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령재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화령재/한국의고개를찾아서

-중화(中化)지역,그천년의싸움터-

지난겨울에는눈이많더니올봄에는비가잦다.곡우가가까워지면서봄비는청명한식에피어번성했던꽃잎을털어내고땅위의모든가지마다파릇파릇한새싹을틔워낸다.꽃필무렵의산천보다는아무래도잎날무렵의강산이좋다.사람에게도때로는꽃으로피어화려했던날들잠시지나가고온몸에새잎돋우어다시먼길로삶의행차에눈뜨는나이가있다.꽃이진자리의추억을무성한초록의잎새가덮어햇볕과뿌리의섭리를따라쉴새없이더운숨을토해낸다.살아가기위하여,생산의진통과노역을일과로어르면서무릇그시절에이르러비로소한목숨이된다.

봄비속에길을떠나보은으로갔다.보은의신라적이름은‘삼년산(三年山)’이다.고려에는‘보령(保齡,保令)’이라부르다가지금의이름을얻은것은조선태종6년(1406년)의일이다.태종은본래꿈이많은사람이라권좌에이르는동안쌓인업장이산을이루었다.한번은제손에죽은형제들이사뭇아른거려속리산법주사에시주하여천도재를올렸다.그무렵을지나면서보령이보은으로바뀌었다.핑계야우도의보령(保寧)땅과음이같다했지만어찌속내에끼친바없었으랴.세세생생,형제를죽인죄어디가서씻겠는가.막막하여대대로그땅에깃들이는자무릇보은(報恩)하라했으니살아지은죄의티끌하나라도그렇게덜고자했음이다.

속세를떠나지못하는산

보은에서5리어름이면상주길과속리산길이나뉜다.속리산(俗離山)은속세를떠나는산이아니다.이름하여산은결코속세를떠나지않는다.다만풍진사바가늘산을버리고어름더듬속세의경계를짓는다.속리산은항용속세에머무는데정작속세는유별하여자꾸만속리산을떠난다.산문이란본래오는이가로막지않고가는이부여잡지않는곳.산이또한거기있기위하여오래전아주먼곳을떠나오고,거기있으되늘어디론가마음실려가고있음을아는까닭이다.속세에머물되속되지않고,속되지않되늘속세에머무는산.그리하여지금은헐값에쓰이는저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는말도알고보면흔쾌히속리산을닮은말이다.

백두대간은속리산을지나면서비로소한강의물과헤어지니그곳이바로속리산천왕봉(1058m)이다.문장대(1033m)에서천왕봉으로달리는속리산연봉의동쪽은낙동강이요,서쪽법주사로흘러내린골물은장차아름다운달래강이되어북쪽을거슬러오르다가충주탄금대아래서남한강에몸을섞는다.천왕봉남쪽의골물은그로부터보은과청산을지나금강의대청호로흘러드니그여울(금강)과달래강(남한강)을가르는산줄기가바로천왕봉에서말티고개를건너청주의산성고개,청안의질마재,괴산의모래재,음성의행티고개를지나안성의칠현산(516m)에이르는한남금북정맥이다.

속리산천왕봉은세갈래의큰물(한강,금강,낙동강)을거느리는산이다.그런데이말을속리산문장대로바꾸면금세틀린다.옛글역시모두이꼭지점을속리산문장대로기록했던까닭에지금도자주일어나는잘못이지만문장대는크게보아한강과낙동강을나누는백두대간의봉우리일뿐이다.천왕봉을지난백두대간은형제봉(803m)과봉황산(741m)을지나다시큰산황악(1111m)에닿을때까지그저막무가내로몸을낮추어화령(320m)을만들고추풍령(200m)을이루며겨우겨우그명맥을잇는다.

논두렁과밭두렁의백두대간


소백산맥은삼국의발전기에자연의요새로방어선을구축했을뿐아니라전초기지였다.(상주시지,66쪽)
삼국시대의역사를다루는글이면흔히만나는대목이다.고쳐말하자면옛날의백두대간은언제나자연의국경이었고,국경이었으므로당연히싸움이그치지않는격전장이었다는뜻이다.미루어보면,저용맹스런고구려로부터신라를보호해준것역시백두대간이었고,백제와신라의충돌을지리적으로중재하던것또한백두대간이었다.결코쉽게넘을수없는천연의성(城).어쩌다가애써넘어가보아도후방의지원이쉽지않은탓에이내다시쫓겨넘어와야만했던것이바로그옛날의백두대간이다.

산천의전통은유구하여대대로강원과경상이그로부터갈리고,충청과경상,전라와경상이그로부터나뉘었다.오늘날의도계(道界)또한변함없이백두대간을따라마루금을그었으니이는하루아침에이루어진경계가아닌탓이다.다만지도를펴놓고백두대간의마루금을긋다보면몇군데대간과도계가어긋나는곳이있다.경북봉화군춘양면의우구치마을은강원으로대간의도래기재를넘어갔고,영주시단산면마락리와부석면남대리는충북으로각각대간의고치령과마구령을넘어갔다.상주화령일대의무려6개의면은대간을넘어깊숙이충북땅으로들어섰으며전북남원의운봉읍을비롯한3개의면은경남으로대간의여원재를넘어팔량치에서도계를이룬다.

우구치나마락리,남대리는채한마을도못되는산간이니다만제쳐놓고,대규모로대간의경계를침범한화령과여원재일대는모두백두대간가운데가장표고가낮은곳이라는공통점을갖는다.어떤곳은논두렁밭두렁으로근근히대간의명맥을잇는곳도있으니말그대로비산비야(非山非野)의형국이다.백두대간본연의임무인물가름은여전하여변함없이그논두렁밭두렁을경계로강과강이나뉘지만바야흐로지리적인경계로서지방을구분짓는산줄기의기세는볼품없이초라하다.그두곳은당연히신라와백제를이어주는오작교인동시에치열한싸움터였다.

백두대간을넘어온경상도여섯고을

속리산갈림길에서상주길로30리쯤이면충북과경북이도계를이루는적암이다.풍수에서십승지의하나로꼽는명당을품었다는구병산(876m)아래그저평평한들판위에서엉거주춤도계가나뉜다.그로부터백두대간의화령까지는30리길이다.속리산형제봉에서백두대간을벗어난도계는적암을지나고백화산(933m)을휘돌아추풍령위쪽국수봉(684m)에이르러야다시백두대간과만난다.백두대간의경계를넘어온그경상도땅여섯고을을두고생겨난말이바로중화지역이다.

화서,화북,화동,화남의4개면은본래의화령현이요,모동면과모서면은옛날의중모현이니중화란바로상주목을따르던중모현과화령현을뭉뚱그린이름이다.짐작컨대,오늘날까지중화지역이경상도땅으로뿌리를벋은것은아마도신라와백제의마지막국경에서비롯된전통이아닐까하는생각이다.남원의팔량치일대가비록백두대간의동쪽이지만전라도땅으로굳어진연유도비슷한내력이숨었을터이다.낮은산줄기로이어지는그두곳은싸움의결과에따라쉴새없이국경이바뀌었을것이다.그두곳은백두대간이천연의국경역할을잃었기때문에힘이센어느한쪽이상대의영토깊숙이쳐들어갈수있는유일한길목이었다.

물론이는사람이걷거나아니면기껏말이나타던시절의이야기다.그러나첨단문명의시대에도종류는좀다르지만비슷한사연으로말미암아시작된싸움이있었다.얼마전,문장대용화온천의개발을둘러싸고충북과경북이서로팽팽하게맞섰던사건이그것이다.용화는바로화북면의마을이니경상도땅이지만백두대간을넘어온탓에그물은달래강을거쳐남한강으로흘러드는한강수계이다.돈벌이는경상도가하지만수질오염의대가는고스란히충북의몫이다.결국경북쪽의개발포기로단락을맺은이사건은지방의경계가백두대간을따르지않았던탓에일어난분쟁이었다.

중화의중심화령(化寧)5일장


화서면사무소가있는화령은고개들머리에놓인작은산읍이다.신라가답달비(達匕)라하다가화령군(化寧郡)으로고친것을훗날현으로바꾸어상주목아래두었다.
택리지에는,“상주서쪽은화령(火嶺->(化寧))이요,고개서쪽은충청도보은인데,화령은소재노수(1515-1590)의고향”이라하였다.오늘날에는25번국도가지나지만딱히들어내세울만한물산이나풍습이없는탓에여전히한적한시골을면치못한곳이다.굳이들자면,고려시대부터내려왔다는화령장터가아직도소문난닷새장으로유명하다.

화서면청계마을에후백제왕견훤을섬기는산신당이있다하여찾아갔다가마을뒷산에버려진절터의부도와견훤의대궐터라부르는산성을구경하느라남은해가다저물었다.다음날아침에는화령장날인데다시봄비가내렸다.가뜩이나시들해져가는시골장터의행색이봄비속에더욱초라하다.기껏할머니몇이봄나물을펴놓고앉아담배를빼어물고,영동에서왔다는젊은묘목상은바야흐로활짝핀옥매화를바라보며그저심심하다.장터모퉁이에소쿠리,키,치룽같은목물을쌓아둔가게로가보니아예문을반쯤만열었는데손님은물론주인도안보인다.

화령장터에서재성약국을운영하는한규정(35)은나의동향이자고등학교를함께다닌오랜벗이다.본래모두궁벽한산골에서자랐지만자라서도대처보다는끝내산읍이좋아이곳에터를잡은지벌써칠팔년은지났다.벗이소개하여늦은아침상을차려준태봉식당의유점순(84)할머니는아랫녘거창이고향이다.9살에중풍을맞았다는남편에게속아시집왔다는할머니의지난한평생도돌아보면온통억새풀일렁이는날들이었다.

함창의물레공장을다니면서시집의열식구살림을꾸려내고한때는김설매라는서울기생의집에서침모를살다가변두리어느방직회사에도다녔다.둘째아들과함께사는할머니는요즘그저텔레비전만본다고했다.올해에는서울막내아들네에있던주민등록을고향으로옮겼다.보성고보를다니다가북으로간큰아들이늘그막에더욱간절하여,행여살았으면에미를찾지않겠냐고자꾸만눈주름을훔쳤다.

송천이발원하는봉황산

유점순할머니의이야기에붙들려아침먹기로들어간식당을점심에야나섰다.화령장터를빠져나오면이내화령고갯길이시작되지만본래한없이키를낮춘고개이니여느길과별반다를게없다.마을길이끝나는산모롱이에는크고작은비석들이즐비하고고려초엽의유물로보이는석조여래입상이서있다.비석들은유달리치열했다는한국전쟁의화령전투가남긴흔적이대부분이고,몇은여느고을마다흔한관리들의행적이다.여래상은풍상의세월을견디느라닳고닳았는데광배만은아직도번듯하다.다만불상을보호하기위하여울타리로두른쇠창살이불상을너무바투가두어답답하다.아마도이웃상봉마을에있던여래상을도둑맞은뒤에그리한모양이다.

화령고갯마루의화령정(火嶺亭)은비록예스러운빛은없으나고갯길의내력을친절히적어편액대신으로걸었다.아득하게는성읍국가시절부터삼국의싸움,고려와조선을거쳐오늘날에이르기까지화령에쌓인이야기를알리는데공들인흔적이역력하다.뒤를돌아보니백두대간이빚어올린봉황산이바투어여쁘다.중종의태를묻었다는전설에힘입어마을에서태봉산(胎封山)이라부르는봉황산은송천을발원시키는화령의진산(鎭山)이다.

『증보문헌비고』의기록에는“송천은상주의구봉산(九峯山)에서발원하여화령(化寧)과중모현을지나황간현에이른다”고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속리산은봉우리아홉이뾰족하게일어섰기때문에구봉(峰)산이라한다"는기록과함께고을동쪽43리에또다른구봉(九峯)산이있다고적었다.그리고조선광문회본「산경표」(1913)에는속리산,구봉(峯)산,봉황산이모두함께나란히나온다.백두대간의산줄기가운데『증보문헌비고』의기록,즉화령과중모현을지나황간현에이르는송천의발원으로알맞은산은오로지봉황산뿐이다.『증보문헌비고』의기록이틀리지않으려면구봉산을봉황산으로바꾸거나혹은구봉산이곧봉황산이어야만한다.그러나「산경표」는분명히봉황산과구봉산을별개의산으로다루고있다.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의기록에따르자면구봉(峯)산은구봉(峰)산(=속리산)과도별개의산이다.

기록을종합하여볼때,구봉산은거리와이름과산세로보아관기의구병산일가능성이가장높다.정리하여말하자면,『증보문헌비고』의기록은송천이발원하는봉황산을구병산으로착각한것이다.물줄기의발원을착각하는일은옛날에도흔히있었다.구병산은다만백두대간에서갈라져나가보청천상류의골물에둘러쌓인외딴봉우리에지나지않는다.백두대간의봉우리도아니므로숙제는역시「산경표」에도남는다.

중화지역의산성을찾아서

화령길은휘적휘적몇걸음으로그저수월하게넘는고개이다.옛길로상주의낙서역(洛西驛)에서화령의장림역(長林驛)까지는느린행보라도채한나절길이못되는거리이다.그러나백두대간은엄연하여화령을넘어야만비로소진짜영남땅에닿는다.꽃피고잎나는산빛이아주좋아일삼아오르락내리락하다보니그야트막한고개를경계로서쪽(화령)은아직논물도안댔는데동쪽(낙서)은벌써무논질이한창이다.신기한일이다.머잖아산천의수목들도다투어본색을드러내고들판가득어린곡식들은뜨거운대지의노래를부르리라.길위의나그네또한서둘러고향으로돌아가묵은텃밭에씨앗을뿌려야하는철이다.

화령장터에서옛중모현의모서와모동으로가는길은남쪽이다.그길로5리남짓한곳에있는봉촌리의앞재마을은곧전성(前城)이바뀐말이다.화령에서는물어도도무지아는사람이없더니앞재마을에와비로소산성이있는동산을일러주는이를만났다.산불이라도입었는지비루먹은듯수목이뭉텅빠져나간동산마루에이미다허물어진성터가있었다.70년대까지도건재했다는데새마을사업으로그꼴이됐단다.옛이름을모르니훗날에지어부르기를그저화령고성이라했다.중부내륙지방의산성이대부분그렇듯화령고성에도오누이의성쌓기전설이전해온다.다만내기에진아들이자결한다는결말이좀특이하다.

앞재마을에서산구비하나를돌아서면장림역이있던율림리다.산그늘에여럿이앉아못자리판에볍씨를넣고있는농부들에게들으니장림에가서역촌이라부르면본토박이파평윤씨들이화를낸다며가지말란다.말본새가이미타성바치의설움을여러번겪은눈치라고향이어디냐고슬쩍물었더니그저껄껄웃고만다.꼭가볼일도아닌터라그들이들려준얘기를챙겨들고모서면을지나다보니도안역(道安驛)이있었던역촌마을들머리에는자랑스레큰글씨로역마루라써놓았다.그렇다고또한내려살펴볼일도아니어서내처저만치보이는백화산을향하여갔다.

백화산은백두대간의봉황산에서서쪽으로갈라진산줄기가천택산팔음산을지나마지막으로솟아오른봉우리다.봉황산에서발원한송천이백화산의끝자락을마무리하면서아름다운옛절반야사를강가에세워두고명승월류봉을지나난계박연의사당이있는영동의고당리로금강에들어간다.송천과백화산이그림처럼어우러진곳에는아득한벼랑끝의백옥정이아름답고,백옥정아래송천을건너백화산골짜기를바라보면유명한금돌성(今突城)의들머리다.금돌성은나당의군대가백제를협공할적에무열왕이태자(문무왕)와김유신을거느리고행궁(行宮)을삼았던산성이다.금돌성에머물던무열왕은사비성의의자왕이항복하자이곳에서곧백제로달려갔다.

백두대간을대신하는오도치

금돌성을오르기로작정하고신발끈을조이는데앳된산불감시원이길을막는다.굳이산불이아니라도가고오고얼추대여섯시간은걸린다며너무늦었단다.별수없이백화산산행을훗날로미루고나오는길에황희(1363-1452)의옥동서원을기웃거렸다.점심을얻어먹은소재노수신의봉산서원과는비교가안될만큼위풍이당당하다.오죽했으면대원군이철폐령을내렸으랴싶어본래서원구경을좋아하지않는터이지만,소재나방촌이모두청렴으로이름을남겼다니한번둘러나보자는생각이었다.또한앞서만인지상의음택치고는궁색하리만치단촐한소재의무덤을보며고개를끄덕인바도있었다.

오도치(吾道峙)는옥동서원이있는수봉리에서충북의황간으로넘는준령이다.백두대간의국수봉에서학무산과지장산으로갈래친산줄기가송천에가로막혀마지막으로일으켜세운헌수봉의어깨를타고넘는다.지금은경북사람들이수봉리의이름을빌어수봉재란푯돌을세웠지만본래이름은오도치다.황간지방에서부르는문바위고개는마루에있는문바위를근거로하는옛이름이고,오도치는우암송시열의전설에서비롯되었으니조선시대의이름이다.백두대간을대신하여도계를이룬오도치를넘어서면이제그로부터의모든길은한같이추풍령을바라본다.

『함께사는길』(98/5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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