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강 과 문 화 [9] *-

한강의나루

서울에서근대화이전에는지방으로이동하기위해서모든주민들은한강을건너야하기때문에배를이용해야만하였다.오늘날은다리가건설되어자유롭게왕래할수있으나,조선시대에는반드시배를통해서만이동할수있었기때문에한강의여러곳에나루가생겨나게되었다.당시나루를설치한근본적인목적은사람의왕래를위한교통로,물자의운반을위한수송로,국가의안녕과질서를위한초소로서의기능에있다.

조선시대때주요간선도로가통과해야하는한강에는일찍부터광나루(廣津),삼밭나루(三田渡),서빙고나루(西氷庫津),동작나루(銅雀津),노들나루(露梁津),삼개나루(麻浦津),서강나루(西江津),양화나루(楊花津)등이있었다.특히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양화나루는한강의5대나루로손꼽혀일찍부터각종물품과사람들의집합장소로서유명하였다.

이들나루의도선장인나루터를오가며사람과물자를건네주는나루배는한강양쪽의통로를이어주는최대의편의시설이자유일한교통로의역할을담당하였다.한강의나룻배는1970년대이후강위에많은다리가개통됨에따라점차그자취를감추어역사의뒤안길로스러져갔다.그러나한가지주목할만한사실은오늘날많은다리들이가설되면서나루가사라졌지만가설된다리의위치가대부분조선시대나루가있었던곳이라는점이다.

즉광나루에는광진교가,서빙고나루에는반포대교가,동작나루에는동작대교가,흑석진에는한강대교가,노량진에는한강철교가,용산진에는원효대교가,마포나루에는마포대교가,서강나루에는서강대교가,양화나루에는양화대교와성산대교가,공암나루에는행주대교가각각가설되어있는것이이를증명하고있다.이는과거와현재모두가한강의지리적잇점과남북을연결하는교통로의역할이가장많은곳에다리와나루를설치하였다는공통점을가지고있기때문으로생각된다.

1)광나루(廣津)

조선시대서울에서중랑천을건너이곳광나루에서배를타고한강을건넌후광주를거쳐남쪽지방으로왕래할수있었다.따라서이나루는강원도와남쪽지방으로가는사람들이주로이용하던곳이다.오늘날은그자취를찾을수없으나현재의광진교가놓여져있는한강북쪽이다.광진은처음에중급의나루였으나곧승격하여태종때에별감이배치될만큼요충지로발전되었다.

조선시대한강과남한강및북한강유역을관리하면서수운을담당하고있던곳이좌도수참(左道水站)이며.좌도수참의별감이이곳광나루에상주하면서한강을왕래하는사람들을기찰하고한강의조운을관장하였다.세종때삼밭나루가개설되면서광나루의기능이약화되었으며,조선후기에는송파나루가번성하여광나루-삼밭나루-송파나루순으로발전하였다.

2)삼밭나루(三田渡)

숯내(炭川)와한강이합류하는지점이조선시대삼밭나루가위치한곳이다.이나루는조선시대세종이한강을건너대모산기슭에있는아버지태종의헌릉을참배하러가는길목이었을뿐만아니라,경기도여주에있는영릉과서울시강남구에있는선릉을참배하기위해임금이종종건너던나루이다.중종31년(1536)에는배를이어서배다리(舟橋)를가설하기도하였던곳이다.또한한강남쪽의요새지인광주부로직접통하는제일빠른길목이었다.

도성에서왕십리와살곶이다리를거쳐삼밭나루를건너곧바로광주와이천을거쳐충주로나아가고,이천에서여주,원주,강릉등지로나아갈수있었기때문에많은사람들이붐볐던곳이다.조선후기에는삼밭나루를지나광주로나아가는길목에병자호란때청나라에게굴욕의패배를당하고세운삼전도비가있어많은사람들이이길목을이용하기보다는바로옆에새로이조성된송파나루를주로이용하기시작하였다.따라서이나루는조선전기에주로이용하였던나루터이다.

3)송파나루(松坡津)

석촌호수부근에위치했던나루로서조선초기부터있었던나루는아니다.조선후기병자호란이후부터삼밭나루대신에많은사람들이이곳을이용하기시작하였다.송파라는이름은당초에광주군동부면선리(船里)에있던마을이었으나인조25년(1647)장마로인해마을이떠내려가는피해를당한이후마을사람들이지금의석촌호수일대로자리를옮겨와살면서나루를만들고송파라는지명을사용하였다고한다.

이나루는삼밭나루를대신하면서광주,이천으로통하는길목의역할을담당하였다.조선후기상업의발달과경강상인의활발한활동에힘입어송파장(松坡場)이형성되었다.이시장은한강상류를오르내리는뱃길과육로를따라강원도와충청도일대에서올라오는곡식과목재,명주,솜,삼,과일등각종토산물들이집결되는곳으로늘물건을파는상인들과물건을사고자하는사람들로붐비던장소였다.

뿐만아니라지역적으로광주부에소속되어있었기때문에도성에서일부상인들에게특권을준이른바금난전권(禁亂廛權)에저촉되지않고자유로운거래를할수있었다.또한지리적으로도성과가까우며사방으로통행할수있는교통의요지였기때문에송파장이크게번성할수있었다.그리고송파장이번성하였기때문에이일대를근거로유행하던민속놀이인송파산대놀이가유명해지기도하였다.이나루에는9척의진선(津船)이있어통행의편의를도모하였다.

4)뚝섬나루(霧島津)

현재영동대교가지나가는뚝섬선착장부근에있었던나루터로서일명독백(禿白)이라하였다.조선효종때한강을이용해서목재땔감이거래되었기때문에국가에서는이곳에세금을거두어들이는수세소(收稅所)를설치하여운영했다.조선후기한강상류에서목재를물길로운반하였는데,나라에서는공사(公私)를막론하고1/10세(稅)를받았다.일재강점기때는이곳주위에재목이나땔감을전문으로취급하는점포만도40여호가넘었다고한다.

5)한강진나루(漢江鎭津)

조선시대한강나루의풍경은조선시대제1의도선장(渡船場)으로옛날에는’한강도(漢江渡)라고하였으며,신라때는’북독(北瀆)이라하였다.고려시대에는’사평도(沙平渡)’또는’사리진(沙里津)’이라고하여중요한나룻터로지목되었으며,서울에서용산,충주로통하는큰길의요충지였다.예전에는서울의남산남쪽기슭인지금의한남동앞의강을한강이라하였고,이곳의나루를한강도라하였다.

오늘날한강의의미는일반적으로시점에서부터물줄기의끝까지로인식되고있지만조선시대에는이곳을한강이라하였다.도성에서남소문을나서면바로한남동의한강마을이었기때문에수도방위상매우중요한곳으로일찍부터별감을파견하여사람들의통행을기찰하고통행의편의를도모하였다.조선후기에는군사적으로도중요한지점이어서이곳에진(鎭)을설치하여관리하였다.

6)노들나루(露梁津)


노량진에서부터양화진까지는버드나무가많았으며특히노량진에는백로들이많이날아와’노들’이라고불리기도하였다.1900년한강최초의다리인한강철교가이곳에건설되었다.이길목은시흥,수원은물론충청도전라도로통하는대로로서중요성을인정받았다.지금은큰다리가놓이고노량나루가있던지점에는노량진수원지가자리잡고있어옛정취를찾아볼수없다.상류의광나루와함께별감이배치되어서울을출입하는사람들을살피게하고군사를주둔시켰던나루로서사람들의왕래가많았던곳이다.일명’노도(路渡,露渡)”노량진(露梁津)’나들나루라불리었으며,연산군때는이곳의나루만을통행하도록하고나머지한강의모든나루를봉쇄하기도하였다.

7)마포나루(麻浦津)

도성서쪽10리지점에있었던나루로서일명삼개나루라불렀다.오늘날마포대교북쪽방면으로반대쪽의여의도는예전에백사장이었다.백사장을지나면시흥을거쳐수원으로가는길이된다.도선장에는주로상선들이운집하였으며,나룻배도사선(私船)중심이엇다.옛부너마포나루에는새우젖을파는사람들이많아마포세우젖장사라는애칭이오늘까지도많은사람들에게전해지고있다.

8)양화나루(楊花津)

서울시마포구합정동지역의한강북안에있었던나루터이다.’양화도(楊花渡)’라고도하였으며서울에서양천을지나강화로가는조선시대주요간선도로상에위치하였던교통의요충지였다.조선초기바닷물이용산까지밀려와한때는용산이으뜸가는나루였으나염창의모래언덕이조수의침입을받아허물어지고점차한강의수위가낮아지면서큰배가용산까지직접못들어오자양화진이요충이되어크게번창하였다고전해진다.

이나루는경상.전라,충청,경기도에서올라오는곡물을서강광흥창까지운반하는조운항구로서농산물의재분배를담당하는중요한지역이었다.고려이래로양천,강화를가려면반드시이곳양화나루를건너야했으며,조선영조이후에는송파진(松坡鎭),한강진(漢江鎭)과함께한강의삼대관방으로요충을이루었다.따라서군사적으로도중요한기능을담당하고있어일찍이어영청에소속되어10여척의배를가지고순시하였으며,진을구축하여관리들이파견되어있었던곳이다.

이지역은한강가운데서도가장경치가아름답고정자가많았던곳인반면,개화기때개화사상의선각자로널리알려진김옥균(金玉均)이처형된곳이기도하고,천주교가처음우리나라에유입될때많은신자들이처형된장소로서역사적으로유서가깊은곳이다.오늘날이곳에는양화진순교자기념관이절두산에세워져있어그영령들을기리고있다.

9)공암나루(孔岩津)

공암나루는현재의강서구개화동한강남쪽지역으로한강변의나루터중서울시계내에서는가장아래쪽에위치한나루로서강화도방향으로가는사람들이주로이용했다.강건너에는고양시가보이고광주암이라고부르는바위섬이물가운데있어기이한풍치를이루었다고한다.나루의크기가작아양화나루아래예속되어있었다.옛양천읍(강서구가양동)의진산인궁산에서한강을내려다보면동쪽으로는공암산이있고,그산아래물가모래밭에는공암(孔岩)이라는암굴(岩窟)이있다.공암나루에배가드나들던모습은사라졌지만광주바위를중심으로조성된구암공원이인접해있어문화적명소가되어있다.

-출처/’한강의어제와오늘’서울시사편찬위원회발간,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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