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자신의묘지에서평생을산다.탯자리가곧묏자리다.선(禪)이인류에게‘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말을선물하기위해수천년동안면벽(面壁)을했고(지금도역시하고있고),엄청난양의종이와먹을소비했다는사실은참가련한일이다.나무는,어린나무,젊은나무,늙은나무,할것없이자신이죽을자리에당당히삶을세우고,보태고뺄것도없이자신의온삶그대로를묘비명으로새긴다.
어쩌면막행막식(莫行莫食)을일삼는괴각승들의행태는‘걸림없는삶의몸짓’이아니라,생사의경계를지우려는처절한몸부림인지도모르겠다.태어나면서부터생사일여의경지를살아가는나무를보고서절망한나머지,그저‘죽는날까지꾸역꾸역살아갈수밖에없는삶’을위악적으로위로하는일은아닐는지모르겠다.사람이란타이틀을단목숨이슬픈이유는인류의수만큼이나많겠지만,그중에서가장큰이유는생사의불화(不和)가아닌가싶다.
삶에종속된죽음은오만방자를나몰라라하고,죽음에종속된삶은당장의하루하루를물에빠진자의지푸라기로만들어버린다.
좀엉뚱한비유를들자면,경제파탄으로세상을수상하게해놓은세계최강국미국이오바마라는사람을새대통령으로뽑아놓고환희하는것도비슷하다.인류의지난역사가그랬다.두번에걸친세계대전을겪고서세계인권선언을내놨지만아직도그것의핵심가치인자유,평등,박애는아주우아한종이조각에적힌글자에지나지않는다.사실인류의역사는뿌리부정하기혹은뿌리넘어서기가아니었던가.인류의뿌리를자연으로본다면말이다.
아파트단지안으로노란색유치원차가들어선다.문이열리고아이가폴짝뛰어내린다.아이를기다려주는사람은아무도없다.팔랑거리며잘도제집을찾아간다.아이가지나간자리에는노란은행잎이돋아나있다.내가좋아하는늦가을오후의풍경이다.내가사는아파트는이십년도더된복도식이어서집밖의풍경이무시로집안으로들락거린다.이웃들이사는모습이나계절의변화를시시각각으로읽을수있다.
나는그것을아주즐긴다.유치원아이들도대부분낯익다.지난봄그아이들은때맞춰마중나온엄마와함께집으로돌아가곤했다.지금은혼자서도잘해낼만큼여물었다.참보기에좋다.그아이들의발자국같은낙엽에서나는강렬한생명의기운을느낀다.조락(凋落)이라는말은영마뜩치않다.
‘
내친김에감히선가(禪家)의소식에도전해본다.
다만나는나의번뇌가무성할대로무성해져서어느때,어느생에서건금풍(金風)을만날수있기를희망할뿐이다.나는내장산의가을단풍나무보다도야산의낙엽송(일본잎갈나무)단풍을더좋아한다.출신성분때문에많은사람들로부터천대를받기도하지만나는좋다.저물어가는가을한때까무룩자신을사르는열정앞에서나는몽롱해진다.머릿속이하얗게비워지는느낌마저든다.
한순간에훌훌털어버리는모습도좋다.하여나의번뇌도세상에무해하게마구타올랐으면좋겠다.그렇지만나는안다.감당하기힘든꿈을꾸고있다는것을말이다.
겨울이가을의무덤이아니라면,낙엽도나무의주검은아닐것이다.그런데왜사람들은낙엽에서쇠락과소멸의이미지를읽는것일까.‘마음’때문이아닐까싶다.더욱이이마음이란놈은늘몸에착달라붙어서온갖투정을다부린다.사람들은왜나무처럼살아가지못하는걸까?느티나무는겨울에그모습이더빛난다.멀리서보는오래된마을동구의겨울느티나무는커다란한장의잎같다.
나무에게잎은달려있건떨어졌건한몸이라고말하고있다.사람의몸에서몸짓을분리할수없는것처럼.당연히몸과몸짓은서걱거리는법이없다.그런데왜마음과몸은시도때도없이불화할까.몸떨어지면마음도떨어진다고했다.그렇다면‘마음다스리기’보다‘몸다스리기’가더중요한일이아닐까?상처가예뻐서감싸는게아니라몸을위해서그렇게하듯이.
나뭇잎은나무의요구에순응한다.
여름날잎의요구에몸통이그러했듯이.낙엽은그견고한조응의결정체다.
생사일여의경지는묻지도탐하지도말라.마음과몸이서로넘치는요구를하지않으면언젠가그대도금풍(金風)을만나체로(體露)할수있을터인즉,조용히기다려라.올겨울엔제대로몸두는공부를해야할것같다.왕유(중국당나라·699-759)의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