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崇禮門)
‘예(禮)’는남쪽에해당되므로문의이름에’예(禮)’자가붙었다.
숭례문의현판은태종의큰아들양녕대군의글씨로도유명하다.
물론세종의셋째아들이자조선의명필로이름을떨쳤던안평대군의글씨라는주장도있다.
이렇게만든이유에는다음과같은이야기가전해온다.
숭례문의이름에들어있는’예(禮)’는오행중에서’화(火)’에해당되는데,
서울의남쪽관악산(서울의외사산(外四山)중남산에해당된다.)의모습이불꽃모양이아닌가?
거기에가까이있는목멱산(남산의옛이름)에는불에잘타는나무(木)이들어있으니….
이에관악산의화기(火氣)를막기위해서글씨를세로로길게늘어뜨려성문밑을막고누르면
화기가들어오지못할것이란믿음때문이었다고한다.
이래저래불과는특별한인연이있는대문이아닌가생각된다.
‘훈민정음’과같은자랑스런문화재가있음에도성문을국보1호로지정한이유때문이었다.어떤이들은우리나라의국보가처음지정된것이일제때인데,일제가과거임진왜란때고니시군이한양에처음입성한것이숭례문이었기때문에이것을1호로지정했다는설도있으나,옛한양의대문중에서도남대문인숭례문이정문이었기때문일것이라는설이더힘을얻고있다.
흥인지문은서울성곽동쪽문으로,조선태조7년(1398)에완성하였다가단종원년(1453)에고쳐지었고,고종6년(1869)에새로지은것이지금에이르렀다.
태종13년(1413)에최양선이주장한’백악산동령과서령은경복궁의양팔에해당하므로
여기에문을내어서는안되다’는의견에따라,창의문(자하문)과함께폐쇄하고
길에소나무를심어사람들의통행을금하였다고한다.
숙정문(肅靖門)으로개칭되어중종(中宗)이후의
또한,도성의서쪽에있다하여서성이라하였으며,겹성으로도불려졌다. 탕춘대성능선길은완만하며쉽게오를수있는오솔길로등산을겸한역사탐방로가된다. 탕춘대성에오르려면세검정상명대학교와구기터널·홍은동에서시작하면성관에쉽게접근할수있다.
오간수문(五間水門),탕춘대성(蕩春臺城)을건립하였다.
광희문(光熙門)과함께시신을성밖으로운반하던통로로사용되었고,
궁궐에서죄를지은사람들이이문을통해도성밖으로쫓겨났다고한다.
지금은사진을통해서만그모습을대강알수있을뿐이다.
보신각은서울특별시종로구종로2가에있는종각이름이다.
조선시대한양에종을처음건것은1398년(태조7)으로,경기도광주에서주조한종을청운교서쪽종루에걸었다.1413년(태종13)에종루를통운교(종로네거리)로옮기고1458년(세조4)에는새로대종을주조하여달았으나임진왜란으로종루는소실되고종도파괴되었다.
그후1619년(광해군11)에종각을다시짓고종을걸었는데이때세운종각은임진왜란전의2층종루가아니고1층종각이었으며여기에건종은명례동고개에있었던것을옮겨왔다고한다.
그후조선후기까지4차례나화재와중건이있다가1895년(고종32)에종각에’보신각’이란현액이걸린이후종도보신각종이라부르게되었다.6·25전쟁으로종각이파손된것을1953년중건하였다가1980년다시2층종루로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