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仁王山,338m)은 한북정맥도봉산우이령에서남쪽으로갈라져나온산줄기(삼각산보현봉-형제봉-북악-자하문-인왕-무악재-안산으로이어지는산등성이)에솟은산으로,서울종로구(鍾路區)무악동(毋岳洞)·사직동(社稷洞)·누상동(樓上洞)·옥인동(玉仁洞)·부암동(付巖洞)과서대문구(西大門區)홍제동(弘濟洞)에걸쳐있다.이산에올라서면경복궁과도성안이한눈에보인다.이산곳곳에선바위·코끼리바위·닭바위·기차바위등의바위들이흩어져있다.
선바위[禪巖]와그둘레 선바위쪽성곽길 인왕산의봄꽃 인왕산정상 정상에서바라본경복궁 정상과그언저리에서바라본인왕산자락과도성(都城) 기차바위 ▲인왕산을되돌아보며
옛사람의발자취 조선태조때한양천도와관련하여무학대사는 선바위를도성안에넣자하였고정도전은성밖에두자고하였는데,’선바위를도성안에두면불교가성하고,성밖에두면유교가흥할것’이라는정도전의의견을태조가따랐다.조선태조4년(1395년) 인왕산아래에사직단을세우고국토신과오곡신에게제사를드렸다.아이낳기를바라는아낙들이선바위에기도드렸다. 인왕산자락부암동에있는
석파정(石坡亭)은원래안동김씨세도가김흥근(金興根)의별장으로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하였으나,흥선대원군은임금이하루라도묵은곳은민간인이소유할수없다는규정을이용하여,아들고종을이곳에머물게함으로써자신의소유로만든뒤석파정(石坡亭)이라이름을바꾸었다고전한다. 1925년일제가남산(목멱산)에천황의신사를세우면서남산의
국사당이 인왕산선바 아래로옮겨졌다.인왕산아래안산쪽옛서대문형무소는사적지로지정되어있다.유관순열사가그곳에서숨졌고김구선생도그곳에수감되었다.갑오개혁후1898년,조선왕조때중국사신을맞이하던영은문을헐고그자리에독립문을세웠다.길가운데있던것을1979년70미터떨어진현위치로옮겼다.위 인왕산에는 치마바위전설이전해오고있다.조선중종때신하들의압력으로폐위된단경황후신씨가 인왕산정상아래바위에치마를널어놓아궐안의중종에게애틋한사랑을전했다는얘기가전해온다.그바위는이름하여치마바위다. 조선의중종임금은연산군의폭정으로반정이일어나면서반정군이옹립하여보위에오른임금이다.중종은 연산군의이복동생진성대군이다.진성대군은반정으로왕이되었지만, 단경황후신 씨의아버지인당시영의정신수근은반정공신들에의해살해당했다. 반정이성공하여중종임금이즉위하자왕비가된분이단경왕후이니이분이바로연산군의추종자였던신수근의딸이다. 역적의딸을왕비로삼을수없다는공신들의끈질긴요구에결국중종임금도어쩔수없이왕후신씨를폐위시켜사가로내보냈다. 현대사회에서는연좌제란형벌은없다. 그러나조선시대에는역모죄의경우죄를지은죄인본인은물론부모형제자매3족을멸하게되었다. 현대에와서는연좌제가없기때문에죄과에따라서는비록도덕적으로지탄을받을지는몰라도법적으로는죄를지은본인이외에는아무런죄과를치루지않는죄형법정주의를택하고있다, 그러나중종임금과폐비신씨는10여년을두터운정으로함께살아온부부다. 결국신씨는남편이왕위에오른지8일만에폐서인이되었다. 중종은폐비가된신씨가그리워종종경복궁경회루에올라가폐비신씨가사는인왕산을바라보았으며,이소문을들은폐비신씨는병풍바위아래에있는바위에궁중에서입었던치마를펼쳐앉아왕궁을하루도거르지않고바라보았다하여이때부터이바위를"치마바위"라고불리게되었다한다. 이얼마나애달픈사랑이야기인가? 신씨가궁궐을떠난후중종은자신이탔던말을신씨에게보내기도했는데아직그녀를잊고있지않다는뜻에서였다. 폐서인이된신씨는사가에서홀로중종을그리며살다가70세에세상을떠났으며,신씨가단경왕후로추종된때는영조15년.궁에서쫓겨난지232년만의일이다.