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화서면(尙州市化西面)의지명유래(地名由來)
화서면은동으로내서면과외서면,북서쪽으로화북면,화남면,남으로화동면에접해있고,상주시와의거리는26km의서쪽에자리하고있다.행정명은화서면(化西面)이고,화령(化寧)이라고부른다.화서는중화지구(中和地區)의중심으로신라시대에답달비(答達匕),답달건비(答達建匕),또는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불리다가신라경덕왕16년에는화령현(化寧縣)고쳤다고하며,고려시대에는그대로따라썼으며,조선시대1413년(태종13년)에현으로고쳐서상주목에속하였다.
1895년5월26일(종32년)상주군으로개편되면서중화의서쪽에위치하였다하여화서면으로칭하고이때에46개의마을(산성,하달,중달,상달,송천,계곡,명통,동점,금곡,니동,솔의,봉정,신봉,당전,상현,하현,중양,봉전,무동,산수,서원,금천,상봉상촌,복용,기동,봉천,봉성,신경,금성,달성,림정,사곡,용강,우산,황산,마암,수부,율현,장림,원통.전리,교촌,봉강,지산,외항)이있었다고한다.1914년4월1일행정구역개편에따라화북면의서산리와내서면의율원리일부를병합하여11개리(하송,상곡,신봉,상현,금산,상룡,달천,사산,율림,봉촌,지산)으로축소개편하였으며,1948년율림,봉촌,지산을제외한전리가분리되어19개행정리로개편하였다.
1986년1월1일상주시와군이분리되어상주군에속하였으며,1988년1월1일상주시도농복합형시,군통합으로현재상주시화서면으로되어있다.화서면지역은소백산맥중의분수령을이루고있는지대이며,북으로봉황산(740m),서쪽은천택산(638m),남으로원통산(597m)으로둘러싸였으며동부의물은낙동강으로중,남,서부의물은금강으로흘러들고,남서부에한들평야가있을뿐대개산간계곡으로이루어져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금산,율림등집단거주부락이있어문화의자취가보이는고장이며,구한말때부터시장이형성되어농산물과각종상품의유통으로문화가일찍부터발달되었다.특히상주보은간25호선국도가2차선포장도로로동서로관통하고남으로황간추풍령에북쪽으로화북면에이르는지방도로49호가있으며2007년11월27일상주~청원간고속국도30호개통으로인하여교통의요지로급부상하게되었다.
금산리(錦山里)
본래화령현의지역이었으나후에화서면지역으로1914년산수리,서원리,금천리일부를합하여금천과산수의이름을따라금산리라해ㅔㅆ으며1948냔ㄱ,ㅁ신1리,2리로분리되었다.금천(錦川)은현재금산리에서북쪽으로약1km떨어진곳에위치해있으며,지금으로부터약200년전에이곳에마을이형성되어있었다고한다.
금천의유래는옛날이마은중간을흐르는시내가있었는데,거기에높이가5m가량이나되는아름다운폭포가있었다고하며,그폭포에서떨어지는물의모양이비단결같이곱고아름다워아름이름을금천(錦川)이라불렀다고전한다.갑뱅이,갑방이는봉산서북쪽에있는마을로천택산아래금계천상류에있는명소로갑방(甲房)이라함은옛날병사들이갑옷을감춘곳이라하여갑방또는갑뱅이로불린다고한다.
마을뒷산을금산(金山)이라부르는데,이산에는우리나라에서가장높은금이매장되어있으리라는추측으로부근지역의지가가고가로책정되어갑뱅이로동명을정했다고하며진주강씨(晉州姜氏)가처음마을을개척하였다고한다.그래서진주강씨가집성촌을이루고있다.둥너머먹뱅이라는고을도선비가먹을많이갈았다하여먹뱅이로칭했다고한다.현재이마을은감나무와호두나무가많아감과호두가특산물로생산되고있다.
봉산(鳳山),서원(書院)
금천동남쪽에있는마을로산수동남쪽인데,웃마을과아랫마을이있다.마을뒷산이봉황이날아가는모양이라하여고려때부터봉산이라칭하였으며,옛날에자연적으로만들어졌다는못이지금도그대로남아있었는데,처음에는연이많이있어경치가아름다워구경오는사람이많았다고한다.조선조때소재대감의서원이설립도고부터는서원이라고칭하게되었다한다.
산수골(山水골)은봉산마을북쪽에있는마을로처음에는강씨들이들어와살다가떠나고,지금은노씨,이씨,박씨,김씨들이모여살고있다.옛날부터산좋고물좋은곳이라하여산수곡(山水谷)칭하에되었다.또이곳은흙이좋아옛날부터옹기를구웠으며지금도땅을깊이파면옹기조각이나온다고한다.
달천리(達川里)
본래화령현지역이었고후에화서면의지역으로1914년봉천리,봉성리,신경리,금성리,달성리,임정리를합하여달성과봉천의이름을따서달천리라했으며,1948년달천1리와2리로분리되었다.갈밭골,신경리,신경(新耕)은오랜옛날부터이마을주변에는갈대가많았는데,마을사람들은이갈대로말미암아마을에풍년이들고,또,모사는집이없는것이라고믿어이갈대밭을소중히여겨왔다고하며이에연유하여마을이름도갈밭골이라고부르게되었다한다.
금성(金城)이마을은서쪽에달성이있고서남쪽에옥성마을이있는데,뒷산에있는큼바위들이마치금반처럼생겨자연적으로성을이루었으며,마을앞들에서생산되는쌀낱이굵고백옥같다하여마을이름을금성이라부르게되었다한다.달천(達川)은마을의지형이금계포란지형(金鷄抱卵之形)이라하여1680년대부터달천이라부르게되었다,이마을에는달성서씨(達城徐氏)와경주최씨(慶州崔氏)많이살고있으며새마을사업으로도로를확장하여국도와인접된교통이편리한마을이다.
새말,봉성,봉성리(鳳城里)는소백산맥이분수령을이루고있으며,봉항산이이지대에위치하였고,그봉황산에서흘러내려오는개울이마을앞을흘러내려가며이마을에풍년을가져다준다고하여마을이름을봉성이라고부르다가광복후마을이새로만들어지면서새말이라하였다.봉강,봉강리(鳳崗里)는봉촌리에서중심이되는마을로앞재마을의북쪽에있으며오랜옛날봉이나서이마을산에서놀았다하여마을이름을봉강이라부르게되었는민담이전래하고있으며,지금은40여가구가살고있다.
생금마는봉강서쪽에위치한마을로서옛날에는말을기르던곳으로오래전부터생금마라불려오고잇으나,그유래는미상이며현재는봉강마을에포함되어있다.앞재,전성,전성리(前城里)는봉촌마을앞에큰산이있는데,1595년경임진왜란때성을쌓고군량미를보관하는양창으로이용하였다하나지금은창고는없어지고성을쌓았던흔적만남아있다.
이성터앞에있는마을이라하여앞재또는전성이라불려왔다고한다.원팅어,원통(元通)은원통산아래에있는마을로서원통산은1894년동학란당시충의의인사들이모여관군과싸우다가원통하게몰사한산이라하여원통산이라불려직되었다는이야기가전한다.이산아래에있는마을이라원통이라한것이변음이되어원팅이로불려진것이라한다.
사산리(沙山里)
본래는화령현지역이었으며후에상주군화서면지역으로1914년사곡리,용강리,우산리,황산리,마암리를합하여사곡과황산의이름을따서사산리라했으며소재노수신선생이이곳에서살앗다.1948년사산1리,2리로분리되었다.누르미(黃山)는사래실북쪽에있는마을로예전에는웃마을을우산이라부르고,아랫마을을황산이라불렀는데,아랫마을이더컷었다고한다.
옛날에는허씨와노씨들만살았다고하나지금은여러성씨의사람들이살고있으며,동네뒷산은청대산(靑臺山)연결되어있으나산에나무가없어누르미로구전된것이라한다.사래실,사곡(沙谷)은옥연으북서쪽마을로사산에서가장크며마을의흙이모래땅이어서사곡아라고칭하게되었고,옛날에는이씨와허씨가살았다고하나현재는노씨가많이살고있으며,신라때부터마을이있었다고한다.
마을뒷산에절골이라는골짜기가있는데,절은없어지고주춧돌만남아있으며또마을앞에있는탑거리라는곳은옛날에탑이있었던자리라고한다.옥연(玉淵),영당(影堂)은사래실동쪽에있는마을로화서면사곡입구에있었던노씨종가가불타고상주목사민종열이라는분이종가이축을이곳에했다.
태종(太宗)때의경공평공(敬平公)노고(盧高)영정(影幀)을모시어옥연,영당이라고칭하게된데서마을이름이유래되었다.말바우,마암(斗岩)은옥연동북쪽에있는마을로정재수기념관북서쪽에있다.마을뒷산이마치말의형상을하였다하여말바우혹은두암이라고칭하게되었으며,이에연유하여마을이름을말바우,두암등으로부르게되었다한다.
상곡리(上谷里)
원래는화령현지역이었으며,후에상주곤화서면지역으로1914년계곡리,명통리,동점리,금곡리,상달리와내서면율현리일부를합하여상달과금곡의이름을따서상곡리라했으며,1948년상곡1리,2리로분리되었다.쇳골(金谷)은현재의상곡리동편골짜기마을인데,옛날부터금이난다는금부산아래에위치한마을이라하여쇳골(金谷)이라한다.
조선시대의봉수대유적이있고또마을입구에는옛날사기그릇을굽던가마터가있는데,엤날부터이곳에서는상주향교(尙州鄕校)제형기(祭亨器)를구웠다고한다.신협(新峽)은쇳골남쪽약1km지점에위치한마을로중말,골마을이있었는데,개울옆건너편으로새로이큰마을이이루어져합하여신협이라부르게되었다.
지명골(智明谷)은신협마을의남동쪽마을인데,엣날이마을에지극한효자가있어지혜가뛰어나고성실하여마을사람들을일깨우고또인근에그이름을크게알려직되어그때부터마을이름을지혜밝은효자가사는마을이라하여지명골이라고부르게되었다고한다.짓질,계곡(鷄谷)은옛날이마을에는닭이많아이마을의새벽닭을음에부근마을사람들이잠을깼다고하여계곡이란이름으로불리기도한다.
또하송,하북사람들이화령장을갈때고개를넘어야가까운지름길로갈수있어재를넘는길이라하여잿길리라하였는데,이것이변음되어차츰짓질로굳어졌다고한다.퉁점,동점(銅店)은조선시대의이곳에서통쇠즉구리를생산하였다하여마을이름을퉁쇠를파는마을이란뜻으로퉁점이라한것이한자로표기될때동점이되어한자음대로동점이라불리게되었다.
상용리(上龍里)
본래화령현지역이었은데,후에상주군화서면지역이되었고,1914년상봉리,상촌,복용리,기동,금천리일부를합하여상봉과복룡의이름을따서상룡리라했으며1948년상용1리,2리로분리되었다.터골,기동(基洞)은골짜기가좁고산으로둘러쌓인마을로서임진왜란때피난지로알려져피란지의골짜기였다는뜻에서터골(基洞)이라하였다고구전되고있다.
또한옛날이웃마을사람들이풍류를즐기며놀던곳이라하여기동이라칭했다한다.놋점이,상봉(上鳳)은상촌동쪽에있는마을로조선시대에이마을은그릇을만들던곳이로유명햇는데,놋그릇을만드는마을이라하여놋점이라부르게되었다한다.상두골,복룡(伏龍)은상촌의위쪽에있는마을이라하여상두골이라고브르게되었다고도한고,또한마을을이루고있는골짜기가용이엎드린모습과비슷하다고하여복룡(伏龍)이라고도부른다고한다.
상두골은옛날사찰의상도가살던곳이라하여불리어졌다고도한다.또한살구나무와복숭나무가많아서행도곡(杏桃谷)이라불렀으나변음되어상두골이라고도한다.이마을에서는장례때상여가앞산을넘지못하고돌아서간다고한다.화서면북쪽의끝지역으로화북면과화남면의경계를이루고있으며현재는33가구가살고있다.
불당골,조선중기에상봉마을북쪽골짜기에절이세워져불당(불당)있는마을이라하여불당골이라고불리고있었으나현재는사람이살지않고있으며,불당이있었던자취도찾아볼수없으나,옛날갈밭골에부유한정씨가살았는데,딸만둘이고아들이없어서걱정이많았다.그러던어느날꿈에부인이골짜기의소(沼)에있는용을보다가붙잡혀가는꿈을꾸었다,부인또한같은꿈을꾼것이신기하여꿈에본소(沼)에불당을마련하고치성을드린결과아들을얻었다는전설이전하기도한다.
상현리(上懸里)
본래화령현지역이었고,후에상주군화서면지역이되었다.화령현의위쪽이되므로상현이라했다.1914년하현리,중양리,봉전리,무동을합하여상현리가되었고,1948년상현1리와2리로분리되었다.무동(舞洞,武洞)은당두서남쪽에있는마을로마을뒤으봉황산(鳳凰山)에서봉황새가대밭골의죽실(竹實)을배부르게먹고춤을추었다는데서무동(舞洞)이라하였다.
또일설에는옛날에무인이살았다고무동(武洞)이라고도하며무동마을은나주정씨(羅州丁氏)가마을을개척하였다고한다.당시식재하였다고전하는느티나무가현재면목(面木)으로지정관하고있다.마을뒤편봉황산기슭에백운사(白雲寺)와해룡암(海龍庵)이잇고마을앞에는무동지(武洞池)가있다.
당두(堂頭)는창안서남쪽에있는마을로옛날이곳에좋은집터가많아당대도있었고집을지어잘사는마을이라하여당두(堂頭)라하였다.대밭골,죽전(竹田)은창안마을북쪽에있는마을로봉황산의봉황이이곳에서죽실을따먹는형상이라하여불리는이름이라한다.또한옛현청사(懸廳舍)가있던곳이라고하며대장군이살던곳이라는이야기도있고화령현당시는대막(對莫)으로도불렀다고한다.
상현리의별명으로마을뒤으산기슭이온통대나무밭으로마릉에대나무가많다하여대밭골혹은죽전이라부르게되었다.창안,창내(倉內)는상현리에서가장큰마을로중앙에위치하며1910년까지도이곳에창터가있었다고하여창내로불릭되었다고하는데,화령현당신관곡을저장하던창고라한다.뒤에는탑이있었던곳에큰소나무가서있어탑송(塔松),또는반송(盤松)이라불려지는데,천연기념물제293호로보호를받고있다.
특산물로는고추와마늘이유명하며근래에와서는잎담배도많이생산되고있다.상현(상현),상현이라고하는마을이름은이곳이옛날신라탑비군(塔匕郡)때에도관아가있었던곳이고,고려때에는화령현청이있었던곳이라는데서유래한것으로보여진다.주양(周陽),중양(中陽)은당두동쪽에위치한마을이라하여주양,중양이라불리어지게된것이라하며,화령초등학교가바로마을앞에위치하고있고미륵불상이있다.
이미륵불상은현신봉2리에서상현1리로들어가는입구산비탈에옛날부터서있었는데,이곳옛어른들의말에의하면원래는상현현청소재지로들어가는입구에세웠으므로하마비(下馬碑)라고전해지고있으며,현아(縣衙)가있었던곳이라하기도한다.하현(下縣)은상현리의남단아래쪽에위치하고있는마을로서현청소재지아랫동네에해단된다하여하현이라하였고,옛날부터특산물인감이맛이좋기로이름이나있다.
신봉리(新鳳里)
1914년니동,솔의리,봉정리,신봉리,당전리를합하여신봉리라했으며,봉황산이드높아신봉이라했다고하며,화서면의중심지이며,1948년신봉1리와2리로분리되었다가1988년1월1일1리,2리,3리로다시분리되었다.뒷마는1914년경에화령장터뒤편에새로생긴마을이며,장터뒤편에위치한마을이라하여뒷마로통칭하게되었다.이마을사람들중에서는서울상주등지로소장사하는사람들이많았다하여지금도부촌을이루고있다.
봉정,봉정리(鳳亭里),옛화령장북쪽에있는마을로화령현때부터성내에봉정이라는문루가있었다고하며,그때마을에는주색가가많아서상주,보은간을왕래하는사람들이많이드나들었다하여봉정이라불렀다한다.면사무소,경찰지구대,초등학교,우체국,농협이모두이곳에있다.신시장(新市場),옛화령장남쪽에새로운마을이생겨본래의화령장터보다규모도컸으며,시장이성시를이루게되자그뒤부터신시장이라부르게되었다한다.
수청거리,화령장동쪽에있는마을로옛날화령현당시에많은관기가가있었고여기에서나오는많은가구들이각지방으로팔려나가기도했다한다.기가(妓家)가있는곳이라하여수청거리라부르게되었다.재왕골,솔의(率儀),엣화령현때대장군이이마을에서작전을함에있어군사를솔선수범하였다고하여마을이름을솔의라부르고있다고도하고,또,진주정씨재실이있어서재궁마,재궁동으로불리다가변음되어재앙골,재왕골이라고도불린다고한다.
또마을앞에노송이많이있어서솔리라하던것이변음이되어솔의라한다고도한다.1978년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마을의옛모습은찾아볼수없게변하였고예부터곡부공씨(曲阜孔氏)의집성촌이었다.진다리(泥洞),화령현때가설된긴다리가있었다하여진다리라불린다고도하고,또땅이온통진흙으로되어있어비만오면너무질기때문에진다리라고불린다고도한다.
율림리(栗林里)
본래화령현의지역이었고,후에상주군화서면의지역인데,1914년부수리,율현리,장림리,옛화북면서산리를합쳐율현과장림으이름을따서율림리라했다.밤고개,밤현,율현(栗縣),조선시대성종조에이한춘이라는선비가임란후1600년경에낙향하여이마을을개척하였다하며,그당시마을주위에밤나무가무성하여마을이름을율현(栗縣)이라고부르게된것이근원이라고한다.
맨발,수부(守富),밤고개서쪽에있는마을로앞에숲이있었다고하며,처음에는마을이름을맨발이라불러왔는데,지금으로부터300여년전에어떤스님이마을이름을수부라고하면부(富)하게된다고하여맨발이라고불러오던것을수부(守富)라고고쳐부르게되었다.
정림(長林),밤고개북쪽에있는마을로조선조에는이마을에역촌이있었으며,말15두에역원7명이종사하였다고한다.임진왜란때선산군수로있던윤태선이라는이가보은회인싸움에서전사하자그의아들인경파(景坡)라는이가이곳에정착하였다하며소나무가마을앞뒤에길게숲을이루어마을이름을장림(長林)이라고부르게되었다.
지산리(池山里)
원래화령현지역이었고,후에상주군화서면의지역이다.못안쪽이되기때문에못안,모산또는제내(堤內),지산이라고했다.1914년외항리를합쳐서지산리라했다.모산,못안,지산의,제내(堤內),300여년전옛날에는이지산마을일대가큰못이었다고하는데.못이없어지고사람들이정착하여농사를지으니토질이비옥하여큰부자가나서마을이름을지네(池內)혹은못안으로부르게되었는데,차츰변음되어모산으로굳어지게되었다한다.
원통암의옛터가있다.서당골,서중리,지산서쪽에있는데,옛날서당이있는마을이라하여서당골혹은서중리라고부르게되었다고하며,이서당골위쪽에있는마을을서상리라하고,또서당골아래쪽에있는마을을서하리라불렀다.한갓골,외항(外項),1890년경에사람들이모여들어못안바깥쪽에마을이형성되었는데못안의바깥목에해당하는마을이라하여외항이라고부르게되었다.
또한가골로부르는데,옛날한씨가많이살고있었다하여한가(韓家)골이라고도한다.이마을의위치는모산마을로부터남쪽으로700m떨어진곳에자리하고있으며,특산물로누에고치가많이생산되었다.청룡(靑龍),서당골서쪽에있는마을로1800년경부터이마을에어씨(魚氏)들이많이살았다.옛날이마을의자리가못이었을때,그못에청룡이살았다는전설이있어마을이름을청룡이라부르게되었다.또지형이좌청룡의위치에마을이있어불리게되었다고도한다.
셋터(新基),옛날못의터진쪽으로차츰길이생기면서부터사람들의내왕이많아졌고입구쪽에마을이생기니새로운마을이생겼다고하여새터(新基)라불리어지게되었다.이마을은축산과곶감으로잘알려져있다.
하송리(下松里)
상주군화서면의지역이고1914냔산성리,하달리,중달리,송천리일부를합하여하달과송천의이름을따서하송리라했으며,1948년하송1리,2리로분리되었다.청계(靑溪),송내북쪽에있는마을로청계산아래이다.하송리지역의가장상류인청게산기슭에위치하여골이깊고물이맑다하여옛날부터청계마을이라불러왔다.마을위쪽에청계사가있는데,현재는소규모의암자이나옛날엔이일대에절간이즐비하였다고한다.
송천(松川),하송리의중심부락으로옛날부터위쪽에있는청계산골짜기의물이모여흐르는냇가로내의서쪽마을을양지마,동쪽마을을음지마라한다.송림이웅창한곳에마을을이루었는대,마을사이를흐르는냇물엔언제나솔잎이가득떠서마을이름을송천이라하였다한다.200여년전선각자가있어이일대의감나무를많이심어산촌사림을부유하게하였다한다.
점마(店마),하송리송천동남쪽으로약2km지점에위치한마을로조선시대말부터토기굽는가마가괴산서이주해온최창규라는이에의해시작되었다.상주,보은등지에서흙을가져와소규모의공장으로광복후까지계속운영하였다하나지금은도요터가없어지고말았다.마을이름도옹기점이있는마을이라하여점마을이라한것이줄어서점마로굳어진것이라한다.
달래,달천(達川),점마마을남동쪽에있는마을로하송리남동쪽약500m아래에위치한마을인데,상류의청계,송내,점마등지에서내려오는여러갈래의심곡물이합류한뒤큰내에도달하는아름다운유역에이루어진마을이라하여달내라고불렀다.
세거리(三巨里),달래마을의남동쪽과금곡마을의북서쪽으로하송리달내남쪽약700여m아래에위치한마을이며남동쪽으로는상주문경남서쪽으로는화령,보은북쪽으로는화북,청주로가는갈림길이되므로세거라하였다.하며옛날엔교통의요지였으며.지금은외서면대전과예의로통하는또하나의길이열려네거리가되었다.이곳에는수령이500년이넘었다는큰느티나무가있는데,옛날에는이나무부근에서지방산물의교역이상하였다고전한다.
무고동(武古洞),청계암북동쪽안산골에있는마을로지금은사람이살지않고견훤왕의무기창터라고한다.중절리,청계북쪽에있는마을로절이있었는데,1950년한국전쟁으로없어졌다고한다.옥성(玉城),이마을지형이마치선비가옥대를두른것같으며옛날에는마을사람들중에서과거에급제를한사람이많이나왔고,풀년도자주들어살기좋은곳이라고하여옥성이라부르게되었다한다.
인경재,임정리,임정(林亭),옥성서남쪽에있는마을로조선세조때임씨문중의정자가있는마을이라하여임정이라부르게되었다고하고,또,옛날인종각이있어그종이울렸다는전설때문에인경재라고부르게되었다한다.
봉촌리(鳳村里)
본래부터화령현지역이었고후에상주군화서면지역으로되었다.1914년원통리,전리,교촌,봉강리,장촌리일부를합하여봉강과교촌의이름을따서봉촌리라하였다.교촌,.교촌리(校村里),이마을은1800년경부터봉강(鳳崗)서편에위치한마을로서마을안에서당이있다하여마을이름을교촌이라하였고,최씨와이씨들이많이모여살았으며,현재는봉강에포함되어있다.
참고자료/*지명총람(상주문화원,상주얼찾기회),
*지명유래(경북도교육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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