술이있어요.이술은맏며느리만이전수받아빚을수있죠.저도시어머니에게서배웠습니다만,그술빚는방법은누구에게도가르쳐주지않습니다.저도제큰며느리에게만전수하였습니다.”법주는가을추수후햅쌀로만들어서초봄까지만먹는술로온도가올라가는여름에는상하기때문에담글수없다고한다.


가훈을‘어긴’(?)장손


나는강희숙여사에게이런저런이야기를하면서자녀들에대해서물어보았다.부부는2남1녀를두었으며장남인최성길씨(崔成吉·40)는사법고시에합격해현재예비판사라고한다.2001년2월에서울지방법원에정식으로발령을받을예정이다.따지고보면최성길씨가최부잣집의장손이다.

“이집가훈은진사이상벼슬을하지않는다는것인데,아드님이판사를하면이가훈에위배되는것아닙니까?”“그렇지않아도그때문에갈등이많았습니다.”

강희숙여사가필자에게털어놓은이집의비하인드스토리를소개하면이렇다.최성길씨는사법고시에도전한뒤11번째에합격했다고한다.그동안무려10번을낙방한셈이다.그과정에마음고생도이만저만이아니었다.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는육연을명심하면서버텨왔으나10번째떨어지자부모된심정으로가슴이너무아프더라는것이다.불교신자인강여사는차모라는법사를찾아가서아들문제를상담하였다고한다.상담결과차법사는돌아가신최씨집의증조부께서손자가판사되는것을막고있다는답변을하였다고한다.차법사는,조상이후손잘되게도와주어야지,이렇게출세길을막는경우는자기도처음보았다고한다.


최성길씨의증조부는문파최준이다.최씨집이진사이상의벼슬은하지않는것이가훈으로내려왔는데,증손자가그원칙을어기려하니까절대안된다는것이다.판사는옛날로치면진사이상의벼슬이다.비록육신은죽었지만문파의영혼은남아서집안의가훈을끝까지지키려고한다는것이다.

그래서강여사는시조부인문파선생영혼을설득하는모종의조치를취했고,우연의일치인지는몰라도그후11번째시험에서최성길씨가합격했다고한다.

영혼의세계는눈에보이지않는세계이기때문에가타부타얘기할수는없지만,이일화를통해최부잣집이가훈을지키기위해얼마나노력해왔는가를짐작할수있다.필자가이것저것귀찮은질문을던졌는데도종부인강여사는전혀귀찮은내색을보이지않고차분하게답변해주었다.명문가종부의품위가오랜세월을통해몸에배어있다는인상을받았다.절제된담담함같은것을강여사에게서느낄수있었다.만석의재산은사라졌지만,그절제된담담함은계속될것이다.

-글/조용헌<원광대사회교육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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